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을 빙자한 술자리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A가 담배를 꺼내며 순전히 예의상 펴도 되냐고 물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 저건 내가 해왔던 말인데. 대사를 다른 배우한테 빼앗겼을 때처럼 생뚱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애가 말하기 전에는 내가 말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걸 두고 막 안주가 들어오고, 맥주가 유난히 맛있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별나단 소리를 듣기 싫어서, 유난떨기 싫어서 가만히 있으려던 참이었으니까.

 언제부턴가 담배 연기에 대놓고 반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담배 연기는 싫다. 담배 연기가 싫다며 듣도 보도 못한 담배 알레르기가 있다고 뻥까지 친적도 있다. 뻥친거야 나를 뺀 흡연자 9명이 타고 있는 봉고차 운전을 해야했기에 궁여지책으로 떠오른거지만 어쨌든 대놓고, 혹은 돌려서 퍽 여러 번 '나는 싫어요'를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왜, 안주엔 그토록 활활 타올랐으면서 담배 연기엔 조금도 싫은 내색을 안 했을까. 연기를 조금만 맡아도 싫었지만 내가 나서서 나가서 펴라, 어쩌라 하기 귀찮았던 것 같다. 혹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들-술자리에서 담배를 핀다던가-을 굳이 사사건건 문제삼아 피곤해지기 싫었나보다.

 얼마 전에 만난 나이 지긋한 분은 느닷없이 자긴 사회 생활 잘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 그야 나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나이 들고 어느 정도 모난 것도 둥글어지면 나아질줄 알았는데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사람 사이가 불편하다니. 이거 뭔가 좀 잘못 된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 한자는 다 알줄 알았는데 여전히 '하늘 천, 땅 지' 정도로 만족한다는 누구 말처럼 저절로 도달하는 경지란 없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땐 누군가 하지 못하는 말을 나서서 말하는걸 괜찮게 여긴적도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때의 어린 아치는 삼키고, 한 템포 지난 후에 말하는걸 모를 정도로 막무가내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은 좀 안다는 말도 아니다- 직설적이다, 솔직하고 까칠하다는 말만이 남과 나를 구별 지을 수 있는 것인줄 알았다. 그럼 지금은 아닐까. 생각 없이 하는 말에 누군가 상처를 받는다는걸 알면서, 나보다 더 센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중 최악은 하고 싶은 말 다 해놓고 뒤끝 없다고 손 탁탁 터는 유형의 사람-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게 훨씬 더 어렵다는걸 알면서 조금씩 변했다. 게다가 나처럼 속엣말을 다 하는 사람들 내면에 자리 잡은 소심함은 말도 못할 정도이다. 누군가의 지나치는 말 한마디에 온 세계를 다 담아 해석하려 드니 말이다. 별로 즐겁지 않은 일이다.

 사회성이 좋다는걸 결국 감정노동의 일종으로 본다면 누군가 회피한 감정 노동은 다른 누군가 대신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성질대로 아빠랑 싸울 때 동생과 엄마가 그 빈틈을 메웠고, 틱틱대며 분위기를 망칠 때 다른 누군가는 웃거나 실없는 농담을 하며 사람들을 토닥였을 것이다. 자기계발서 읽는다고 사람이 단번에 변하는건 아니듯이 이 책 하나 읽었다고 따지고 툭툭 내뱉는 버릇을 금세 고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감할줄 알고 남과 부딪히지 않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맘처럼 쉽진 않다.

 
 얼마 전에 읽은 <천만 개의 세포가 짜릿짜릿>에선 사교성이 좋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그 친구에게 낯선 사람과 얘기하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말을 했는데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 나도 그래.
자신도 어색하고 불편할 때가 많다고, 단지 그렇지 않은 척할 뿐이라고 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사람이면 정말 얼빠진 사람이지'

 남이 별다른 악의 없이 하는 말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 분석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괜찮은 칭찬을 생각하는건 어떨까. 가끔씩 느끼한 멘트를 날리는 사람을 향해 '가식적으로 말하는걸 원하는건 아니죠'라고 의뭉 떨며 할 말 다 해보는건? '사회적인 나'와 '원래의 나' 사이에서 스위치를 누르듯이 표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민이 좀 더 명료해져서 남들이 자연스럽게 습득한 '사회성'이 저절로 발휘되면 좋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 다행히 사람 사이에선 정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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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2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12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슨 얘기 끝에 사람들이 호응을 한다. 그런데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다. 의기소침하게 대꾸했다. 제가 하려던 얘기가 아닌데요. 다시 얘기해보라길래 좀 더 세심하게 설명을 하고, 예까지 들었다. 좀 전과는 다른 내용의 호응이었지만, 역시 내가 하려던 얘기는 아니었다. 이해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결국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자기들 편한대로, 자기들 원하는대로 듣고 말할 뿐이었다.

 개인적인 얘기를 어렵게 털어놓았다. 뭔가 따뜻하거나 괜찮은 지지를 받을거란 기대를 한건 아니었다. 신비주의로 일관하는 상대가 좀 꼴 보기 싫어서 보란 듯이 해보인 것이기도 했다. 맙소사. 말하다 중간에 잘려먹었다. 내가 남의 말을 자른 것 두 배쯤은 더 되게 요즘 내 말은 톡톡 잘려먹는다. 갈증이 안 날 수가 없다. 집 뒤에 있는 산에 올라가 고함이라도 질러야 할까.

 그녀가 묻는다.

- 아치는 어렸을 때 어땠어요.

어렸을 때라니. 이 음식이 맛있는지, 요즘 무슨 영화가 재미있냐라든지, 취미가 뭐냐고 묻질 않고 하필이면 어렸을 때라니.

- 그냥 좀 뚱했죠. 불만스럽고 답답한데 뭔가에 빠지지도 못하고 흐릿하게 뭉개져 보일 정도로 평범했어요. 평범한 게 싫어서 좀 나대다 애들이 좀 이상하게 보기도 했고, 도벽도 좀 있었고, 그리고 또 어땠더라.

어렸을 때 기억은 아주 까마득하다. 그 깊은 우물 속으로 손을 첨벙 담구더니 거리낌 없이 손을 휘젓는다. 가볍기보단 따사로웠다. 까마득한 곳에 있던 나를 참 오랜만에 떠올려봤다.

뭔가 자꾸 서운해서 끙끙 앓다가 난 정말 못난 사람 같다고 하니까 그는 이런 얘기를 했지, 아마.

- 아치는 이미 충분히 멋져요. 그러니까 나아지려고 너무 조바심내지 마요. 그건 몇 안 되는 감점 사항이에요.

 알고 있었다. 내가 무리 한다는걸. 괜히 한번 부려보는 치기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보다 날 더 잘 알고 있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처럼, 화살 쏴놓고 과녁을 그리는 점쟁이처럼 그저 어쩌다 맞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어쩌다가 구체적이고 좀 더 그럴듯해질수록 정말 잘 알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의 경우는 대부분 그랬다. 그래서 의심 많은 나지만 그의 말이라면 찰떡같이 믿는다.

 그녀는 가끔 내게 말을 건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걸고 그 옆 사람에게도 말을 해서 희소성 없는 말쟁인 아닐까란 의심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녀의 스스럼없음이 난 좀 부럽다. 난 대놓고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말을 (진심으로) 한번도 해본적이 별로 없으니까. 그녀의 말은 상대를 아주 기분 좋은 우쭐함에 젖게 한다. 과식은 배 아프지만, 가끔씩 아주 바닥에서 기어다니다시피 우울할 땐 그녀의 무심한 듯 뱉어지는 말만큼 안심이 되는 게 또 있을까.

 그들을 만나면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고, 내 곁에 이렇게 근사한 사람들이 있다는걸 새삼 느낀다. 그래서 자꾸 갈증이 난다. 만나지 않고, 가끔씩 안부를 묻고,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 말이다. 누구에게도 내보이기 싫은 미운 맘까지 헐겁게 풀어놓다보면 내 바닥이 한심스러워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만 아무 말 없이 그래도 아치니까 괜찮다고 해주는 사람들이다.
 
 혼자인 것 같아, 그것도 아주 먼 곳에서 혼자된 것 같아 쓸쓸해질 때면 안부를 묻고, 자기 요새 뭘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들. 배가 고프고, 다리가 꺾이고, 그만 머리까지 무거워져 이러다 점처럼 되면 좋겠단 생각을 할 때면 재미있는거 알고 있는데 들어보겠냐며 말을 건네는 이들. 우울한 기분에 오랫동안 잠기지 못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내 곁에 있는 이상은 그리 오랫동안 슬퍼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힘내요,
그리고 얼굴 좀 봅시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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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0-1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올라온 페이퍼는 죄다 추천했어요. 아니, 어떻게 이렇게 추천할 만한 글만 씁니까, Arch?

아치는 이미 충분히 멋지다고 말해주는 '그'가 누군지는 짐작되는데 나머지는 짐작이 안되네요. 나도 아치 얼굴 보고 싶은데, 나도 아치 만나고 싶은데, 우리도 봐요, 응?

Arch 2010-10-12 18:05   좋아요 0 | URL
다락방이 싫어하는 '묵혔다 방출한 글'이라 그래요.

F와 D라고, 있어요. 그러게 봐야는데 10월은 공연의 달이라 짬이 안 나요. 놀고 있을 때 오시질 않고.

다락방 2010-10-13 08:45   좋아요 0 | URL
음, D는 어렸을때 어땠냐고 물은 적이 없으니 말을거는 여자쪽이겠군요.

앗 10월은 짬이 안나요? ㅎㅎ 언제 또 노는데요? 나는 23일까지는 못갈것 같아서(서울에 있어야 해요 ㅎㅎ) 달력만 쳐다보고 있었어요 ㅎㅎ 다시 놀때 말해줘요. 그리고, 천명훈남 하고 조금 친해졌어요? 보고싶다, 그 사람.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히히

다락방 2010-10-1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

Arch 2010-10-17 19:53   좋아요 0 | URL
다락방~
 

 * 아침에 아빠랑 밥을 챙겨먹고 재방송 되는 로드 넘버 원을 봤다. 소지섭이랑 김하늘, 연기 잘하는 윤계상 나오는 드라마 정도만 알고 있지 따로 재미있어서 챙겨볼 정도는 아니었다. 나로 말하자면 처음으로 보는거였는데 아빠는 김탁구 때문에 못봐서 늘 아쉬웠던 드라마였나보다. 로드 넘버 원이란 다리에서 헤어진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끝으로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회환과 아쉬움을 드라마 문법으로 풀어내는건 좀 지루했고, 김하늘의 손녀라며 나온 김하늘은 좀 낯뜨거웠다. 혼자 꽁당거리며 마늘을 까며 볼만한 드라마라던가, 빨래라도 개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아빠가 울고 계셨다.
 그렇게 만나고 싶다는, 너무 그리워하고 한 맺힐 정도로 애닮았던 두 사람을 보면서 아빠가 우신다. 드라마를 꾸준히 챙겨보지 않으셨고, 그저 어떤 만남을 음악과 화면으로 과장한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빠가 우신다. 
  아빤, 드라마를 보면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눈다. 드라마 보면서 화내고, 웃고, 한마디 보태신다. 한마디 보태는 엄마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어디서 생각해냈는지 모를 재미있는 얘기를 하신다. 그리고 내 앞에선 한번도 보인적 없는 눈물도 드라마를 볼 때면 무척 헤프다. 아빠가 지금이라도 눈물이 헤퍼져서 다행이다.

 * 아빠가 청소를 하신다. 나가서 걸레라도 빠는게 딸 된 도리겠으나 페이퍼질을 하는 중이라 짬이 안 났다. 물론 같이 해도 덜렁거리는 꼬라지를 보면 부아를 내시니 안 도와드리는게 서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 방바닥이 고슬고슬하다. 냉장고에는 포스티잇으로 -살림의 여왕만 한다는- 불투명 반찬통의 내용물을 적어놓으셨다. 씽크대는 물기 하나 없이 닦아져 있고, 그릇들은 원래 자기들이 이렇게 반짝이는 애들이라며 콧방귀질이다. 뭐 하나 흠없이 완벽하게 해놓고 아빠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가셨다.
                                                                                                                                                                                                                                                                                                                                                 
 * 점심은 내가 하기로 했다. 표고 버섯, 다시마, 고추, 멸치, 새우, 마늘을 우려서 다싯물을 만들고, 호박과 파를 넣어 잔치국수를 끓였다. 맛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싱겁다고 하신다. '아빠, 국물도 쭉 들이켜야 시원해'라고 하자, 핏하고 웃는다. 마지막에 무척 요란스럽게 국물을 들이키시길래, 평소에 소리내서 밥 먹는걸 딱 질색하는 당신께서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래야 맛있어 보인다고 하셨다.

 * 그리곤 낮잠 시간. 텔레비전을 켜놓고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다 주무신다.  

 * 낮잠을 달게 주무신 아빠는 지희를 데리고 치과에 갔다오셨다. 병원에 다녀와선 지희가 어어하고 울었다고, 바보라며 약올리기 시작했다. 장난으로 그러는건데 지희가 울 기미를 보이자 어어 하면서 달래신다. 당신께선 8살 때 사정없이 이를 뺐다며 그래도 눈물 한방울 안 흘렸다고, 그땐 다 그랬다고 말씀을 하신다. 여덟 살의 아빠는 상상이 안 된다.

* "학교 끝나고 집에 가잖아. 집으로 오면서 나무에 매달린 벌통을 건드리고 냅다 뛰는거야. 그럼 뒤에 오는 애들은 벌에 쏘이고 난리가 나는거지"
"그래서?"
"다음부턴 내가 뛰기만 하면 뒤에서 다들 산으로 강으로 도망치기 바빴지."

*  꼭 챙기는 여섯시 내 고향을 보시면서는 김밥 아줌마 손을 보더니 (더러워서) 김밥 못먹겠다고 말을 보태셨다.

* 낮에 못받은 등기를 저녁에서야 받아왔는데 아빠 편지였다.

고향 형님 누구님에게 

시원한 자은 저수지가 그립고 봉두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풀지게지고 내려왔던 방성쟁이가 눈에 선~합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다? 

난 경찰관 정년 퇴직 후 연금 수급자로 방송대학생으로 남자의 후반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사가 늦었으나 형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마을 친구들과 술 먹고 사고(?)친 후 봉두산을 넘어 압록강을 건너 군산을 가다가 도중의 공사판에서 보름 정도 일하다 난 귀가하였던 일등 등...... 지난 과거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정리될 때 우리의 인생도 즐겁지 않겠습니까? 가족과 형제들에게도 안부를 전합니다. 

 악수하고 소주라도 한잔하며 고향 이야기를 하고 싶으나 쉽지 않아 성의를 보내오니 형님 모시고 음료수라도 한잔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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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10-1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힝 요즘은 어째 아빠 얘기를 할 때면 목이 메이는 거 있죠. 정작 전화 한 통 안드리면서 말이죠.
이 글의 아빠의 모습에 우리 아빠의 모습이 겹쳐져서 또 주책맞게 눈가가 촉촉. ㅎㅎㅎ
지금이 새벽2시고 나는 미친듯이 두들기는 하드락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와중이라 그런가봐요.

Arch 2010-10-11 21:00   좋아요 0 | URL
뽀, 그런가봐요. 아빠들은 따로 이렇게 하자며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서로 조금씩 닮은 것 같아요.

류승범은 일렉트로니카를 듣는데요. 줄듯 안 줄듯, 클라이맥스 없는 그 음악이 좋대요. 뽀는 하드락을 듣는구나.
 


살아오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말을 잃으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마이크를 잡은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권력을 상징하죠. 그래서 힘 있는 자는 기자회견을 할 수 있고 그 자리에 마이크가 얼마나 모여드느냐가 사안의 중대성을 방증하기도 합니다. 힘이 없어 아무도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집회고, 그래도 안 되면 추운 날씨에 고공으로 올라가기도 합니다. 제가 사회를 볼 때는 대통령이 와도 순서가 아니면 마이크를 넘겨주지 않습니다. 다스릴 사자, 모임 회자입니다. 사회자는 모임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잘 사용해야 하므로 정당한 권리행사가 아니면 누구에게도 발언권을 주지 않습니다. 제게서 마이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은 관객뿐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명확히 아는 진실의 범위를 건드리는 말도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동아일보> 사설에 "김제동씨의 유명세가 5년간 올라가면서 제작진과 관계가 부드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인용됐습니다.

 정말 그랬다면 <스타 골든벨> 작가들이 왜 토크 콘서트를 보러 왔겠습니까. 인간관계에 대한 그와 같은 언급은, 적어도 직접 제게 물어보시고 나서야 하셨어야 합니다. <100분 토론>에 나오신 청와대 정무수석이 "김제동씨 때문에 우리도 재보선에서 표 손해 많이 봤다"는 발언을 하셨는데, 행위 주체를 저라고 했으면, 제가 한 행위를 적시하고 나서 그 결과를 말씀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저의 어떤 행위 때문에 표를 잃었는지를 밝혀야 정상적이죠. 자꾸 색채를 덧씌워가기 시작하면 불쾌할 수밖에 없습니다.
 국감 중에 "이념적 편향이 눈에 띄는 사람은 제작진이 사회자 고를 때 부담스럽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왔고 KBS 사장이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오히려 거기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 이념적 편향을 띤 것으로 보였다면 그건 제 실수입니다. 다만, 제가 한 어떤 행위에 편향이 있는지 설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노 전 대통령 분향소에 헌화하지 않은 사람이 현 정부 인사 중에 있습니까? 공인으로서 의견의 표출에 대해 가져야 할 신중성을 말씀하신다면 경청하겠습니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하는 의견을 표하는 데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제가 믿은 것이 옳지 않다고 검증되면 언제든 사과할 자세도 되어 있습니다.
 진성호 한나라당 의원, <동아일보> 황호택 논설위원 등 이번 일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신 정치인, 언론인들이 한번 토크 콘서트에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홍정욱 의원은 성향이 다르고 그 사람을 방송에서 내친다면 촌스런 정권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옹호해주신 건 고맙지만 '촌스럽다'는 단어는 그런 데 붙이면 안됩니다. '촌스러움'을 모독하면 안됩니다. 저는 현 정부가 잘되길 바라는 한 시민으로서, 끊임없이 묻고 풍자할 권리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일을 하는 한, 어느 집단이 힘을 쥐건 설령 제가 그 집단에 투표를 했다 하더라도, 이념 성향에 관계없이 풍자의 대상으로 삼을 겁니다. 제 가장 큰 이념은 웃음이고 그걸 포기하면 저는 끝입니다. 그것을 비판이고 반정부라고 말한다면 죽을 때까지 비판적이고 반정부적일 겁니다.

 <맺는말 중> 2009년 10월 MBC의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됐으나 정규 편성되지 못한 <오 마이 텐트>의 조준묵 PD는 MC 김제동의 배려심과 수줍음을 살려, 야외로 나온 게스트들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토크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의도를 설명한다. 조 PD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솔깃한 대목이 있었다. 상대가 채식만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PD는 김제동의 집 근처 방배동 곱창집으로 첫 만남의 장소를 정했고 김제동은 선선히 응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주인아주머니가 김제동 앞에 된장찌개부터 내놓았을 때에야 조 PD는 그의 사려를 알아차렸다고 했다. 언젠가 <오 마이 텐트>의 제작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MC가 무슨 말을 하느냐보다 그의 성품이 만들어내는 공기가 중요한 토크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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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0-10-07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 옳은 말뿐입니다.
김제동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정권과 추종자들.
한심스러움입니다.
김제동의 정제되고 숙련된 입을 통해
국민에게 웃음주는 사회가 지속되길 응원합니다.

Arch 2010-10-11 21:18   좋아요 0 | URL
저도 응원해요

양철나무꾼 2010-10-07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도 추천 꾸욱이요~!!!

Arch 2010-10-11 21:18   좋아요 0 | URL
^^

순오기 2010-10-0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정치가들이 오히려 김제동에게 배워야합니다.

Arch 2010-10-11 21:18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이 책도 추천해요^^
 

* 연휴 동안 맹렬하게 집안일을 하는 A와 방관하는 B사이를 비켜 손이 아니면 발이라도 보태야할 C의 자리를 박차고 숨어있기 좋은 방으로 스며들었다. 동향인 그 방에서 아침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드라큘라가 말라죽 듯이 목이 바짝 마른채 깼다. D의 냄새를 없앤다며 자주 환기를 하다 옆집 누렁이랑 친해졌고 누렁이 친구 흰둥이에게 아는체 하다가 컹컹 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빨래를 돌리고, 틈틈이 요리를 했다. 심심하면 누워서 영화를 봤고, 움직이고 싶으면 걸레를 꼭 짜서 방바닥을 닦았다. 걸레질을 할 때면 '질투는 나의 힘'에서 박해일이 방을 훔치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 얘기를 D에게 해줬더니 아치는 자기 맘을 훔친게 아니냔 객쩍은 소리를 했다.

* D에 대해 말하자면
 아침에 먹으라며 식빵을 계란과 우유물에 담궜다 프라이팬에 구워 주고 내가 자는 틈에 두유를 사다주는 이다. 베이비 슈의 크림은 눈속임일 뿐, 진짜는 크림을 겹겹히 감싸고 있는 살살 녹는 빵에 있다고 보는 D. 지금 읽고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에서 케테 콜비츠가 칼 콜비츠에 대해 하는 말을 인용하자면,
 '그의 사랑과 선함은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기 때문에 그는 마음껏 낭비를 했다' 
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D는 곱고 예쁜 사람이다.

*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는 낮은산에서 나온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시리즈의 세번째 책이다. 전기나 자서전을 읽는건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나열식이나 자의식 과잉의 서술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한다. 누군가의 약력을 알고 싶은게 아니라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떤 이유들이 있었는지, 시련은 어떻게 헤쳐나갔는지를 알고 싶었다. 다이앤 아버스 편을 보는데 그 짧은 글 안에서 다이앤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건 둘째로 하고, 그녀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시선을 느꼈다. 다른 인물들에 대한 서술이 객관적인 시선으로 인물에 대해 빠짐없이 기재하려는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약력 위주로 흐르는 것과 비교됐다.

 언젠가 다이앤 아버스와 케테 콜비츠에 대해 쓴 저자가 서재에서 자신의 다음 책에 대해 얘기한적이 있었다. 그땐 기억하지 못했다. 책이 나오면 서재에서 페이퍼로 다시 얘기해줄거라고 믿었으니까.

* 앞서 말한 저자는 서재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글을 쓸 때면'누군가 이 글을 봐줄거야'란 생각만으로도 힘이 날 때가 있다. 

 아치는 뭐, 성희롱이나 하고.

* 성희롱을 뭐라고 생각하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적인 언동을 해서 상대방을 불쾌하는 것?
사전에선?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과 관련된 언동으로 불쾌하고 굴욕적인 느낌을 갖게 하거나 불이익 등 유무형의 피해를 주는 행위
 라고 한다.
 상대방이 불쾌하거나 굴욕적인 느낌을 갖었나? 우스개 소리로, 남자가 뭐 그런 것에 예민하게란 식으로 넘겼을까. 지금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걸까. 나의 많은 문제점 중 하나는 이렇게 쿨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 추석에 어영부영 하다 오랫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나보고 쿨하다고 했다. (그 나이에)일정한 직업 없이, 앞으로도 별로 가질 생각도 없이 사는걸 보면 내 안에 뭔가 큰 힘이 있단 식이었다. 이럴 때 쿨해보이고 싶었다면 아마도 씽긋 웃고선 건배를 해보였을 것이다. 쿨하기보다는 질척한 나는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 이제 막 합격해놓고 앓는 소리를 하는 친구에게 엄살 피우지 말라고 했던가, 소맥은 머리가 아프다고 했던가, 일을 오래 안 한다 뿐이지 더더욱 일상에 구속되어 있다고 푸념을 했던가.

 그래도 녀석은 자꾸 물었다.

- 그래도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는거 아니냐고.

 조카들 치과를 데려가야하고, 뭘 하고 또 뭘 하는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합격한 주제에 안주가 뭐냐며 구박을 했다. 쿨하지 못해 미안했다.

* 가끔씩 보곤 했던 UV신드롬이 끝났다. 이젠 뭘 기다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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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0-0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곱고 예쁜 사람하고 연애하는구나, Arch.

이 쓸쓸하고 우울한 가을날에 보기 드물게 따뜻한 페이퍼네요. 자는 틈에 두유를 사다주는 사람이라니! 하긴, D자 들어가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좀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좋다, 숨어들기 좋은 방.

Arch 2010-10-05 11:46   좋아요 0 | URL
웃기게도 아직 연애는 아니에요.

다락방도 D에요. 그러니까 다락방은 '좀 좋은 사람'인거죠.

다른 얘기 많이 했는데, 피이~

양철나무꾼 2010-10-0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숨어들기 좋은 방~

그 방을 가지기도 했고,들고 나고...가 자유로울 수 있는 arch님은 좀 부럽구요~^^

Arch 2010-10-05 11:48   좋아요 0 | URL
저 댓글 달고 있었는데, 찌찌뽕 ^^ (얼른 밀가루 반죽 해요~)

내 방이 아니라, 그렇다고 남 방도 아니라서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