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는 상상을 하는

나는 불편한 사람

불난 계절을 막 진압하고도

 

폭발을 멈추지 않는 사람

강의 좌안과 우안에 발을 걸치고 서서

그래도 계속해서 앞으로 가야할 이유를 더듬는 사람

 

시간의 주름을 둘러 쓰고도

비를 맞으면 독이 생기는 나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사람

 

달팽이의 껍질에 불과한

사람 그림자 모두를 타이르기엔 늦은 저녁

 

어쩌면 간절히

어느 멀리 멀리서 살기 위해

돌고 돌다

나를 마주치더라도

나는 나여서 불편한 사람

 

가끔 당신으로부터 사라지려는 수작을 부리는

나는 당신 한사람으로부터 진동을 배우려는 사람

그리하여 그 자장으로 지구의 벽 하나쯤 멍들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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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아이스

    -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 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 끝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 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뺴앗겨버린 것 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 가고 있다

귀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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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이 타는 가을 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박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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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숟가락에 담겨 있는 민물새우뭇국 온기처럼

남루한 가족 모여 따뜻한 저녁 먹는 시간

 

여흘여흘 흘러가던 저녁강 비로소 깊어지며 잠드는데

 

기다리는 사람 없지만

바람 따라 에두른 돌담 위에 노란 등불 밝게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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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바느질

 

자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다녔다

자아의 문학을 한다고 했다

행여 부서질까

세상의 중심처럼 갓난아기와 같이 안고 다녔다

구심력이었다

어찌나 끌어안고 다녔던지

자아의 못에 박힌 가슴이 되었다

자아는 가슴에 박힌 못이 되었다

 

자아는 세상만큼 커지는 것은 아니었다

바위도 아니었다

내가 밀어뜨리지 않아도

시간이 와서 그것을 잘게 부수는 날이 왔다

마사토나 모래나 혹은 더한 흙의 가루같이

색동저고리 옷고름같이 갈기갈기 갈라진

그것은 목을 간질이고 목을 감는 끈이 되었다

목을 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괴롭고 성가셔

63빌딩 꼭대기층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 속에 넣고 물 내리는 스위치를 눌러 버렸다

 

자아

나는 또 나를 절벽으로 이끌어 갔다

한계령 바람 속에 섰다

바람과 바람이 허공 속에 잠시 매듭으로 묶였다가

풀어졌다가 한다.

모가지에 허공과 바람의 손이 간지럽다

가슴에 파란 이파리가 돋아난다

 

하얀 구름의 하얀 스크린 위에

'자아'라는 말이 흰 글씨로 흘러간다

그래, 결국, 그것은 말들 속의 한 단어였다

하얀 말들 속의 하얀 한 단어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다

인생은 그런 단어들을 중심으로 스타카토로 끊어지기만 한다

 

끊어진 스타카토들을 모아 바람이 넋의 바느질을 한다

그러면 자아가 되고 내가 되고 그대가 되고

또 훨훨 날아가 구름의 자취가 된다

밀가루가 바람에 날아가듯

세상의 오만가지

자아가 원심력의 궤도를 타고 날아간다

아니 궤도 따위는 없다

얼굴 없는 시간이 된다

꽉 다문 이빨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오는

석류의

 

수평선으로 수평선으로

홀로 날개를 저으며 나아가는

갈매기의

 

밀물에 들고 썰물에 나고

물결에 숨을 맞추고

그윽하게

 

스페인어로  '나다 이 뿌에스 나다'

우리 말로 '그리고 아무 것도 아냐 그리고....어 아냐 아무것도'

 

얼굴 없는 얼굴로 구름 위에 눕는다

시간 없는 시계로 바람 속에 흩어진다

공허가 나보다 더 큰 그 곳에서

그제야 비로소 가슴의 못을 뽑는다

당신의 손을 잡는다

 

김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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