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소설만 읽던 시기를 지나 시와 소설은 도저히 안 읽히던 시기를  지나고 다시 시와 소설이 재밌어진 요즘. 이전에 보았던 소설가 김영하의  강연 동영상을 다시 보기 하던 중, 이런 도식이 떠오른다. 낭만기-현실기-복합기. 내가 '나'로서 존재하던 청소년 시기에는 본능적으로 끌리던 시와 소설만 읽었고, 성인이 된 이후는 시와 소설이 못 읽었고, 안 읽혔고, 지금은 다시 시와 소설이 쫀득하게 읽힌다. 그러니까 나의 성인기는 내가 '나'를 밀어내던 시기였고, 노년이 되어가는 지금은 나를 '나'로 받아 들인 셈이 아닐까 생각한다. 청년기 김승희가 언뜻 떠오르는 김이듬의 시집 <말할 수 없는 애인>이 언니 집에 있길래 빼왔다. 시집은 사서 읽어야 하지만...읽어 보고 사려고 일단.

 

 

 

 

 

말할 수 없는 애인

 

김이듬

 

물이 없어도 표류하고 싶어서

외롭거나 괴롭지 않아도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떠났다 돌아오거나 영 돌아오지 않겠지

가까운 곳에서 찾았어

우리는 모였지 인도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들과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인 학생들

지난해 여름부터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었어

불한당 청년들의 표류처럼 나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었어

불한당 청년들의 표류처럼 불규칙적이었지만

무서운 속도로 어휘와 문법을 습득하는 그들이 참 신기하더라

말이 무색해서 팔다리를 브이 자로 벌렸지

매일매일 뱃멀미가 났어

멀리서 돈 벌러 온 한 이방인에게 나는 미약했지만

그의 까만 손가락이 내 얼굴을 두드렸지

장난스럽게 단지 두드리는 시늉만 했는지 몰라

전혀 두드리지 않았는지 몰라

적절한 문장을 못 찾겠어 도무지 사랑할 수 밖에

그는 자신의 긴 이야기를 음악 소리로 듣는 마을에 가서

내 갈색 귀에 다 털려버렸지 코 고는 소리도 뭔가 이상했어

외국인 남자는 어떨까 상상하지 않았다면

말 못할 관계로 가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어

생면부지의 것들을 만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지 않는다면

위험하지 않다면 살아 있는 게 아닌 건 아니지만

끝없이 문제를 만들어야 했어

시험 문항을 만들고

혼혈의 아이들을 낳아 식탁에 둘러앉아 각자이 모국어를 섞어 말할지도 몰라

콩밥을 나누고 에이즈 환자 모임에 가야 한다 해도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 밖에

너와 헤어진 다음 날 그를 사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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