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여행갈 때 가지고 가는 책은 별로 재미없는 걸로 골라요. 재미있는 책은 집에서 읽으면 좋잖아요. 편하게 소파에 누워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읽으면 천국이 따로 없지. 재미는 없지만 한번쯤 읽어봐야 할 것 같은 책을 여행 갈 때 가지고 가면 좋아요. 혹시 다 못 읽어도 크게 후회되지 않고. 헤로도토스의 <역사> 같은 책이 폼도 나고 좋지. 그 책을 들고 헤로도토스처럼 세상을 떠도는 거야. 흠이라면 역시 조금 두껍다는 것 정도?"-11쪽
새로운 여행의 추억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려면 더 오래된 낡은 추억들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한다. 말 그대로 추억의 포화상태.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게 다 욕심 때문인 것을. 과거의 향수, 여행의 추억, 삶의 흔적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여행의 기억들을 음미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새로운 여행의 추억을 만들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이렇게 추억만 만들다 떠난다면 그것을 누가 추억해 줄까? 우리가 모든 것들을 들여다보며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자신뿐인데 말이다. 기념품에 얽힌 여행의 추억은 물론 소중하지만, 정작 그것을 알아줄 우리 자신들이 없다면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니 추억보다는 당장의 시간, 이 순간들을 즐겨야지. 흘러간 시간은 이미 기한이 다한 통조림 같은 것인지도 모르니까.-31쪽
이제 배낭여행도 꽤 많이 해서인지 우린 많은 것을 본능에 맡기곤 한다. 예를 들면 다음 행선지로 가기 위한 기차표나 비행기표, 차표가 그렇다. 미리 예약같은 건 하지 않는다. 닥치면 해결된다는 식이다. 아주 급하지만 않다면 하루이틀 배가 기다리거나, 빙 돌아가는 버스를 타게 되더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배낭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런 여행에 비해 꽉짜인 스케줄의 여행은 비참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이 삶과 같다면 그런 여행은 매일매일이 감옥에서의 삶 같은 느낌일 것이다.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여행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시행착오투성이의 배낭여행을 좋아한다. 비록 실수투성이고 한심하지만 우리와 닮았으니까.-85쪽
여행을 일상으로 만드는 장소들이 있다. 작은 카페나 공원, 헌책방, 동물원 같은 곳이 그런 곳들이다...내가 사는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나는 진정한 여행자임을 실감한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일상을 경험한 덕분에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줄곧 여행자로 남게 된다.-108쪽
도쿄를 여행하며 느낀 것 중 하나는 식당밖에 놓아둔 음식 모형이나 사진은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형이나 사진과 실제 음식이 극히 다른 식당은 거의 보지 못했다. 일단 식당에 들어서면 식당에서 제시한 예와 거의 흡사한 모습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물론 모양이 맛을 책임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각적으로는 충분히 믿을 만하다. 피규어의 나라, 그래픽의 왕국답다.-172쪽
멋진 여행가를 보면 언제나 부럽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 아무렇게나 입은 것 같은 셔츠, 나달나달한 거대한 배낭, 무엇보다 그들의 눈이 대단하다.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투명에 가까운 여행가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그 검은 눈동자에 풍덩 하고 빠질 것만 같다. 다른 것은 그럭저럭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지만 그 눈동자만은 어쩔 수가 없다. 나이가 젊은 여행가든 노인 여행가든 남자든 여자든 상관이 없다. 멋진 여행가는 모두 비슷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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