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찌감치 세상이나 자신에 관해 흥미를 잃고있는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권태라는 것이 세포와 혈액속에 퍼져있는 일종의 병이라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세포우울증이라는 병이 있듯이 말이다. ... 나는 인생이 그토록 파노라마적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기 때문에 지레 권태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 그때까지는 불행이나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다. 내겐 타인에 대한 어떤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듯 했다. 일견 남들에게는 조숙한 허무주의자처럼 보였지만 실은 무기질처럼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진저리를 치곤 했다.-17쪽
어쨌거나 사람을 하나 얻었다. 세상의 풍경이 뒤바뀌는 일이다. 정말이지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와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여러번 절실히 깨달았다. 내가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나를 잘 만들어갈 여자다. 나보다 사는 일에 능숙한 사람이다... 다짐했다. 비록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더이상 흔들리지 않겠다고, 가까운 타인으로서의 예의를 지키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로.-127쪽
사람이란 무릇 보살핌의 대상이다. 지극한 관심이 뒤따라야 하는 일이지. 그런데 그 처녀에게는 뭔가 중요한 것이 결핍돼있어. 상대를 이해하는 능력이랄까. 말하자면 따뜻함 말이다.-138쪽
일단의 현실감을 회복한 느낌이야. 마침내 술잔이 술잔으로 보이고 주전자가 명백히 주전자로 보여. 말하자면 그동안 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있었던 거야. 자의식의 단단한 껍질을 뒤집어쓴 채 어두운 터널의 한가운데서 에코처럼 울려오는 내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어느날 오후 터널 밖으로 누군가가 사뿐사뿐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더군, 나로서는 최초로 감지한 타인의 생생한 움직임이었지. 그것은 완만한 리듬을 타고 반복되는 아주 부드럽고 탄력적인 소리였어. 그 소리에 혹해 나는 터널밖으로 나오게 된거야... 하지만 대신 염력을 잃었어. 박쥐처럼 캄캄한 자의식의 천장에 매달려있을때 작동하던 주파수가 햇빛속으로 나오자 기능을 상실한거지. -254쪽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둘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가능성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말이다.-294쪽
내게 주어진 삶은 그렇게 하루하루 변함없이 흘러갔다. 행복의 몇몇 객관적 조건과 얄팍한 기득권을 야릇하게 즐기며... 생일상을 받을 때마나 의식적으로 한번씩 진저리를 쳐가며 서툴게 나이를 먹어갔다. 속내야 어떻든 눈앞에 보이는 것들과 은밀하고 끈끈한 타협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한 삶은 결고 호락호락 허락되지 않았다. 또 누구나 감시자들이어서 한때의 열정적인 꿈이나 그로인한 모반은 영화나 소설이 아니면 구경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또 옆사람과 닮지 않은 자는 그 옆사람이 대신 나서서 이색분자로 지명해주는 것이었다.-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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