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휴 동안 맹렬하게 집안일을 하는 A와 방관하는 B사이를 비켜 손이 아니면 발이라도 보태야할 C의 자리를 박차고 숨어있기 좋은 방으로 스며들었다. 동향인 그 방에서 아침마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드라큘라가 말라죽 듯이 목이 바짝 마른채 깼다. D의 냄새를 없앤다며 자주 환기를 하다 옆집 누렁이랑 친해졌고 누렁이 친구 흰둥이에게 아는체 하다가 컹컹 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빨래를 돌리고, 틈틈이 요리를 했다. 심심하면 누워서 영화를 봤고, 움직이고 싶으면 걸레를 꼭 짜서 방바닥을 닦았다. 걸레질을 할 때면 '질투는 나의 힘'에서 박해일이 방을 훔치는 장면이 생각난다. 그 얘기를 D에게 해줬더니 아치는 자기 맘을 훔친게 아니냔 객쩍은 소리를 했다.

* D에 대해 말하자면
 아침에 먹으라며 식빵을 계란과 우유물에 담궜다 프라이팬에 구워 주고 내가 자는 틈에 두유를 사다주는 이다. 베이비 슈의 크림은 눈속임일 뿐, 진짜는 크림을 겹겹히 감싸고 있는 살살 녹는 빵에 있다고 보는 D. 지금 읽고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에서 케테 콜비츠가 칼 콜비츠에 대해 하는 말을 인용하자면,
 '그의 사랑과 선함은 퍼내도 퍼내도 끝이 없기 때문에 그는 마음껏 낭비를 했다' 
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D는 곱고 예쁜 사람이다.

*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는 낮은산에서 나온 여성이 세상을 바꾸다 시리즈의 세번째 책이다. 전기나 자서전을 읽는건 '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나열식이나 자의식 과잉의 서술은 사람을 쉽게 지치게 한다. 누군가의 약력을 알고 싶은게 아니라 왜 그런 선택을 했고, 어떤 이유들이 있었는지, 시련은 어떻게 헤쳐나갔는지를 알고 싶었다. 다이앤 아버스 편을 보는데 그 짧은 글 안에서 다이앤에 대해 깊이 공감하는건 둘째로 하고, 그녀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저자의 시선을 느꼈다. 다른 인물들에 대한 서술이 객관적인 시선으로 인물에 대해 빠짐없이 기재하려는 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약력 위주로 흐르는 것과 비교됐다.

 언젠가 다이앤 아버스와 케테 콜비츠에 대해 쓴 저자가 서재에서 자신의 다음 책에 대해 얘기한적이 있었다. 그땐 기억하지 못했다. 책이 나오면 서재에서 페이퍼로 다시 얘기해줄거라고 믿었으니까.

* 앞서 말한 저자는 서재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글을 쓸 때면'누군가 이 글을 봐줄거야'란 생각만으로도 힘이 날 때가 있다. 

 아치는 뭐, 성희롱이나 하고.

* 성희롱을 뭐라고 생각하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성적인 언동을 해서 상대방을 불쾌하는 것?
사전에선?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성과 관련된 언동으로 불쾌하고 굴욕적인 느낌을 갖게 하거나 불이익 등 유무형의 피해를 주는 행위
 라고 한다.
 상대방이 불쾌하거나 굴욕적인 느낌을 갖었나? 우스개 소리로, 남자가 뭐 그런 것에 예민하게란 식으로 넘겼을까. 지금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걸까. 나의 많은 문제점 중 하나는 이렇게 쿨하지 못하다는데 있다.

* 추석에 어영부영 하다 오랫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나보고 쿨하다고 했다. (그 나이에)일정한 직업 없이, 앞으로도 별로 가질 생각도 없이 사는걸 보면 내 안에 뭔가 큰 힘이 있단 식이었다. 이럴 때 쿨해보이고 싶었다면 아마도 씽긋 웃고선 건배를 해보였을 것이다. 쿨하기보다는 질척한 나는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랫동안 준비한 시험에 이제 막 합격해놓고 앓는 소리를 하는 친구에게 엄살 피우지 말라고 했던가, 소맥은 머리가 아프다고 했던가, 일을 오래 안 한다 뿐이지 더더욱 일상에 구속되어 있다고 푸념을 했던가.

 그래도 녀석은 자꾸 물었다.

- 그래도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날 수 있는거 아니냐고.

 조카들 치과를 데려가야하고, 뭘 하고 또 뭘 하는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합격한 주제에 안주가 뭐냐며 구박을 했다. 쿨하지 못해 미안했다.

* 가끔씩 보곤 했던 UV신드롬이 끝났다. 이젠 뭘 기다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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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10-0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곱고 예쁜 사람하고 연애하는구나, Arch.

이 쓸쓸하고 우울한 가을날에 보기 드물게 따뜻한 페이퍼네요. 자는 틈에 두유를 사다주는 사람이라니! 하긴, D자 들어가는 사람은 대체적으로 좀 좋은 사람들인 것 같아요.

좋다, 숨어들기 좋은 방.

Arch 2010-10-05 11:46   좋아요 0 | URL
웃기게도 아직 연애는 아니에요.

다락방도 D에요. 그러니까 다락방은 '좀 좋은 사람'인거죠.

다른 얘기 많이 했는데, 피이~

양철나무꾼 2010-10-0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요,숨어들기 좋은 방~

그 방을 가지기도 했고,들고 나고...가 자유로울 수 있는 arch님은 좀 부럽구요~^^

Arch 2010-10-05 11:48   좋아요 0 | URL
저 댓글 달고 있었는데, 찌찌뽕 ^^ (얼른 밀가루 반죽 해요~)

내 방이 아니라, 그렇다고 남 방도 아니라서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