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아빠랑 밥을 챙겨먹고 재방송 되는 로드 넘버 원을 봤다. 소지섭이랑 김하늘, 연기 잘하는 윤계상 나오는 드라마 정도만 알고 있지 따로 재미있어서 챙겨볼 정도는 아니었다. 나로 말하자면 처음으로 보는거였는데 아빠는 김탁구 때문에 못봐서 늘 아쉬웠던 드라마였나보다. 로드 넘버 원이란 다리에서 헤어진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끝으로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회환과 아쉬움을 드라마 문법으로 풀어내는건 좀 지루했고, 김하늘의 손녀라며 나온 김하늘은 좀 낯뜨거웠다. 혼자 꽁당거리며 마늘을 까며 볼만한 드라마라던가, 빨래라도 개야겠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아빠가 울고 계셨다.
 그렇게 만나고 싶다는, 너무 그리워하고 한 맺힐 정도로 애닮았던 두 사람을 보면서 아빠가 우신다. 드라마를 꾸준히 챙겨보지 않으셨고, 그저 어떤 만남을 음악과 화면으로 과장한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빠가 우신다. 
  아빤, 드라마를 보면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눈다. 드라마 보면서 화내고, 웃고, 한마디 보태신다. 한마디 보태는 엄마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어디서 생각해냈는지 모를 재미있는 얘기를 하신다. 그리고 내 앞에선 한번도 보인적 없는 눈물도 드라마를 볼 때면 무척 헤프다. 아빠가 지금이라도 눈물이 헤퍼져서 다행이다.

 * 아빠가 청소를 하신다. 나가서 걸레라도 빠는게 딸 된 도리겠으나 페이퍼질을 하는 중이라 짬이 안 났다. 물론 같이 해도 덜렁거리는 꼬라지를 보면 부아를 내시니 안 도와드리는게 서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좋다. 방바닥이 고슬고슬하다. 냉장고에는 포스티잇으로 -살림의 여왕만 한다는- 불투명 반찬통의 내용물을 적어놓으셨다. 씽크대는 물기 하나 없이 닦아져 있고, 그릇들은 원래 자기들이 이렇게 반짝이는 애들이라며 콧방귀질이다. 뭐 하나 흠없이 완벽하게 해놓고 아빠는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가셨다.
                                                                                                                                                                                                                                                                                                                                                 
 * 점심은 내가 하기로 했다. 표고 버섯, 다시마, 고추, 멸치, 새우, 마늘을 우려서 다싯물을 만들고, 호박과 파를 넣어 잔치국수를 끓였다. 맛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싱겁다고 하신다. '아빠, 국물도 쭉 들이켜야 시원해'라고 하자, 핏하고 웃는다. 마지막에 무척 요란스럽게 국물을 들이키시길래, 평소에 소리내서 밥 먹는걸 딱 질색하는 당신께서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래야 맛있어 보인다고 하셨다.

 * 그리곤 낮잠 시간. 텔레비전을 켜놓고 채널을 이리 저리 돌리다 주무신다.  

 * 낮잠을 달게 주무신 아빠는 지희를 데리고 치과에 갔다오셨다. 병원에 다녀와선 지희가 어어하고 울었다고, 바보라며 약올리기 시작했다. 장난으로 그러는건데 지희가 울 기미를 보이자 어어 하면서 달래신다. 당신께선 8살 때 사정없이 이를 뺐다며 그래도 눈물 한방울 안 흘렸다고, 그땐 다 그랬다고 말씀을 하신다. 여덟 살의 아빠는 상상이 안 된다.

* "학교 끝나고 집에 가잖아. 집으로 오면서 나무에 매달린 벌통을 건드리고 냅다 뛰는거야. 그럼 뒤에 오는 애들은 벌에 쏘이고 난리가 나는거지"
"그래서?"
"다음부턴 내가 뛰기만 하면 뒤에서 다들 산으로 강으로 도망치기 바빴지."

*  꼭 챙기는 여섯시 내 고향을 보시면서는 김밥 아줌마 손을 보더니 (더러워서) 김밥 못먹겠다고 말을 보태셨다.

* 낮에 못받은 등기를 저녁에서야 받아왔는데 아빠 편지였다.

고향 형님 누구님에게 

시원한 자은 저수지가 그립고 봉두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풀지게지고 내려왔던 방성쟁이가 눈에 선~합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다? 

난 경찰관 정년 퇴직 후 연금 수급자로 방송대학생으로 남자의 후반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인사가 늦었으나 형과의 추억을 회상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마을 친구들과 술 먹고 사고(?)친 후 봉두산을 넘어 압록강을 건너 군산을 가다가 도중의 공사판에서 보름 정도 일하다 난 귀가하였던 일등 등...... 지난 과거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정리될 때 우리의 인생도 즐겁지 않겠습니까? 가족과 형제들에게도 안부를 전합니다. 

 악수하고 소주라도 한잔하며 고향 이야기를 하고 싶으나 쉽지 않아 성의를 보내오니 형님 모시고 음료수라도 한잔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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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10-11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힝 요즘은 어째 아빠 얘기를 할 때면 목이 메이는 거 있죠. 정작 전화 한 통 안드리면서 말이죠.
이 글의 아빠의 모습에 우리 아빠의 모습이 겹쳐져서 또 주책맞게 눈가가 촉촉. ㅎㅎㅎ
지금이 새벽2시고 나는 미친듯이 두들기는 하드락을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와중이라 그런가봐요.

Arch 2010-10-11 21:00   좋아요 0 | URL
뽀, 그런가봐요. 아빠들은 따로 이렇게 하자며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서로 조금씩 닮은 것 같아요.

류승범은 일렉트로니카를 듣는데요. 줄듯 안 줄듯, 클라이맥스 없는 그 음악이 좋대요. 뽀는 하드락을 듣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