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구판절판


꼽추는 맨 아래 계단에 가방을 열어 놓은 채로 두고 서서 코를 훌쩍이며 입을 씰룩거렸다. 어쩌면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새삼 깨닫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쓰레기 같은 잡동사니만 가득 찬 가방 하나를 들고 아무 연고도 없는 마을에 나타나서 미스 아밀리아의 친척이라고 우기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황당하고 비참한지를 말이다. 아무튼 그는 갑자기 계단에 주저않아 울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꼽추가 한밤중에 가게를 찾아와서는 주저않아 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밀리아는 손으로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고, 남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꼽추의 울음소리 외에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9쪽

미스 아밀리아의 술에는 무언가 아주 특별한 게 있었다. 혀 끝에서는 정갈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내고, 일단 뱃속으로 들어가면 화끈한 기운이 오랫동안 몸을 훈훈하게 녹이는 것이다. 그것뿐이 아니다. 백지 위에 레몬 즙으로 메시지를 쓰면 글씨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종이를 잠시동안 불에 대고 있으면 글씨가 갈색으로 변해 그 내용을 분명히 알아볼 수가 있다. 위스키가 바로 그 불이고, 메시지는 한 인간의 영혼 속에 씌어진 글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아밀리아가 만든 술의 진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22쪽

그냥 무심히 흘려 버렸던 일들, 마음속 깊이 은밀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생각들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직조기와 저녁 도시락, 잠자리, 그리고 다시 직조기, 이런 것들만 생각하던 방적공이 어느 일요일에 그 술을 조금 마시고는 늪에 핀 백합 한 송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바닥에 그 꽃을 올려놓고 황금빛의 정교한 꽃받침을 살펴볼 때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고통처럼 날카로운 향수가 일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눈을 들어 1월 한밤중의 하늘에서 차갑고도 신비로운 광휘를 보고는 문득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지독한 공포로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미스 아밀리아의 술을 마시면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을 느낄 수도, 기쁨을 느낄 수도 있지만 결국 이 경험들이 보여주는 것은 진실이다. 그 술을 마시면 영혼이 따뜻해져서 그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22쪽

그렇다면, 도대체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사랑이란 두 사람의 공동 경험이다. 그러나 여기서 공동 경험이라 함은 두 사람이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을 주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지만, 두 사람은 완전히 별개의 세계에 속한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쌓여 온 사랑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사랑을 주는 사람들은 모두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고독한 것임을 영혼 깊숙이 느낀다. 이 새롭고 이상한 외로움을 알게 된 그는 그래서 괴로워한다. 이런 이유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딱 한 가지가 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랑을 자기 내면에만 머무르게 해야한다. 자기 속에 완전히 새로운 세상, 강렬하면서 이상야릇하고, 그러면서도 완벽한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49쪽

이제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 아주 이상하고 기이한 사람도 누군가의 마음에 사랑을 불 지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어서도 20년 전 어느 날 오후, 치허 거리에서 스쳤던 한 낯선 소녀를 가슴에 간직한 채 계속해서 그녀만을 사랑할 수도 있다. 목사가 타락한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사랑 받는 사람은 배신자일 수도 있고 머리에 기름이 잔뜩 끼거나 고약한 버릇을 갖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랑을 주는 사람도 분명히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지만, 이는 그의 사랑이 점점 커져 가는 데에 추호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디로 보나 보잘것없는 사람도 늪지에 핀 독백합처럼 격렬하고 무모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선한 사람이 폭력적이면서도 천한 사랑을 자극할 수도 있고, 의미 없는 말만 지껄이는 미치광이도 누군가의 영혼 속에 부드럽고 순수한 목가를 깨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 -50쪽

그래서 우리들은 대부분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기를 원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간단명료하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연인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는 아무리 고통을 수반할지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능한 한 모든 관계를 맺기를 갈망한다.-51쪽

성별을 알 수 없는 창백한 얼굴에 회색빛 사팔눈은 너무 심하게 가운데로 쏠려 있어서, 두 눈이 남몰래 간직한 슬픔을 나누며 서로 은밀히 마주보고 있는 듯하다.
회색 눈은 나날이 조금씩 더 심하게 가운데로 모여 마치 슬픔과 고독의 눈빛을 나누기 위해 서로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10,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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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
윤대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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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세상이나 자신에 관해 흥미를 잃고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권태라는 것이 세포와 혈액속에 퍼져있는 일종의 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세포우울증이라는 병이 있듯이 말이다. ...
나는 인생이 그토록 파노라마적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 때문에 지레 권태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그때까지는 불행이나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다. 내겐 타인에 대한 어떤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듯 했다. 일견 남들에게는 조숙한 허무주의자처럼 보였지만 실은 무기질처럼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진저리를 치곤 했다.-17쪽

어쨌거나 사람을 하나 얻었다. 세상의 풍경이 뒤바뀌는 일이다. 정말이지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번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나를 잘 만들어갈 여자다. 나보다 사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다... 다짐했다. 비록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더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가까운 타인으로서의 예의를 지키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로.-127쪽

사람이란 무릇 보살핌의 대상이다. 지극한 관심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지. 그런데 그 처녀에게는 뭔가 중요한 것이 결핍돼있어.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이랄까. 말하자면 따뜻함 말이다.-138쪽

일단의 현실감을 회복한 느낌이야. 마침내 술잔이 술잔으로 보이고 주전자가 명백히 주전자로 보여. 말하자면 그동안 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있었던 거야. 자의식의 단단한 껍질을 뒤집어쓴 채 어두운 터널의 한가운데서 에코처럼 울려오는 내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어느날 오후 터널 밖으로 누군가가 사뿐사뿐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더군, 나로서는 최초로 감지한 타인의 생생한 움직임이었지. 그것은 완만한 리듬을 타고 반복되는 아주 부드럽고 탄력적인 소리였어. 그 소리에 혹해 나는 터널밖으로 나오게 된거야... 하지만 대신 염력을 잃었어. 박쥐처럼 캄캄한 자의식의 천장에 매달려있을때 작동하던 주파수가 햇빛속으로 나오자 기능을 상실한거지. -254쪽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둘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가능성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말이다.-294쪽

내게 주어진 삶은 그렇게 하루하루 변함없이 흘러갔다. 행복의 몇몇 객관적 조건과 얄팍한 기득권을 야릇하게 즐기며... 생일상을 받을 때마나 의식적으로 한번씩 진저리를 쳐가며 서툴게 나이를 먹어갔다.
속내야 어떻든 눈앞에 보이는 것들과 은밀하고 끈끈한 타협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한 삶은 결고 호락호락 허락되지 않았다. 또 누구나 감시자들이어서 한때의 열정적인 꿈이나 그로인한 모반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면 구경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또 옆사람과 닮지 않은 자는 그 옆사람이 대신 나서서 이색분자로 지명해주는 것이었다.-320쪽

2005.11.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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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11월에는
한스 에리히 노삭 지음, 김창활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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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그렇게 오래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단 스쳐 지나가고 나면 계속 그리워하는 그런 순간 말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 순간만큼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있는 것이다.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가 말했다. 아니. 내가 한 말 같았다. 내 목소리가 그대로 메아리쳐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실이었다. 다른 말을 했다면 그것은 전부 거짓이었다. 나는 그저 "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23쪽

그는 우리가 행복했다는 것을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하는 얘기려니, 생각할 것이다. 내 앞에선 믿는 척한다 하더라도 속으로 생각할 것이다. 저토록 불행하면서 왜 저렇게 끊임없이 행복에 대해 이야기할까. 그렇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나 역시 인정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불행이 무엇인지는 모두들 알고 있다.
무슨 일이든 그 뒤에는 빈자리가 있게 마련이다. 낮에는 그것도 모른 척 슬쩍 지나쳐버릴 수 있지만 어스름이 내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노래를 듣고 있다보면 두려움은 점점 커지고, 쉽게 잠을 이룰 수도 없게 된다. 도대체 이 빈자리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흔히들 그렇게 이야기한다. 행복은 붙잡아둘 수가 없다고...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151쪽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우리가 서로를 애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슬픔 때문에, 단지 슬프기 때문에 서로를 안게 될 때는 자신의 뜻과는 반대되는 일을 하기가 십상이다. 안 된다. 그게 누구라도 슬플 때에는 서로를 애무해서는 안 된다. 한두 시간, 하룻밤만 지나도, 날이 밝아 길가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전보다도 훨씬 더 비참해질 것이다. 그런 식으로 슬픔을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241쪽

2009.11.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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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는 대로 만들어진다 - 목적으로 이끄는 독서의 기술
이희석 지음 / 고즈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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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을 들으면 습관화해야 오래 지속된다. 오래 흘러야 강이 된다. 강이 되면 작은 시내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강물 같은 삶은 유유히 자신만의 유속으로 자신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생이다. 작은 물길은 삽질로 다른 물길을 내면 금새 방향이 바뀌어 버리지만, 큰 강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우리모두가 독서를 통해 유유히 흐르면서도 대지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큰 강과 같은 삶을 살길 바란다. -21쪽

"독서한 내용을 모두 잊지 않으려는 생각은 먹은 음식을 모두 체내에 간직하려는 것과 같다."(쇼펜하우어)
독서의 유익과 효과에 대해서는 한껏 기대하되, 단 한 권의 책에 대한 기대 수준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독서의 힘은 한 권이 아닌 여러 권의 좋은 책들이 균형 있게 제 역할을 하면서 발휘된다...비록 내용을 잊어버리더라도 계속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감정을 지배하는 언어의 힘 때문이다. 언어는 감정을 만든다. -39,40쪽

읽지 않으면 쓸 수 없다. 쓰지 않으면 깊이 알 수 없다. 깊이가 없으면 사이비다.(구본형)-80쪽

세상을 해석하고 변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위대하고 숭고한 사상이지 희귀한 정보가 아니다. 이제 독서를 시작하는 이들이라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 자기만의 주견이 갖춰져야 정보를 효과적으로 가공하고 재생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정보가 그냥 정보일 뿐이다. 가공할 능력이 없으면 정보를 통해 부가가치를 만들지 못한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보가 아니라 사고력이다. 사고력과 상상력을 키우고자 하는 이들은 완역본을 읽으며 저자의 사유흐름을 따라가라. -107쪽

지겨운 책일수록 천천히 읽자. 쉬운 책만 읽지 말고 책의 수준을 높여 가자. 결국 넘어진 자는 자신이 넘어진 땅바닥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자신을 넘어뜨린 실체를 외면하는 사람은 결코 크게 성장할 수 없다. -140쪽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아라. 그때부터 당신은 나비를 쫓아 다니는 일을 그만두고 금을 캐러 다니기 시작할 것이다...목적이 없는 독서는 산책이지 학습이 아니다. 모든 일에서 목적은 정말 중요하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164쪽

정상까지 오르려면 반드시 자기 속도로 가야 한다. 느리고 답답하게 보여도 정상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체력 좋은 사람이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같이 뛰면 꼭대기까지 절대로 갈 수 없다. -175쪽

나다워지는 과정은 조용한 지속이다. 지속의 힘은 강하다. 이 힘이 인생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줄 것이다-185쪽

탁월한 지도자는 리더쉽에 대한 스페셜리스트인 동시에 다양한 분야에 대한 제너럴리스트이다. -194쪽

1.인문철학->역사->실용 (선경후사법,207-208)
2.고전->현대서
3.문제발생시 문제해결용 임시
4.선지식 필요시 백업용 사전
5.하나씩 제대로->필요시 전작
<정상에서 만납시다>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역사 속의 영웅들>, 2009.09.2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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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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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가 사랑했던 이들이 국화꽃 떨어지듯 하나 둘 사라져갔다. 꽃이 떨어질 때마다 술을 마시자면 가을 내내 술을 마셔도 모자랄 일이겠지만, 뭇꽃이 무수히 피어나도 떨어진 그 꽃 하나에 비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음날 쓸쓸한 가운데 술에서 꺠어나면 알게 될 일이다.-43쪽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 동안, 자기 자신은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 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60쪽

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 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개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67쪽

'벽'이란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 그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잘산다. 힘들고 어렵고 지칠수록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진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과연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다...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한없이 견딜 수 있다. 매번 더이상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 때까지 글을 쓰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고쳐본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68쪽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청춘은 그런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가는 그 빛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떠나버렸다.-141쪽

세월은 흐르고 흘러 서리 내린 연잎은 그 푸르렀던 빛을 따라 주름져갈 테다. 연잎이 주름지고 또 시든다고 하더라도 한때 그 푸르렀던 말들이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게도 그처럼 푸르렀던 말이 있었다... 그런 말들이 있어 삶은 계속되는 듯하다.-196쪽

2005.01.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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