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포장마차는 나 때문에 견디고 있을 것이다

크기에 빗댄다면

대합탕 옆에 놓인 소주잔 같을 것이다

방점처럼, 사랑하는 이 옆에서

그이를 중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바로 그 마음처럼

참이슬은 조각난 조개의 조변석개를 안타까워할 것이다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는 들큼한 취객의 등이여,

당신도 오래 견딘 것인가

소주병의 푸른빛이 비상구로 보이는가

옆을 힐끗거리며

나는 일편단심 오리지널이야,

프레쉬라니, 저렇게 푸르다니, 풋, 이러면서

그리움에도 등급을 매기는 나라가

저 새벽의 천변에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언제든 찾아갈 수 있지만 혼자서는 끝내 가지 않을

혼자라서 끝내 갈 수 없는 나라가

저 피안에서 취객의 등처럼 깜빡이고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은 기차입니다
새들로 완성되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당신은 징검다리입니다
거슬러 오를 수 없는 작은 포말들이 뛰어넘는


당신은 먼지입니다
무수한 입자로 명멸하는


당신은 바람입니다
그저 스미어 정처 없는


당신은 나무입니다
붙박혀 선 채로도 하늘과 맞닿은


당신은 이끼입니다
어두운 뒤란에서 촉촉하게 빛나는


당신은 들길입니다
자박자박 걷고픈


당신은 혼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것 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와 소설만 읽던 시기를 지나 시와 소설은 도저히 안 읽히던 시기를  지나고 다시 시와 소설이 재밌어진 요즘. 이전에 보았던 소설가 김영하의  강연 동영상을 다시 보기 하던 중, 이런 도식이 떠오른다. 낭만기-현실기-복합기. 내가 '나'로서 존재하던 청소년 시기에는 본능적으로 끌리던 시와 소설만 읽었고, 성인이 된 이후는 시와 소설이 못 읽었고, 안 읽혔고, 지금은 다시 시와 소설이 쫀득하게 읽힌다. 그러니까 나의 성인기는 내가 '나'를 밀어내던 시기였고, 노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나를 '나'로 받아 들인 셈이 아닐까 생각한다. 청년기 김승희가 언뜻 떠오르는 김이듬의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이 언니 집에 있길래 빼왔다. 시집은 사서 읽어야 하지만...읽어 보고 사려고 일단.

 

 

 

 

 

말할 수 없는 애인

 

김이듬

 

물이 없어도 표류하고 싶어서

외롭거나 괴롭지 않아도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돌아오거나 영 돌아오지 않겠지

가까운 곳에서 찾았어

우리는 모였지 인도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들과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 학생들

지난해 여름부터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었어

불한당 청년들의 표류처럼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었어

불한당 청년들의 표류처럼 불규칙적이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어휘와 문법을 습득하는 그들이 참 신기하더라

말이 무색해서 팔다리를 브이 자로 벌렸지

매일매일 뱃멀미가 났어

멀리서 돈 벌러 온 한 이방인에게 나는 미약했지만

그의 까만 손가락이 내 얼굴을 두드렸지

장난스럽게 단지 두드리는 시늉만 했는지 몰라

전혀 두드리지 않았는지 몰라

적절한 문장을 못 찾겠어 도무지 사랑할 수 밖에

그는 자신의 긴 이야기를 음악 소리로 듣는 마을에 가서

내 갈색 귀에 다 털려버렸지 코 고는 소리도 뭔가 이상했어

외국인 남자는 어떨까 상상하지 않았다면

말 못할 관계로 가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어

생면부지의 것들을 만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지 않는다면

위험하지 않다면 살아 있는 게 아닌 건 아니지만

끝없이 문제를 만들어야 했어

시험 문항을 만들고

혼혈의 아이들을 낳아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이 모국어를 섞어 말할지도 몰라

콩밥을 나누고 에이즈 환자 모임에 가야 한다 해도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 밖에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그를 사랑했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앞날

 

이성복 

 

당신이 내 곁에 계시면 나는 늘 불안합니다

나로 인해 당신 앞날이 어두워지는 까닭입니다

내곁에서 당신이 멀어져 가면 나의 앞날은 어두워집니다

나는 당신을 잡을 수도 없습니다

언제나 당신이 떠나갈까 안절부절 입니다

한껏 내가 힘들어하면 당신은 또 이렇게 말하지요

"당신은 팔도 다리도 없으니 내가 당신을 붙잡지요"

나는 당신을 떠나야 할 줄 알면서도  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시, 오래된 정원

장석남

 

꽃밭에 꽃 피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걸

귀를 가지런히 모으고 또 두 눈도 한참씩 감아가며

듣고 있노라니

꽃이여,

꽃이여, 하고 부르게도 되는군요

꽃이여, 피어오는 꽃이여,

 

꽃은 꽃밭에만 있는 것이 몸 섧었던가

그 빛깔과 향기와 웃음을

내 귀에까지 또 더 먼

먼 나라까지도 보내었군요

하여 하늘은 고등어처럼 짓푸르고요

 

그 곁에서

고스란히 듣고 보고 앉은

저 바윗돌의 굳고 정한 표정도

겸허히 바라보게 되는군요

 

꽃들이, 또 저 바위가

우리의 이름을 한 번씩, 천천히, 또박또박 부를 듯도 하여

그것을 해마다 새롭고 새롭게 하였으리니

꽃 피는 꽃나무들 밑뿌리 뻗어가는 소리까지

우리 귀와 눈은 따라가서

꽃이여,

꽃이여, 부르면서 그 위에

처음 솟는 웃음을

몇 바가지씩 맘껏 쏟아부어줄

기도를 갖지 않을 수 없군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