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얘기 끝에 사람들이 호응을 한다. 그런데 내가 하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다. 의기소침하게 대꾸했다. 제가 하려던 얘기가 아닌데요. 다시 얘기해보라길래 좀 더 세심하게 설명을 하고, 예까지 들었다. 좀 전과는 다른 내용의 호응이었지만, 역시 내가 하려던 얘기는 아니었다. 이해가 부족한 게 아니었다. 결국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자기들 편한대로, 자기들 원하는대로 듣고 말할 뿐이었다.
개인적인 얘기를 어렵게 털어놓았다. 뭔가 따뜻하거나 괜찮은 지지를 받을거란 기대를 한건 아니었다. 신비주의로 일관하는 상대가 좀 꼴 보기 싫어서 보란 듯이 해보인 것이기도 했다. 맙소사. 말하다 중간에 잘려먹었다. 내가 남의 말을 자른 것 두 배쯤은 더 되게 요즘 내 말은 톡톡 잘려먹는다. 갈증이 안 날 수가 없다. 집 뒤에 있는 산에 올라가 고함이라도 질러야 할까.
그녀가 묻는다.
- 아치는 어렸을 때 어땠어요.
어렸을 때라니. 이 음식이 맛있는지, 요즘 무슨 영화가 재미있냐라든지, 취미가 뭐냐고 묻질 않고 하필이면 어렸을 때라니.
- 그냥 좀 뚱했죠. 불만스럽고 답답한데 뭔가에 빠지지도 못하고 흐릿하게 뭉개져 보일 정도로 평범했어요. 평범한 게 싫어서 좀 나대다 애들이 좀 이상하게 보기도 했고, 도벽도 좀 있었고, 그리고 또 어땠더라.
어렸을 때 기억은 아주 까마득하다. 그 깊은 우물 속으로 손을 첨벙 담구더니 거리낌 없이 손을 휘젓는다. 가볍기보단 따사로웠다. 까마득한 곳에 있던 나를 참 오랜만에 떠올려봤다.
뭔가 자꾸 서운해서 끙끙 앓다가 난 정말 못난 사람 같다고 하니까 그는 이런 얘기를 했지, 아마.
- 아치는 이미 충분히 멋져요. 그러니까 나아지려고 너무 조바심내지 마요. 그건 몇 안 되는 감점 사항이에요.
알고 있었다. 내가 무리 한다는걸. 괜히 한번 부려보는 치기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나보다 날 더 잘 알고 있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것처럼, 화살 쏴놓고 과녁을 그리는 점쟁이처럼 그저 어쩌다 맞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어쩌다가 구체적이고 좀 더 그럴듯해질수록 정말 잘 알아서 그런 것 같은데, 그의 경우는 대부분 그랬다. 그래서 의심 많은 나지만 그의 말이라면 찰떡같이 믿는다.
그녀는 가끔 내게 말을 건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도 말을 걸고 그 옆 사람에게도 말을 해서 희소성 없는 말쟁인 아닐까란 의심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녀의 스스럼없음이 난 좀 부럽다. 난 대놓고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말을 (진심으로) 한번도 해본적이 별로 없으니까. 그녀의 말은 상대를 아주 기분 좋은 우쭐함에 젖게 한다. 과식은 배 아프지만, 가끔씩 아주 바닥에서 기어다니다시피 우울할 땐 그녀의 무심한 듯 뱉어지는 말만큼 안심이 되는 게 또 있을까.
그들을 만나면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고, 내 곁에 이렇게 근사한 사람들이 있다는걸 새삼 느낀다. 그래서 자꾸 갈증이 난다. 만나지 않고, 가끔씩 안부를 묻고, 그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 말이다. 누구에게도 내보이기 싫은 미운 맘까지 헐겁게 풀어놓다보면 내 바닥이 한심스러워 고개가 절로 숙여지지만 아무 말 없이 그래도 아치니까 괜찮다고 해주는 사람들이다.
혼자인 것 같아, 그것도 아주 먼 곳에서 혼자된 것 같아 쓸쓸해질 때면 안부를 묻고, 자기 요새 뭘하는지 알려주는 사람들. 배가 고프고, 다리가 꺾이고, 그만 머리까지 무거워져 이러다 점처럼 되면 좋겠단 생각을 할 때면 재미있는거 알고 있는데 들어보겠냐며 말을 건네는 이들. 우울한 기분에 오랫동안 잠기지 못하기도 하지만, 이들이 내 곁에 있는 이상은 그리 오랫동안 슬퍼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니까 힘내요,
그리고 얼굴 좀 봅시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