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녀, 꾸민듯 안 꾸민듯 스스럼없는 차림만큼이나 둘 사이도 편해보였다. 오빠야, 오빠잖아란식의 우격다짐도 없었고, 내가 이런 여잔데란 지루한 도식도 없었다. 점심 시간이 끝날 즈음에 잠시 테라스에 머물다가 가는 사람들. 남녀라기보다는 여남이고,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두 사람.  

 식사를 마친 후, 커피를 시키다말고 남자가 커피도 리필되냐고 묻는다. 리필이란 말을 처음으로 내뱉는 사람처럼 약간 쑥쓰러워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말했다. 

- 왜, 리필할 때까지 있으려고? 

- 해가 너무 좋잖아. 나른하게도. 

 나른함. 특정한 시간대와 특정한 사람, 특정한 장소에서의 나른함을 곧장 쓰던 내가 그 나른함에 박혀서, 나른하니까라던가 나른하네가 아닌 '나른하게도'에 꽂혀서,그만, 선리필을 감행하고 말았다. 

 물론 여기에는 음식을 식탁에 내려놓을때마다 고맙다거나 감사합니다란 말을 잊지 않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밝게 웃는 그들의 종업원 서비스 정신(?)이 한몫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난 요새 커피를 갈아서 크레마가 살짝 남는 아메리카노를 만드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는 중이니까 한잔 더 만드는건 내 기쁨에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계산서엔 커피가 하나인데 대체 아치는 뭐하는 중?'이란 귀여운 점장의 눈짓에도 '손님이 먼저 갖다주라고 했어요' 라며 넘어가면 된다란 속셈도 있었다. 그래, 난 그렇게 어리버리한 인간이 아니라 아주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사람이란 말이지.

 커피 두잔을 가져다주자 두 연인은 봄햇살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맙단 말을 두번이나 했다. 너가 주책맞게 리필 어쩌고 해서 저분이 이런거야, 정말 선물같은 일이야 어쩌고 저쩌고의 얘기도 얼핏 들었던 것 같다. 걱정이 안 되는건 아니다. 치밀함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나를 지목하면서 저 분이 전에 커피 한꺼번에 갖다줬는데 이번엔 왜 그렇게 안 하냐며 다시 돌아온 어느 화창한 날, 따져물을지 모를 일이니, 한번 길들인 '어떤 공짜'나 '어떤 선심'이 때론 서비스하는 다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당사자를 서운하게 할 수 있다는걸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지만, 

 공짜가 좋아서라기보다는 그들이 느꼈던게 나와 통해서란걸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알았을거라 짐작을 해보니 글쎄, 나른하다는데 이것 정도 못해줄까 싶다. 그래, 얘기는 다시 원점에서 시작된다. 

 꿈은 많을수록 좋다는데, 난 요새 자꾸 정말 맛있는 커피를 주는 까페의 여종업원이 되고 싶다란 생각을 해본다. 사장님은 매일 출타해 있고, 매출 빼놓고 모든걸 내가 맘대로 할 수 있는 까페의 종업원. 이래서 사장되기는 별로였던거야. 아, 얄궂긴. 

 가리봉동 커피맛 밖에 모르는 귀여운 누군가에게 커피를 대접할 때는 카모메 식당의 커피를 맛있게 만드는 주문인 '코피 루악'으로 조금 다른 맛은 어때요란 눈빛을 보내고, 이제서야 한참 유행 지난 헤이즐넛에 푹 빠지신 아빠에겐 '아빠, 이런 맛도 있다니까.'라며 권해드리고 싶다. 가리봉동 그 사람은 커피맛과 상관없이 아치니까 뭐든 괜찮다고 해줄게 분명하고(아아, 술 먹어서 이렇게 제멋대로인거 맞음.) 아빤, 뭐 커피맛이 거기서 다 거기지 하면서도 앙상하게 메말라있는 내 옆구리를 쑤시며 '그 커피'를 먹어보자고 하실게 분명한, 

나른하고 조용한 금요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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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2 0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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