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7월
구판절판


교사와 학생의 관계라는 건 착각 위에 성립되는 거야. 교사는 무언가를 가르치고 있다고 착각하고 학생은 뭔가를 배우고 있다고 착각하지. 그리고 중요한 건 그렇게 착각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행복하다는 거야. 진실을 알아봤자 좋을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거든. 우리가 하는 일은 말하자면 교육놀이에 지나지 않는 거야-83쪽

적극적으로 남을 비난하는 인간이란 주로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을 통해 희열을 얻으려는 인종이고, 어디 그럴 만한 기회가 없는지, 늘 눈을 번득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는 누가 됐건 상관없는 것이다.-252쪽

그가 특히 끔찍하다고 생각한 것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이 발하는 음의 에너지였다. 그는 지금껏 이 세상에 그런 악의가 존재한다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피해자 쪽에서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불합리한 폭력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270쪽

학교폭력에는 결코 끝이라는 게 없어요. 당사자가 같은 학교에 있는 한, 언제까지고 이어지는 것입니다. 교사가 '왕따는 없어졌다'라고 말할 때, 그건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 불과합니다.-338쪽

...작품을 평하는 말 중에 독특한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을 묘사한다'라는 말입니다. 한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써서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뜻일 텐데, 그건 단순한 설명문으로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주 작은 몸짓이나 몇 마디 말 같은 것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그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도록 쓰는 것이라던데요?-3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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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구판절판


나는 브라우니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본 순간 그 즉시 사로잡혔다. 마치 작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 개의 이미지로 시야를 좁힐 수 있어 주위 모든 사물을 다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감수성이 예민한 여섯 살짜리 꼬마를 가장 만족시킨 건 렌즈 뒤에 몸을 숨긴 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꼬마는 카메라 렌즈를 자기 자신과 세상 사이를 가로막는 벽처럼 사용했다.-12쪽

"제법 위트는 있지만 뛰어난 사진은 아니야. 너무 머리를 쓴 티가 나니까. 내 사진은 지나치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게 드러나. 자기가 찍은 인물사진들과 다른 점이야. 자기 사진들은 우연히 찍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한 장 한 장 찍을 때마다 철저하게 계산하고 심사숙고한 게 분명하지. 그럼에도 마치 우연히 찍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그건 아마도 대단한 기술에 속할 거야."-373쪽

죽음에 가까이 가보고 나서야 목전에 임박한 위험이 사진가에게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상황이란 걸 알게 되는 것이다. 사진가는 모든 장면을 뷰파인더를 통해 보기 때문에 위험에는 어느 정도 면역이 된다. 카메라가 방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카메라 뒤에 있으면 어떤 피해도 입지 않을 듯 느껴진다. 카메라 덕분에 위기 상황에 대한 면책특권을 얻는 것이다.-397쪽

...기자는 청소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떤 장면의 세세한 부분들을 모은다. 그 세세한 것들이 한데 모이면 '큰 그림'이 완성된다. 사진가는 늘 상황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확실한 영상 하나를 원하지만 작가는 작은 일들을 모아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다. 세밀한 묘사가 없는 이야기는 맥없고 심심할 수밖에 없으니 좋은 글을 쓰려면 균형감을 유지해야 한다. 글 전반에 작가의 시각이 담기지 않으면 독자는 작가가 관찰한 바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없다.-404쪽

나는 미국 생활의 자명한 진리 중 하나를 깨닫게 됐다. 일단 인기를 얻으면 어디서나 그 사람을 찾는다. 미국 문화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늘 무시된다. 고군분투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발행인, 잡지 편집자, 제작자, 갤러리 주인, 에이전트들을 설득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사람은 낙오자로 취급될 뿐이다. 성공할 수 있는 길은 각자 찾아내야 하지만, 그 누구도 성공을 이룰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다. 명성을 얻지 못한 사람에게 기회를 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더라도, 자기 판단만 믿고 무명의 인물에게 지원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런 까닭에 무명은 대부분 계속 무명으로 남는다. 그러다가 문이 열리고 빛이 들어온다. 행운의 밝은 빛에 휩싸인 후로는 갑자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고 반드시 써야 할 인물이 된다. 이제 모두 그 사람만 찾는다. 모두 그 사람에게 전화한다. 성공의 후광이 그 사람을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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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여행 - 만화가 이우일의 추억을 담은 여행책
이우일 글 그림 / 시공사 / 2009년 6월
절판


"난 여행갈 때 가지고 가는 책은 별로 재미없는 걸로 골라요. 재미있는 책은 집에서 읽으면 좋잖아요. 편하게 소파에 누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읽으면 천국이 따로 없지. 재미는 없지만 한번쯤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책을 여행 갈 때 가지고 가면 좋아요. 혹시 다 못 읽어도 크게 후회되지 않고. 헤로도토스의 <역사> 같은 책이 폼도 나고 좋지. 그 책을 들고 헤로도토스처럼 세상을 떠도는 거야. 흠이라면 역시 조금 두껍다는 것 정도?"-11쪽

새로운 여행의 추억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려면 더 오래된 낡은 추억들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한다. 말 그대로 추억의 포화상태.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게 다 욕심 때문인 것을. 과거의 향수, 여행의 추억, 삶의 흔적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여행의 기억들을 음미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새로운 여행의 추억을 만들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이렇게 추억만 만들다 떠난다면 그것을 누가 추억해 줄까? 우리가 모든 것들을 들여다보며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뿐인데 말이다. 기념품에 얽힌 여행의 추억은 물론 소중하지만, 정작 그것을 알아줄 우리 자신들이 없다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추억보다는 당장의 시간, 이 순간들을 즐겨야지. 흘러간 시간은 이미 기한이 다한 통조림 같은 것인지도 모르니까.-31쪽

이제 배낭여행도 꽤 많이 해서인지 우린 많은 것을 본능에 맡기곤 한다. 예를 들면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한 기차표나 비행기표, 차표가 그렇다. 미리 예약같은 건 하지 않는다. 닥치면 해결된다는 식이다. 아주 급하지만 않다면 하루이틀 배가 기다리거나, 빙 돌아가는 버스를 타게 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배낭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런 여행에 비해 꽉짜인 스케줄의 여행은 비참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이 삶과 같다면 그런 여행은 매일매일이 감옥에서의 삶 같은 느낌일 것이다.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여행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시행착오투성이의 배낭여행을 좋아한다. 비록 실수투성이고 한심하지만 우리와 닮았으니까.-85쪽

여행을 일상으로 만드는 장소들이 있다. 작은 카페나 공원, 헌책방, 동물원 같은 곳이 그런 곳들이다...내가 사는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나는 진정한 여행자임을 실감한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일상을 경험한 덕분에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줄곧 여행자로 남게 된다.-108쪽

도쿄를 여행하며 느낀 것 중 하나는 식당밖에 놓아둔 음식 모형이나 사진은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형이나 사진과 실제 음식이 극히 다른 식당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일단 식당에 들어서면 식당에서 제시한 예와 거의 흡사한 모습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물론 모양이 맛을 책임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충분히 믿을 만하다. 피규어의 나라, 그래픽의 왕국답다.-172쪽

멋진 여행가를 보면 언제나 부럽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아무렇게나 입은 것 같은 셔츠, 나달나달한 거대한 배낭, 무엇보다 그들의 눈이 대단하다.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투명에 가까운 여행가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그 검은 눈동자에 풍덩 하고 빠질 것만 같다. 다른 것은 그럭저럭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지만 그 눈동자만은 어쩔 수가 없다. 나이가 젊은 여행가든 노인 여행가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다. 멋진 여행가는 모두 비슷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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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 더 1 커피 한 잔 더
야마카와 나오토 지음, 오지은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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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 배울 생각 없지? 사실은 컴퓨터를 못하는 아날로그한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 헌책방 갔다가..카페에 가서..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방금 산 책을 읽는..아빠의 놀이란 이런 거란다.
- 블렌드는 카페의 간판 메뉴, 처음 들어온 가게에서는 일단 블렌드를 주문하는 게 예의다.
- 이유는 딱히 없는데, 맛있는 커피를 내오는 가게는 배전 샵, 분위기가 좋은 가게는 카페, 그렇게 부르곤 했다. 카페의 커피는 적당히 맛있는 게 좋다. 너무 맛있는 커피 앞에서는 긴장해버리니까.
- 남자도 서른 살을 넘기면 시간을 때우기가 힘들어진다. 결국 돈을 쓰도록 되어있다. 돈은..쓰면 없어진다. 또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이브리스크식, 사이폰식, 넬 드립, 도쿄의 간다 고서점 거리-1쪽

- 옅고 미지근하다면 혹시 뜨거운 커피를 바로 얼음 위에 부은 거 아니에요? 그러면 바로 얼음이 녹아버려요. 넓은 그릇에 얼음물을 부어놓고 그 안에 커피 서버째 넣어서 온도를 낮춰야 돼요.
- 입춘 전날에, 그해 길하다는 방향을 보며 후토마키 초밥을 한 줄 통채로 물고 아무 말 없이 먹으면 일 년을 잘 보낼 수 있다고. 이 초밥을 에호우 마키라고 부르는 듯.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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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엄마 찬양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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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가스 요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단지 성만을 다루는 작품은 그다지 매력이 없다. 그런 작품은 활력이 없기 때문이다. 인생은 단지 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인생을 오로지 성으로만 다루는 작품은 너무 인위적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그런 작품은 너무 단조롭고 예측 가능한 틀 속에서 전개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파하면서, 최고의 에로티시즘은 성이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 속의 원료가 되는 작품 속에서 구현된다고 밝힌다. 다시 말해 에로티시즘은 쾌락이나 섹스를 숨기지 않은 채 성행위를 장식하여 예술적 차원을 덧붙이는 작업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238쪽

바르가스 요사의 이런 생각은 에로티시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8세기에는 쾌락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보다 낫고 보다 진정하며 보다 자유로운 세상을 얻게 만드는 도구였고, 교회나 인습에서 개인을 해방시키는 방편이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에로티시즘은 아주 세련된 유희로 변했지만, 20세기에는 식상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변질되었으며, 상업화되고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구성을 따르게 되었다. 에로티시즘은 더이상 형식적 실험을 하지 않았고 사회 비판이나 기존 도덕에 대한 도전적 어조도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의 작가는 어떤 에로티시즘 작품을 써야 예술적 차원을 획득할 수 있을까?-238쪽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은 문학적 의미를 획득한다. 일반적인 에로티시즘 문학이 음침하고 잔인하며 폭력적인 분위기를 띄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밝고 우아하며 심지어 아름답게 느껴진다. 또한 문자예술과 시각예술의 경계를 파괴하면서, 성은 예술적 차원을 획득한다. 바르가스 요사는 이 작품에 관해 이렇게 평한다. "<새엄마 찬양>은 그림에서 느껴지는 에로틱한 이미지를 언급하는 유희적 글쓰기이다.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아주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기존 작품에서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기능적 역할을 위한 언어를 사용했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주 풍요롭고 암시적이며, 이전 작품에서 결코 사용하지 않았던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239쪽

...성에 대한 집착과 육체적인 것의 거부라는 상반된 개념은 대립되고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경계를 무너뜨린다. 육체성과 영혼성의 경계 파괴는 천사와 같은 순진한 모습의 알폰소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후에는 리고베르토씨가 근친상관을 알고 독실한 신자처럼 엄격한 삶을 사는 것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암시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 '원죄 없는 잉태'라는 기독교의 영혼성과 나머지 텍스트를 관통하는 성적 매혹에 대한 요소를 결합시킨다. 이것은 섹스는 포르노든 고상한 문화든, 심지어 종교든 세상의 모든 인간적 삶에서 중심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르가스 요사의 생각이 작품 속에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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