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절 기념대회에서 p를 도왔다. 지루한 식순과 내빈소개를 거쳐 절절한 선언문 낭독이 이어졌다. 일이 아니었다면 카달로그 하나 힐끗하지 않았을 행사였다. 순서 중에는 학생들이 준비한 연극공연이 있었다. 연극 스텝들이 오퍼레이터를 자처해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자리에 앉아 짤막한 극을 관람했다.
 리허설에선 까불대던 녀석들이 대사를 제대로 치는 건 물론이고 점점 연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빈 소개 후 빠져나간 내빈들의 빈자리가 여럿 보였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눈에 띄었다. '빠가야루'라고 할 때마다 킥킥대는 웃음소리와 대사 하나하나마다 논평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는 좀 거슬렸다. 
 연극을 하는 학생들이 만세를 외칠 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같이 만세를 외쳤다. 앞쪽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오른쪽 네 번째 손가락은 뭉툭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열사가 죽음에 이르자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자위를 꾹꾹 눌렀다. 이것은 재현일까, 신파일까, 감동일까.
  나를 이룬 건 목숨을 건 독립운동과 민주화, 투표권 투쟁 때문이었다. 민족주의의 문제점을 아직 잘 모르면서 왠지 '민족'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어르신들 틈에서 쉬는 날이 아니라 독립운동한 날인 3.1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뉴스에선 보기 싫은 사람이 북한 보고 '네가 먼저 손 내밀면 나도 맘을 풀겠다'란 식의 연설을 했다. '그들만의 뉴스'는 여전히 지루했다.


* 박원순의 책에 나온 안덕 마을 찜질방을 다녀왔다. 계곡물 소리마저 적막할 정도로 한적한 마을이었다. 한증막에서 나와 g에게 예전에 금광이었던 곳을 가보자고 했다. 동굴 입구에서 발이 깨질 정도로 차가운 물에 겁을 내고 물러섰다. -이건 왠지 우리 둘이 어떤 일을 대할 때마다 겪는 감정의 은유 같았다.- 고온 한증막에서 발바닥을 익힌 다음 동굴로 뛰어갔다. 깊이가 얕은 동굴은 좀 묘했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동굴에 앉았다. 동굴 이곳저곳에서 물이 똑똑 떨어졌다. 동굴 안은 바깥보다 따뜻했다. 동굴 안쪽에서 바라본 바깥은 아득한 저 너머처럼 느껴졌다. 
 밥벌이를 제대로 못하는게 콤플렉스였다. 내가 쓸모없는 인간처럼 느껴지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동안 나에게 기회를 줬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꿈이 아니라 얼마나 악착같이 그것을 붙잡고 놓지 않는건가란 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꿈보다 중요한건 어떻게 사느냐는건데 요즘처럼 권태와 의혹과 미련할 정도로 반복되는 짜증이 도처에 널려있을지 몰랐다. 많은 것들을 시도해보고 그 중에서 나랑 안 맞는건 지워나가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겠다.
 나는 대충 이런 얘기를 했다. g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같지도 않은 얘기를 해줬다. 우린 어쩌면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확신과 불안감 사이에서 진동하다 나아가는 것만큼 제자리에서 맴돌 확률도 높다는걸. 그래서 내 곁엔 m이 그랬고 g가 그런 것처럼 오랜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 전에는 안 이랬다며 나는 점점 멍청해진다고 철푸덕 주저앉아 버릴 때 그전에도 그랬으며 그래도 전보다는 좀 나아진거라고 말해줄 친구들 말이다. 물론 한명은 달콤한 말로, 다른 한명은 뭉툭한 가시처럼 살짝 따끔한 말을 하겠지만.

 
*  a는 빨래를 널다 옷걸이가 모자란다며 화를 냈다. 다른 이유는 꿀꺽 삼키고 옷걸이 얘기만 해서 깜빡 속을 뻔 했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못내고 나에게 화를 내는 a에게 나도 같이 화를 냈다. 제정신인 연인이었다면 달래줬을텐데. 착한 a와 나는 전화로 싸우는 짓 따윈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비교적 순탄한 사춘기를 보낸 a와 나는 요즘 30대 앓이 중이다. -이 말은 무척 낯간지럽다.- 우리 둘 다 뭘 해서 먹고사나만 생각했지, 그 후의 삶, 취미나 여가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둘이 앓아서인지 아픈줄도 모르겠다.
 쏙 들어맞는 옷처럼 편하고 따뜻한 a와 밤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전라도닷컴의 사투리를 구성지게 읽어주면 밤잠 없다는 a는 쌔근쌔근 잠을 잔다. 나는 그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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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3-04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무룩 졸고 있었는데 알라딘에 들어오니 아치의 새글이 있어요.
나도 요즘 삼십대앓이 중인가봐요. 아니면 뒤늦은 사춘기. 삼십대 중반엔 누구나 이런건가 싶기도 하고 어쩌면 개인적으로 일어난 자잘한 일들때문에 이런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불안하고 답답해요. 이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을 좀 해소하기 위해서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대체 뭐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제는 앞으로 살아갈것을 대비해서 연금을 들어놔야 겠다는 사람들과 술을 마셨어요. 그런데 저는 제 손금을 보여주며 나는 명이 짧아 일찍 죽는다고 하니 연금 따위 들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노인되서 돈 받아쓸걸 왜 지금부터 저축해야 하느냐고 말이지요. 그런데 내 손금을 본 그들이 말했어요. 다락방은 남편복도 없고 자식복도 없다고. 그렇다면 내게 있는건 무슨복일까요?

둘이 앓아서 아픈줄 모르겠다면 나도 지금 누군가와 같이 고민하고 같이 아파해야 하는건가봐요.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을 찾을수가 없고, 또 설사 찾아도 같이 고민하자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2011-03-04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니 2011-03-04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다행이에요, a님이 있어서. :)

Arch 2011-03-04 13:56   좋아요 0 | URL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Forgettable. 2011-03-04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찌하여 다들 연애얘기만 하는가!!!!!!!!!!!!!!!

Arch 2011-03-04 13:57   좋아요 0 | URL
연애 얘기만 한건 아니라구!

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네.

무스탕 2011-03-04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대를 앓을수 있는것도 좋은거에요. 뭔가 하고 있는거거든요. 나 바바요. 멍~ 하니 세월만 쌓고 있지..

Arch 2011-03-04 16:06   좋아요 0 | URL
에이, 그런게 어딨어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잔근심만 늘어나요.

nada 2011-03-05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순탄한 사춘기를 보내셨어요?
조금 의외인데요.
한번쯤은 징하게 앓을 필요가 있나 봐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어려서 못 놀아봤다고, 실컷 놀고 싶다고 이혼하고 싶답니다.
남들이 보기엔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결혼생활인데 말이죠.

둘이 앓아서 아픈 줄도 모르겠다니, 후후.
아치님, 솔직히 말해바바요.
애교 작렬이죠?

Arch 2011-03-07 13:34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 일찍 일어나셨네~ 저는 아침 내내 노동을 하고 이제야 등붙이고 앉았어요.

순탄하기보다는 이렇다할 반항없이(짜증은 많이 냈죠) 지냈죠. 저도 동감해요. 인생의 어느 시기든 한번 앓아봐야 될텐데, 저는 좀 아프다가도 '뭐 있겠어' 이러면서 훌훌 털어버려요. 그분은, 옆지기님과 얘기해서 놀 여건을 만드는게 더 낫지 않을까요. 물론 놀려고 이혼해서 잘 놀면 좋겠지만.

히~ 저는 무뚝뚝한 여자 사람이에요. a가 더 간드러져요^^

sslmo 2011-03-0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애 얘기는 배아파서 싫은데 말이죠.
3월 첫페이퍼라고 하여 인사드리러 왔어요~

Arch 2011-03-07 13:35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히~

반짝 따뜻해졌다가 다시 또 추워요. 감기 조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