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물었다.


- 너는 너의 글쓰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다른 공간과 일기말고는 서재에 글을 쓰는게 다인 나로선 서재 글쓰기에 대해 평소에 느낀점을 얘기했다. 일기처럼 쓰고 싶지는 않은데 자꾸 일기화되고 있다고, 그러면 차라리 일기를 쓰는게 낫겠다란 생각도 가끔 한다고, 공감하고 싶다란 바람과는 별개로 그저 '쓰고 싶은 욕구' 때문에 말들을 지어내고 있는건 아닌지, 공적인 영역의 글쓰기로는 한참이나 모잘란다던지, 개인, 나에 대해 집중된걸 다른 누군가가 읽고 싶어진다는건 나란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기인하는건데 그런 사람이 있을까란 의문 등을 털어놓았다.


 그 사람은 '개인적인게 가장 정치적이다.'란 말을 해줬지만 글쎄, 개인적인면들의 비정치적인 것만 얘기하는 나로선 쉽게 공감가지 않았다. 모든 사안에 대한 나의 입장에 충실하다보니 나를 모르면 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감이 안 잡히는데다 다른 사람들이 글을 읽는 욕구가 글을 쓰는 사람을 알고자하는 것보다 글 자체로 동의하고 싶은 측면이 크다면 분명히 별로 권할만한 방식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부랴부랴 쓴 리뷰에서도 성노동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난 이 책을 읽고 어떤 입장에 섰는가, 무엇을 느꼈는가, 내 개인적인 경험은 어땠는가도 중요하겠지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느끼는바와 내 생각의 차이를 좁히려는 시도와 성노동을 정치화하는 방식에서 좀 더 긴밀해질 필요성이 더 크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객관화와 요약이 부재한 글들에서 느껴지는 어거지와 참담한 결론, 비약을 일삼는 구조를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서재지수를 높이려는 수작도 아닌데 터무니없이 많은 글들을 써왔고, 글의 조악한 면면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쓴다. 마치 생각하기와 쓰기를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계속 쓴다. 여러 지점에서 문제가 많은 글임에도 계속 쓰는건 아무래도 지금 내 상황과 연관이 된지도 모르겠다. 일테면 존재증명.
 

 나는 직업이 없다.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는 직업이 없었으며,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을 때 나를 설명해줄 특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20대의 초반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야하지 않느냐는식으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지닌 입장을 설명했고, 그 다음 시기에 모두들 자리를 잡아갈 때는 시기와 기회를(그게 있었다면) 놓치고 근근히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해왔다. 20대 초반에 해명하거나 회피하기만 한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노력을 했다면 난 지금보다 나은 상태였을까. 그런데 난 정말 무언가 되고 싶었던게 없었다. 오로지 자족적인 글쓰기와 생각하기,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들과 일으키는 균열, 즐거움을 만끽하기, 비온 뒤 짜릿할 정도로 차가운 밤거리를 걷고 싶을 뿐이었다. 그 안에선 평생동안 뭘해서 먹고 살아야할지에 대한 고민은 부재했다. '성'의 말대로 그저 놀고먹겠다는 수작이었다. 
 

부재했거나 외면했거나.

 이젠, 아무도 공격하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에서야 나를 공격하는 누구보다 포악하고 사심 가득한 내가 있을 뿐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있다가 무직을 선택했다면 내게는 선택을 지지해줄 명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쫓기듯, 피해서 온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게 아니니까 그저 난 지금 상황을 선택했어, 라면. 그럴 듯한 직업을 바라기도 했고, 누구누구처럼 바빠서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통장에 넉넉한 잔고가 있는 삶을 부러워하기도 했으며 사실 이런 거창한 것보다 그저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으로 다음달이 불안하지 않은 삶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남들과 다른 패턴의 시간에 움직이길 원했음에도 난 점점 시간과 돈에 쫓기고 있어 도리어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며 이 모든게 다 내가 아무것도 노력하지 않았다란 생각으로 귀결되고 있는 상황, 그런 와중의 도피(아무것도 도피가 될 수 없지만. 글을 쓰면서도 난 고민 중이니까)가 아마도 글쓰기였는지 모르겠다.


 나를 포장하거나 희화화시키거나 적나라하게 드러내도 상처받지 않는 수단, 혹은 긴밀하게 모른척할 수 있는 구조. 예전에 가장 두려웠던건 이 상태를 지속시켜 결국 노숙자가 된다거나 자포자기한 삶을 산다는 것이었는데 요즘은 내가 여자여서 비빌 언덕으로 결혼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서인건 아닌가란 소름끼치는 상상도 해보긴 한다. (할 수는 있고? 다른 것보다 더더욱 상상 안 되면서.)그리고 글쓰기도 결국 날 구원해줄 수 없다란 지점에 도착하면 어떡하나란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지금 하는 일에서 난 같이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가끔씩 ' 저 사람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란 의심을 받고 있다. 일테면 알바 연식으로는 터무니없이 늙은 여자가 '하필 왜'란 눈초리 말이다. 지금 하는 일 자체가 저평가된건 둘째치고 너무 박봉이라 답답하지만 가끔, 어느 순간엔 재미있고 신날때도 있다. 물론 서비스직을 존중해주는 사람들이 많은 공간적인 특징이 있을 수 있고, 정말 '내 일'이 아니란 생각에 즐기는거란 예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힘든 일을 할바엔 제대로 된걸 준비해야하지 않겠냐란 충동들로 맘한켠이 내내 불편해지기도 하고.  


 물질적인 것에 욕심이 없다기보다는 잉여로 인한 자원낭비와 버려지는 것들에 무조건적인 아까운 맘이 드는 나로선 적게 벌고, 적게 쓰는게 무리는 아닌데, 그래서 평생 이렇게 살면서 지내고 싶다란 생각을 했는데 루저란 자의식뿐 아니라 평생 이렇게 드문드문, 살아가기가 이렇게 팍팍해서 어떡하냐고 청승을 떨걸 생각하니 거 참.


혼자서 술을 시켜먹어서 그래, 혼자서 술을 더 먹은데나 가까스로 막,차,를 잡아타서.


그의 질문과 지지의 말들이 남겨준 따사로운 면들이 고마워서 오늘도 난, 일기를 쓰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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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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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11: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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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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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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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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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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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1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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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0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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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00: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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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3 00: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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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2009-05-04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다 비밀이군요^^ 긴 목은 슬픈 짐승이라던데... 그래서인가... 글이 좀 울적하네요. 그래도 화이팅!?

Arch 2009-05-04 02:52   좋아요 0 | URL
울적하지 말라고 말미에 웃기려고 기를 써보기도 했는데, 별로였나보다.^^

비밀글은 말이죠, 나무처럼님만 아세요.
제가 아주아주 좋아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제 사심을 눈치채시고 도배질을 해준거랍니다.
 

  두 남녀, 꾸민듯 안 꾸민듯 스스럼없는 차림만큼이나 둘 사이도 편해보였다. 오빠야, 오빠잖아란식의 우격다짐도 없었고, 내가 이런 여잔데란 지루한 도식도 없었다. 점심 시간이 끝날 즈음에 잠시 테라스에 머물다가 가는 사람들. 남녀라기보다는 여남이고,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두 사람.  

 식사를 마친 후, 커피를 시키다말고 남자가 커피도 리필되냐고 묻는다. 리필이란 말을 처음으로 내뱉는 사람처럼 약간 쑥쓰러워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말했다. 

- 왜, 리필할 때까지 있으려고? 

- 해가 너무 좋잖아. 나른하게도. 

 나른함. 특정한 시간대와 특정한 사람, 특정한 장소에서의 나른함을 곧장 쓰던 내가 그 나른함에 박혀서, 나른하니까라던가 나른하네가 아닌 '나른하게도'에 꽂혀서,그만, 선리필을 감행하고 말았다. 

 물론 여기에는 음식을 식탁에 내려놓을때마다 고맙다거나 감사합니다란 말을 잊지 않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밝게 웃는 그들의 종업원 서비스 정신(?)이 한몫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난 요새 커피를 갈아서 크레마가 살짝 남는 아메리카노를 만드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는 중이니까 한잔 더 만드는건 내 기쁨에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계산서엔 커피가 하나인데 대체 아치는 뭐하는 중?'이란 귀여운 점장의 눈짓에도 '손님이 먼저 갖다주라고 했어요' 라며 넘어가면 된다란 속셈도 있었다. 그래, 난 그렇게 어리버리한 인간이 아니라 아주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사람이란 말이지.

 커피 두잔을 가져다주자 두 연인은 봄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맙단 말을 두번이나 했다. 너가 주책맞게 리필 어쩌고 해서 저분이 이런거야, 정말 선물같은 일이야 어쩌고 저쩌고의 얘기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걱정이 안 되는건 아니다. 치밀함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나를 지목하면서 저 분이 전에 커피 한꺼번에 갖다줬는데 이번엔 왜 그렇게 안 하냐며 다시 돌아온 어느 화창한 날, 따져물을지 모를 일이니, 한번 길들인 '어떤 공짜'나 '어떤 선심'이 때론 서비스하는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당사자를 서운하게 할 수 있다는걸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만, 

 공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들이 느꼈던게 나와 통해서란걸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을거라 짐작을 해보니 글쎄, 나른하다는데 이것 정도 못해줄까 싶다. 그래, 얘기는 다시 원점에서 시작된다. 

 꿈은 많을수록 좋다는데, 난 요새 자꾸 정말 맛있는 커피를 주는 까페의 여종업원이 되고 싶다란 생각을 해본다. 사장님은 매일 출타해 있고, 매출 빼놓고 모든걸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까페의 종업원. 이래서 사장되기는 별로였던거야. 아, 얄궂긴. 

 가리봉동 커피맛 밖에 모르는 귀여운 누군가에게 커피를 대접할 때는 카모메 식당의 커피를 맛있게 만드는 주문인 '코피 루악'으로 조금 다른 맛은 어때요란 눈빛을 보내고, 이제서야 한참 유행 지난 헤이즐넛에 푹 빠지신 아빠에겐 '아빠, 이런 맛도 있다니까.'라며 권해드리고 싶다. 가리봉동 그 사람은 커피맛과 상관없이 아치니까 뭐든 괜찮다고 해줄게 분명하고(아아, 술 먹어서 이렇게 제멋대로인거 맞음.) 아빤, 뭐 커피맛이 거기서 다 거기지 하면서도 앙상하게 메말라있는 내 옆구리를 쑤시며 '그 커피'를 먹어보자고 하실게 분명한, 

나른하고 조용한 금요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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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후의 햇살은 너무나 따사롭다. 문득 그 안에 들어가 나도 모르는 따스함에 휩싸여 응응, 낑낑대며 몸을 부비고 싶어지기도 하는 하늘, 햇살.  

 꽁꽁 숨어있는 책방을 찾아가는 길에 해의 끝무렵에 돋아지는 추운 기운을 보라색 레깅스로 감싸고, 눈 주위를 조금 시커멓게 칠했다. 화장실을 나오며 잠시, 

아, 살 좀 찌고 싶어. 

란 서재 이미지 메이킹용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전혀 살은 안 찌고 싶고, 살을 더 어떻게 쪄야할지도 모르는 아치인데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아치의 이미지가 뭔가 부해보이거나 생기롭지 못하다는 나름의 자각을 막 어필하는건데 이것도 쿵짝이 맞아야지. 무의식뿐 아니라 자의'식'과 생'식'까지 모두 

'너는 그런 애가 아니야'라고 하는 데서야, 뭐.

 닐씬한 다리(안간힘이 점점, 느껴진다. 그래요, 그만할게.) 로 오후를 헤치며 씩씩하게 걸었다. 신촌의 골목에서 못보던 과자들과 골목길로 정겹게 쏟아지는 햇살을 봤고, 요술처럼 금세 나타난 숨어있는 책방도 발견했다. 책방에 쏙 틀어박혀 그 사람에게 선물할 책이 뭐가 있을까라며 뒤적이다 그쪽 관련해선 별다른 식견이 없다란 사실을 엉덩이에 인이 박힐 즈음에 깨닫곤 먼지를 털어내고 문학 책이 있는 좀 더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어어, 투르니에가 보이는거다.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양장본에 껍데기까지 있는 책으로 김현태 번역이었다. 책도 견고해서 좋았는데 로맹 가리와 투르니에의 사진이 태연하게 실려있는데야, 그저 맘이 쏠려 자꾸 어루만지고 또 만지고 이렇게 탐해도 좋나 싶게 가슴이 단단해질 정도로 좋아하고 있는데 2.5란다. 

 그러니까 82년 출간 당시엔 육천원이었던 책이 헌책방에 들어오면서 이만 오천원이 됐다는건데, 아, 뭔가 맘에 든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내가 좋아한다는걸 아는 순간 상인들에 의해 가격이 뻥튀기 되듯이 높은 가격이 불려지는 느낌? 살까말까, 카드를 긁고 싶어 옆구리가 간질간질, 한번도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에 꽂히지도 않았으면서, 민음사걸 사면 되면서도 웬지 오늘 안 사면 한정판매의 불빛이 깜빡이듯 다음엔 영영 못볼 것 같은 기분, 혹은 기분을 조장하는 가격표의 위력?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눈에 띈 뒤라스의 여름날의 저녁 열시 반에 눈이 꽂히자 다시 또 솟구치는 욕망, 아 욕망. 나는 사고 싶음보다 태연하게 책장에 꽂힌 낡았지만 귀품있는 모습에 다시금 반해버리고 말았다. 양장본은 무거워서 싫다고 했던 주제에. 

 (젠장, 글을 지운다고 누른 백스페이스에 지금까지 썼던 글들이 일부, 날아가고 말았다.) 

 아저씨에게 반신반의하며 여쭸다. 

- 저기, 2.5라고 되어있는건 이만오천원이란 뜻이죠? 

- 헌책방인데 그렇게 비싼게 있을라구요. (오예!) 뭔데요. 

 나는 행여 그렇게 비싼 것 중에 투르니에 것이 들어갈까봐 개미만한 소리로 출판사와 제목을 말해드렸다. 아저씨는 호탕하게(정말? 정말!) 그건 2500원이라고 하셨다. 아, 2500원, 오, 2500원. 그건 책을 사고나서 읽은 후 느끼게될 '왜 샀어'에도 관대한 금액, 그건 내가 충분히 지불하고도 남을만한 행복한 금액. 당장 뒤라스의 책까지 집어들고 계산을 치르자 아저씨가 말해주셨다. (혹시 총각이었다면 죄송, 아, 이건 멜기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닙니다.) 

- 이틀 전에 들어온건데, 잘 고르셨네. 

 칭찬까지 덤으로 받아들고 보무도 당당하게 책방을 나섰다. 근처의 소금구이집들이 '언니, 책 산 김에 소금기로 맛있어진 돼지 좀 보고가.'란 소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흥정의 기쁨이랄까, 기분 최고! 오늘 이 사람이랑 재미없어도 무효! 물론 무효는 함부로 남발할게 못되고, 애석하게도 이 분과도 퍽 재미있었지 말입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색채 심리조사원과 마주쳤다. 도를 아십니까 부류였는데 절대 아니라고 강변하는 이 여성. 그녀는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고른 내게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일정 부분 선을 둔다는 둥, 쿨하게 보이지만 내면엔 상처가 있다는 둥, 누구에게나 아무렇게 던져도 대개 비슷한 지점을 마련할만한 말들을 쏟아냈다. 짐짓 모른척 무슨 색을 고르든 똑같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해줄 그 분의 입을 바라봤다. 날이 건조해선지 메마르고 터있었다. 립글로즈라도 권해줄까 하다가 그녀가 외운걸 까먹을까봐 잠자코 듣고 있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나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지 않냐고 강요하길래 시간도 돈도 없다고 하자 그래도 알고 싶냐고 자꾸 나를 흔들었다. 나도 그녀를 잡고 흔들면서 이렇게 뜬금없는 사람도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 유형 몇페이지 등등 교본에 나온 예시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 사람과의 약속 시간이 다 돼가서 서둘러 말을 끝냈다. 그녀는 아쉬움 반, 체념 반의 표정으로 나를 건네보다가 순순히 보내줬다. 그게 무엇이든간에 다음엔 잘해내길 바래요.  

 아, '마우스 제멋대로 시간'이다. 엔터를 눌렀는데 글이 등록되고, 진짜!  

오늘은 너무 마셨으니, 내일 다시 쓸게요. 그 사람 만난 얘기를 써야하는데 난 자꾸 딴데로 새고 있어.  

아마도 

당신을 감질내려고 부러 그러는거란 생각도 찔끔 들어서 참으로 부질없는 아치란 생각도 들긴 합니다.  

그런데 누룽지 막걸리는 먹어도 먹어도 너무 맛있단 생각만 머릿 속에서 뱅뱅 뱅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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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30 0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09-04-30 02:04   좋아요 0 | URL
전 동업자 아닌데요.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과도한 도전의식'의 문제이지 사서 보고 안 보고의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과도함은 늘 경계경계.

그나저나 반갑습니다.

turnleft 2009-04-30 0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라, 방드르디에 왜 로멩 가리 사진까지 실려있나요? 궁금;;
그나저나, 봄이군요. 정말 낮에 잠시 벤치에 앉아서 햇빛 쐬고 있으면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단 생각이 물씬.

Arch 2009-04-30 11:09   좋아요 0 | URL
턴레프트님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싶으나 궁금할만한 것도 아니기에 냉큼 밝히자면,
두편의 중편 소설이 실려있거든요. 방드르디 혹은 태평양의 끝과 유럽의 교육.
로맹가리와 여배우 사진도 있던데, 참 댄디하던데요.

으응, 시간이 나를 빼고 흘러갔으면 좋겠다란 생각도^^

2009-04-30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30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녁에 걸려온 전화, 아빠였다. 

 예전엔 집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반사적으로 딸꾹질이 나곤 했다. 혹은 거부감이 생기거나 미련한 기억들이 몽땅 덤벼들기도. 부모님이 어느 정도 나를 포기하면서 자유롭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으며, 애초의 자유로운 감각이 죄송스럽기도 했다. 그 뒤로 전화는 생사확인과 부담없는 안부를 전하는 통로가 되었고, 나보다 부모님이 나를 더 챙겨주셔서 늙은 딸은 늘 황송할 따름이다.

 아무튼 아빠가 저녁에 전화를 주셨다. 

- 아빠? 

- 뭐하냐. 

- 응, 책 보고 있었어. 

- 그런데 목소리가 왜 그러냐. 

- 응?  

- 목소리가 이상하네. 

- 아, 말을 안 하고 있어서 그런가봐. 

- 그럴땐 책이라도 큰소리로 읽어보지. 바둑아, 놀자 멍멍아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정말 회갑을 바라보는 노인이 바둑이를 찾고 동네 한바퀴 노래를 언급했냐고 묻는다면 정말이라고 답할 수 있다. 정말 아빠는 아주 어렸을적 읽었던 교과서의 첫 문장을 읊으셨던거다. 하이 철수, 하이 영희처럼.  

 아빠도 안다. 큰소리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그저 잠깐 목이 잠겼을 뿐이란걸. 당신에게 미안한만큼 당신도 내게 이유없이 미안해하고 있다는걸 나도 잘 안다. 친구라도 만나보라고, 너의 친구 '개밥'을 나도 자꾸 개밥이라고 부른다며 진짜 이름으로 부르자고 제안 하시고, 밥을 잘 챙겨먹으라며 말을 맺는 우리 아빠. 당신께서 긴히 하실 얘기가 있어 전화했는데 바둑이 어쩌고만 남기고 전화를 끊은건 아닐까 별일 없는거냐며 재차 확인하는 딸에게 가타부타 말없이 전화를 끊는 우리 아빠.  

 요전날엔 문자가 뜸하다며 얼마나 됐다고 귀찮아진거냐고 하자, 딸 목소리 듣는게 더 좋지란 낯뜨거운 말씀도 가끔 해주는 우리 아빠.  

 가끔씩 정말 바둑아 놀자 응응 이러면서 책 읽을게, 그러니까 아빠도 아프지 말고 잘 지내셔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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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8 17: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09-04-29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님의 마음도, Arch님의 마음도 공감이 되어서 잠시 마음이 머물다 갑니다.
저도 하루종일 말할 상대가 없이 지내다보면 바둑아 놀자 라도 해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기에.

Arch 2009-04-29 10:36   좋아요 0 | URL
저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들은 자꾸 바둑이라도 불러서 놀라며 저를 채근해요. 그래서 자꾸 괜찮은게 아닌건 아니지 않나란 생각이. 바둑이, ^^
 

 별거 없었다. 그저 어제 브라질 총각인지, 아저씨인지, 혹은 미소년인지 모를(그 나라 기준으로)분께서 말을 걸어온 이야기를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펄쩍 뛰며, '왜 그런 사람들과 말을 섞어.'라며 직접적으로 나를 타겟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싸구려 운운하면서 가벼워 보일 수 있다란 충고를 한다.  

 그러면서 이곳의 치안 상태의 허술함과 다국적 인종들이 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얘기를 해준다.  

- 밤에 말을 거는 사람들은 대개가 클럽에서 버려진 사람들이야. 그런 사람들이 말을 건다고 혹해선 안 돼. 그리고 메인 스트리트에서 hooker들이 사는 위쪽은 밤 10시가 넘으면 절대로 가면 안 돼. 그런 일을 당할지 몰라. 

- 그런 일이 뭔대? 

 그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런 일을 입밖으로 내면 자신의 입이 더러워질새라 미리 질색하는 시늉을 보인다.  

 이럴땐 참 미묘하다. 나는 내가 가진 생각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위험하더라도 그곳에 10시가 넘는 시간에 볼일이 있다면 갈 것이고,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고 이 사람이 맘에 들면 얘기를 할 것이며, 내가  싼티나게 구는지 비싸게 구는지에 상관없이 행동할 것이다라고. 하지만 그럴때마다 그들은 냉담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작은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란 대답을 들려준다. 이럴땐 그저 한뼘쯤 그들 곁에서 떨어져 그들 말로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일 따름이다. 가끔 맞장구를 쳐주고, 웃음을 짓고, 맘에도 없는 몸매에 대한 칭찬을 반갑게 들어줄 따름이다.  

 그녀는 미묘함과는 상관없는 얘기를 계속 해준다.  

- 어제 온 손님은 목에 딱 힘을 주는데 그럴만 하더라고. L사 부사장이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와, 하는 소리를 내자 그녀는 자신이 마치 부사장이라도 된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와인 한병에 120만원인데 올때마다 먹어.  

 문득 바에서 한달에 천만원을 번다는 언니가 왜 아직도 고시원에 사는지가  궁금해졌다. 불편함을 못느낀다나, 그 돈으로 차라리 몸에 투자하는게 낫다나. 뭐, 그런거겠지.  그래, 당신 머리도 뭐 그런거겠지.

 그녀의 이야기가 처음부터 별로였던건 아니었다. 처음엔 부럽기도 하고, 내가 여태껏 겪어오지 않은 삶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돈을 쓰는 재미란 뭘까, 호텔에서 브런치를 먹는건 어떤 기분일까, 훌륭한 선물을 받는다는건, 돈 한푼없이 누군가에게 연애감정을 어필해 여행을 다녀오는 것 등등. 그런데 내가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간접적으로 그녀를 통해 접한지 얼마나 됐다고 난 벌써부터 싫증을 내고 있었다. 이게 내 태도의 득템인 체념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 재미있을까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싼게 말야. 콧대 높은척 도도하게 굴다가 제대로 걸린 남자한테 몸과 맘을 내어주는게 당신이 말하는 비싼거라면 말야. 난 그냥 싼거 할래. 싼티나는 여자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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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28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4-28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