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김 사 인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그 처자

발그라니 언 손에 얹혀

나 인생 탕진해버리고 말겠네

오갈 데 없는 그 처자

혼자 잉잉 울 뿐 도망도 못 가지

그 처자 볕에 그을려 행색 초라하지만

가슴과 허벅지는 소젖보다 희리

그 몸에 엎으러져 개개 풀린 늦잠을 자고

더부룩한 수염발로 눈꼽을 떼며

날만 새면 나 주막 골방 노름판으로 쫓아가겠네

남는 잔이나 기웃거리다

중늙은 주모에게 실없는 농도 붙여보다가

취하면 뒷전에 고꾸라져 또 하루를 보내고

"나 갈라네" 아무도 안 듣는 인사 허공에 던지며

허청허청 별빛 지고 돌아 오겠네

그렇게 한두 십년 놓아 보내고

맥없이 그 처자 몸에 아이나 서넛 슬어놓겠네

슬어놓고 나 무능하겠네

젊은 그 여자

혼자 잉잉거릴 뿐 갈 곳도 없지

아이들은 오소리 새끼처럼 천하게 자라고

굴속같이 어두운 토방에 팔 괴고 누워

나 부연 들창 틈서리 푸설거리는 마른 눈이나 내다보겠네

쓴 담배나 뻑뻑 빨면서 또 한 세월 보내겠네

그 여자 허리 굵어지고 울음조차 잦아들고

눈에는 파랗게 불이 올 때쯤

나 덜컥 몹쓸 병에 걸려 시렁 밑에 자리 보겠네

말리는 술도 숨겨놓고 질기게 마시겠네

몇 해고 애를 먹여 여자 머리 반쯤 셀 때

마침내 나 먼저 숨 놓으면

그 여자 이제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리

나 피우던 쓴 담배 따라 피우며

못 마시던 술도 배우리 욕도 배우리

 

이만하면 제법 속절없는 사랑 하나 안되겠는가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김명인 시인의 <너와집 한 채> 가운데 한 구절.

이 시는 <너와집 한 채>로 부터 운을 빌려왔다.

<문학동네 2002년 겨울호>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 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 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 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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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자'가 아닌 그 여자의 외간 남자에 동일시 되는.

그저 잉잉 거리는 것이 익숙한 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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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8-04 22:24   좋아요 0 | URL
장면이 연상되는 시네요...우엉

2015-08-07 0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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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던 동생네 식탁위에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있었다.

 

산거야? 물었더니

알고 샀니? 물었더니

아니 그냥 인터넷 검색으로. 한다.

 

박준 시인은 북토크 행사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젊고 발랄하다고 생각했는데, 시는 80년대 감성 느낌이다.

왠지 알아 들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고나 할까.

 

언니는 오늘 <성난 군중으로부터 멀리>랑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를

비교해서 읽어 보라고 권해주었다.

 

동생 집에서 내가 읽고 싶었던 시집을 발견 하는 것

언니랑 책이야기 그림 이야기를 실컷 할 수 있는 것

이런 자매들이랑 함께 할 수 있어

이 생이 행복하다고 느낀 하루.

 

2015.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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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오전 호남선 열차를 타고

창밖으로 마흔두 개의 초록을 만난다.

둥근 초록, 단단한 초록, 퍼져 있는 초록 사이,

얼굴 작은 초록, 초록 아닌 것 같은 초록,

머리 헹구는 초록과 껴안는 초록이 두루 엉겨

확자한 햇살의 장터가 축제로 이어지고

젊은 초록은 늙은 초록을 부축하며 나온다.

그리운 내 강산에세 온 힘을 모아 통정하는

햇살 아래 모든 몸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물 마시고도 다스려지지 않는 목마름까지

초록으로 색을 보인다. 흥청거리는 더위.

 

열차가 어느 역에서 잠시 머무는 사이

바깥이 궁금한 양파가 흙을 헤치고 나와

갈색 머리를 반 이상 지상에 올려놓고

다디단 초록의 색깔을 취하도록 마시고 있다.

정신 나간 양파는 제가 꽃인 줄 아는 모양이지.

이번 주일을 골라 친척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마흔두 개의 사연이 시끄러운 합창이 된다.

무겁기만 한 내 혼도 잠시 내려놓는다.

한참 부풀어오른 땅이 눈이 부셔 옷을 벗는다.

정읍까지는 몇 정거장이나 더 남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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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을 책이지만, 습관처럼 가벼운 책을 한 권 찾아 넣었다.

아침 부터 멘붕이 온 상태여서

하루종일 '괴로워'를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래도 고백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책을 읽는 것 이외,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가지 않는 요즘의 정신이상적인

모호한 상태들이 결국은 오늘 같은 실수를 만든 것이다.

이 와중에도 숲의 나무들은 한 그루 한 그루 어찌 그리 이쁜지

먼 산 실루엣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정신 나간 양파는 제가 꽃인줄 아는 모양이지'

이렇게 한 시즌이 지나가고 있다.

 

2015 08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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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배 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름,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이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 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 보니,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 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았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 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3일,5일,6일,9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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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으로 총의 방아쇠를 당겨 혀를 쏘았다

쏟아지는 것은 말이 아니라, 피였다

오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안에서 자라는 말을 베어 물었다

그렇더라도,

생각은 말로 했다

 

저것은 나무

저것은 슬픔

저것은 장미

저것은 이별

저것은 난초

 

 

 

끝내는 말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을 가지고 실컷 떠들고 놀 것을 그랬다

 

꽃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향을 피울 것을 그랬다

온종일 말 밖으로 한 걸음도 나서지 못했다

 

아무도 몰래, 불어가는 바람 속에

말을 섞을 것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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