오후의 햇살은 너무나 따사롭다. 문득 그 안에 들어가 나도 모르는 따스함에 휩싸여 응응, 낑낑대며 몸을 부비고 싶어지기도 하는 하늘, 햇살.
꽁꽁 숨어있는 책방을 찾아가는 길에 해의 끝무렵에 돋아지는 추운 기운을 보라색 레깅스로 감싸고, 눈 주위를 조금 시커멓게 칠했다. 화장실을 나오며 잠시,
아, 살 좀 찌고 싶어.
란 서재 이미지 메이킹용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전혀 살은 안 찌고 싶고, 살을 더 어떻게 쪄야할지도 모르는 아치인데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아치의 이미지가 뭔가 부해보이거나 생기롭지 못하다는 나름의 자각을 막 어필하는건데 이것도 쿵짝이 맞아야지. 무의식뿐 아니라 자의'식'과 생'식'까지 모두
'너는 그런 애가 아니야'라고 하는 데서야, 뭐.
닐씬한 다리(안간힘이 점점, 느껴진다. 그래요, 그만할게.) 로 오후를 헤치며 씩씩하게 걸었다. 신촌의 골목에서 못보던 과자들과 골목길로 정겹게 쏟아지는 햇살을 봤고, 요술처럼 금세 나타난 숨어있는 책방도 발견했다. 책방에 쏙 틀어박혀 그 사람에게 선물할 책이 뭐가 있을까라며 뒤적이다 그쪽 관련해선 별다른 식견이 없다란 사실을 엉덩이에 인이 박힐 즈음에 깨닫곤 먼지를 털어내고 문학 책이 있는 좀 더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어어, 투르니에가 보이는거다.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양장본에 껍데기까지 있는 책으로 김현태 번역이었다. 책도 견고해서 좋았는데 로맹 가리와 투르니에의 사진이 태연하게 실려있는데야, 그저 맘이 쏠려 자꾸 어루만지고 또 만지고 이렇게 탐해도 좋나 싶게 가슴이 단단해질 정도로 좋아하고 있는데 2.5란다.
그러니까 82년 출간 당시엔 육천원이었던 책이 헌책방에 들어오면서 이만 오천원이 됐다는건데, 아, 뭔가 맘에 든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내가 좋아한다는걸 아는 순간 상인들에 의해 가격이 뻥튀기 되듯이 높은 가격이 불려지는 느낌? 살까말까, 카드를 긁고 싶어 옆구리가 간질간질, 한번도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에 꽂히지도 않았으면서, 민음사걸 사면 되면서도 웬지 오늘 안 사면 한정판매의 불빛이 깜빡이듯 다음엔 영영 못볼 것 같은 기분, 혹은 기분을 조장하는 가격표의 위력?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눈에 띈 뒤라스의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에 눈이 꽂히자 다시 또 솟구치는 욕망, 아 욕망. 나는 사고 싶음보다 태연하게 책장에 꽂힌 낡았지만 귀품있는 모습에 다시금 반해버리고 말았다. 양장본은 무거워서 싫다고 했던 주제에.
(젠장, 글을 지운다고 누른 백스페이스에 지금까지 썼던 글들이 일부, 날아가고 말았다.)
아저씨에게 반신반의하며 여쭸다.
- 저기, 2.5라고 되어있는건 이만오천원이란 뜻이죠?
- 헌책방인데 그렇게 비싼게 있을라구요. (오예!) 뭔데요.
나는 행여 그렇게 비싼 것 중에 투르니에 것이 들어갈까봐 개미만한 소리로 출판사와 제목을 말해드렸다. 아저씨는 호탕하게(정말? 정말!) 그건 2500원이라고 하셨다. 아, 2500원, 오, 2500원. 그건 책을 사고나서 읽은 후 느끼게될 '왜 샀어'에도 관대한 금액, 그건 내가 충분히 지불하고도 남을만한 행복한 금액. 당장 뒤라스의 책까지 집어들고 계산을 치르자 아저씨가 말해주셨다. (혹시 총각이었다면 죄송, 아, 이건 멜기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닙니다.)
- 이틀 전에 들어온건데, 잘 고르셨네.
칭찬까지 덤으로 받아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책방을 나섰다. 근처의 소금구이집들이 '언니, 책 산 김에 소금기로 맛있어진 돼지 좀 보고가.'란 소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흥정의 기쁨이랄까, 기분 최고! 오늘 이 사람이랑 재미없어도 무효! 물론 무효는 함부로 남발할게 못되고, 애석하게도 이 분과도 퍽 재미있었지 말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색채 심리조사원과 마주쳤다. 도를 아십니까 부류였는데 절대 아니라고 강변하는 이 여성. 그녀는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고른 내게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일정 부분 선을 둔다는 둥, 쿨하게 보이지만 내면엔 상처가 있다는 둥, 누구에게나 아무렇게 던져도 대개 비슷한 지점을 마련할만한 말들을 쏟아냈다. 짐짓 모른척 무슨 색을 고르든 똑같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해줄 그 분의 입을 바라봤다. 날이 건조해선지 메마르고 터있었다. 립글로즈라도 권해줄까 하다가 그녀가 외운걸 까먹을까봐 잠자코 듣고 있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지 않냐고 강요하길래 시간도 돈도 없다고 하자 그래도 알고 싶냐고 자꾸 나를 흔들었다. 나도 그녀를 잡고 흔들면서 이렇게 뜬금없는 사람도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 유형 몇페이지 등등 교본에 나온 예시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 사람과의 약속 시간이 다 돼가서 서둘러 말을 끝냈다. 그녀는 아쉬움 반, 체념 반의 표정으로 나를 건네보다가 순순히 보내줬다. 그게 무엇이든간에 다음엔 잘해내길 바래요.
아, '마우스 제멋대로 시간'이다. 엔터를 눌렀는데 글이 등록되고, 진짜!
오늘은 너무 마셨으니, 내일 다시 쓸게요. 그 사람 만난 얘기를 써야하는데 난 자꾸 딴데로 새고 있어.
아마도
당신을 감질내려고 부러 그러는거란 생각도 찔끔 들어서 참으로 부질없는 아치란 생각도 들긴 합니다.
그런데 누룽지 막걸리는 먹어도 먹어도 너무 맛있단 생각만 머릿 속에서 뱅뱅 뱅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