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을 빙자한 술자리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A가 담배를 꺼내며 순전히 예의상 펴도 되냐고 물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 저건 내가 해왔던 말인데. 대사를 다른 배우한테 빼앗겼을 때처럼 생뚱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애가 말하기 전에는 내가 말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말이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걸 두고 막 안주가 들어오고, 맥주가 유난히 맛있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유별나단 소리를 듣기 싫어서, 유난떨기 싫어서 가만히 있으려던 참이었으니까.
언제부턴가 담배 연기에 대놓고 반응하지 않았다. 여전히 담배 연기는 싫다. 담배 연기가 싫다며 듣도 보도 못한 담배 알레르기가 있다고 뻥까지 친적도 있다. 뻥친거야 나를 뺀 흡연자 9명이 타고 있는 봉고차 운전을 해야했기에 궁여지책으로 떠오른거지만 어쨌든 대놓고, 혹은 돌려서 퍽 여러 번 '나는 싫어요'를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왜, 안주엔 그토록 활활 타올랐으면서 담배 연기엔 조금도 싫은 내색을 안 했을까. 연기를 조금만 맡아도 싫었지만 내가 나서서 나가서 펴라, 어쩌라 하기 귀찮았던 것 같다. 혹은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들-술자리에서 담배를 핀다던가-을 굳이 사사건건 문제삼아 피곤해지기 싫었나보다.
얼마 전에 만난 나이 지긋한 분은 느닷없이 자긴 사회 생활 잘하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낀다는 말을 했다. 그야 나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나이 들고 어느 정도 모난 것도 둥글어지면 나아질줄 알았는데 열등감을 느낄 정도로 사람 사이가 불편하다니. 이거 뭔가 좀 잘못 된 것 같다. 나이를 먹으면 한자는 다 알줄 알았는데 여전히 '하늘 천, 땅 지' 정도로 만족한다는 누구 말처럼 저절로 도달하는 경지란 없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땐 누군가 하지 못하는 말을 나서서 말하는걸 괜찮게 여긴적도 있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때의 어린 아치는 삼키고, 한 템포 지난 후에 말하는걸 모를 정도로 막무가내였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지금은 좀 안다는 말도 아니다- 직설적이다, 솔직하고 까칠하다는 말만이 남과 나를 구별 지을 수 있는 것인줄 알았다. 그럼 지금은 아닐까. 생각 없이 하는 말에 누군가 상처를 받는다는걸 알면서, 나보다 더 센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중 최악은 하고 싶은 말 다 해놓고 뒤끝 없다고 손 탁탁 터는 유형의 사람-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는게 훨씬 더 어렵다는걸 알면서 조금씩 변했다. 게다가 나처럼 속엣말을 다 하는 사람들 내면에 자리 잡은 소심함은 말도 못할 정도이다. 누군가의 지나치는 말 한마디에 온 세계를 다 담아 해석하려 드니 말이다. 별로 즐겁지 않은 일이다.
사회성이 좋다는걸 결국 감정노동의 일종으로 본다면 누군가 회피한 감정 노동은 다른 누군가 대신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내가 성질대로 아빠랑 싸울 때 동생과 엄마가 그 빈틈을 메웠고, 틱틱대며 분위기를 망칠 때 다른 누군가는 웃거나 실없는 농담을 하며 사람들을 토닥였을 것이다. 자기계발서 읽는다고 사람이 단번에 변하는건 아니듯이 이 책 하나 읽었다고 따지고 툭툭 내뱉는 버릇을 금세 고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감할줄 알고 남과 부딪히지 않는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맘처럼 쉽진 않다.
얼마 전에 읽은 <천만 개의 세포가 짜릿짜릿>에선 사교성이 좋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는 그 친구에게 낯선 사람과 얘기하고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말을 했는데 뜻밖의 대답을 듣는다.
- 나도 그래.
자신도 어색하고 불편할 때가 많다고, 단지 그렇지 않은 척할 뿐이라고 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사람이면 정말 얼빠진 사람이지'
남이 별다른 악의 없이 하는 말에 온 신경을 집중시켜 분석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괜찮은 칭찬을 생각하는건 어떨까. 가끔씩 느끼한 멘트를 날리는 사람을 향해 '가식적으로 말하는걸 원하는건 아니죠'라고 의뭉 떨며 할 말 다 해보는건? '사회적인 나'와 '원래의 나' 사이에서 스위치를 누르듯이 표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민이 좀 더 명료해져서 남들이 자연스럽게 습득한 '사회성'이 저절로 발휘되면 좋겠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다. 다행히 사람 사이에선 정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