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공주 : 방은진. 그녀의 성공적인 감독 대뷔에 박수를...

방은진. 내가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된 것은 95년도 작품인 301.302를 통해서였다. 요즘은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인형같이 예쁜 것 이외에는 별로 하는일이 없었던 황신혜와 함께 열연을 했던 방은진은. 특수분장을 하고 끊임없이 요리를 하고 또 요리를 먹는 여자로 나왔었다. 당시 그 영상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나는 며칠동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할 정도였다. 그녀를 보면서 연기를 참 잘 한다고 느꼈고 훗날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 불명에서 그녀는 이런 내 생각을 입증이라도 하듯 역시 열연을 펼쳤다.

그런 방은진이 감독으로 대뷔했다. 가수이기 이전에 먼저 영화배우였던 엄정화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오로라 공주는 방은진의 감독 대뷔작이다. 이 작품의 성공 여부에 따라 그녀는 ‘연기나 하지 왜 설치고 난린가’ 혹은 ‘이렇게 잘 할꺼 왜 진작 안했는가’ 라는 극명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오늘 영화를 보고 난 이후 내 개인적인 평가는 후자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평단은 이 영화를 어떻게 평가할지는 잘 모르겠다.

 

이 영화는 이미 많은 부분의 스토리가 노출되었다. 주인공인 엄정화는 5건의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그때마다 단서를 남긴다. 이 단서를 형사인 문성근과 권오중이 추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정작 중요한 스토리들은 모두 숨겨져 있다. 엄정화의 캐릭터는  언뜻 보면 예고 살인을 하는 팜므파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또 엄정화가 남기는 오로라공주 스티커의 단서는 실제 영화에서 단서로써의 의미 보다는 엄정화의 비밀에 대한 부분을 말해준다.


오로라 공주가 정말로 빛날 수 있었던 것은 시나리오의 뛰어난 완성도이다. 엄정화가 보자마자 방은진을 쫒아가서 졸랐다고 하는 부분이 이해가 간다. 특히 마지막에 모든 사건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시나리오는 거의 최고점을 보여준다. 엄정화 혼자서의 고군분투가 아닌 또 다른 사람의 도움. 그리고 그것으로 완성하는 그녀의 살인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리고 엄정화가 이루지 못한 한 껀의 살인은 실제 화면에서 보여지지는 않지만 확실한 암시를 해 주고 끝이난다. 오프닝 씬은 엔딩 씬에 가서 그 의미를 알려준다.


여기서 우리는 엄정화라는 배우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흔히 가수 출신의 (그녀는 영화가 먼저였지만 가수로써의 훨씬 알려졌으므로) 예쁘장한 얼굴 하나 믿고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해대는 여느 여가수들과 달리 그녀는 정말로 배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영화에서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준다. 이미 결혼은 미친짓이다와 싱글즈에서 그 가능성을 입증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썩 좋은 시나리오가 가지만은 않는 것 같았다. 어쨎거나 그녀는 가수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고 그것은 감독에게 분명 부담감으로 자리했을테니 말이다. 이 영악한 배우는 그래서 가만 앉아 시나리오를 기다리다가 홍반장 같은 작품만 찍지는 않기로 마음먹는다. 직접 감독을 찾아가서 자기를 써 달라고 말을 했고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엄정화가 아니면 안될만큼 그녀와 찰떡궁합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좀 전형적인 살인자로 보이는 엄정화는 뒤로 갈수록 살인을 할 수 밖에 없는 정순정을 무리 없이 연기해낸다. 거기다 그리 길지 않은 쓰레기 매립장에서의 포크레인 씬 때문에 그녀는 포크레인 기사 자격증까지 딴다. 단 한 장면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척이 아닌 제대로 연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정말로 열심히 찍었겠구나 싶을 정도로 그녀는 이 영화에서 모든 액션씬도 직접 소화해낸다. 특히나 그녀의 목소리 변화는 듣는 사람에게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만약 거기서 그녀가 어설프게 해 냈다면 아무리 연기를 잘 했다고 하더라도 정순정 캐릭터는 훨씬 더 매력이 줄었을 것이다. 요즘 발성이나 발음도 잘 안되는 애들이 연기를 한다고 설치는 것을 보면 엄정화 반만이라도 좀 본받으라고 말 하고 싶을 정도이다. 연기는 몸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큐싸인 떨어지면 닭똥같은 눈물을 좔좔 흘린다고 해서 연기를 잘 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목소리도 연기의 일부임을. 배우는 대사로 연기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엄정화를 통해 다시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시나리오의 힘을 입었건 엄정화같은 배우를 만난 행운 때문이건간에 방은진 감독은 감독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작품을 내어놓았다. 마냥 잔인하고 잔혹할수 있었던 영화가 그나마 부드럽게 풀려간 것은 그녀가 여성이며 또 여성 특유의 감성을 잘 발휘해서 영화를 만든 덕분이 아닌가 싶다. 영화를 보면서 한가지 비교가 되는 것은 친절한 금자씨였다. 비주얼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스토리만 보자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금자보다 덜 아름답지만 그래도 관객들에게 진심을 이끌어낸 정순정이라는 인물에 훨씬 더 정이 간다.


살인을 재미삼아 혹은 보여주기 위해 너무도 쉽게 하는 영화들이 쌔고 쌘 이 마당에 정순정의 살인은 분명한 이유가 있고 또 그 이유는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다소 쇼킹한 이유를 소재로 삼기는 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그 모든 일들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담담히 보여줌으로 인해 영화는 거부감 없이 관객에게 어필한다. (회상씬은 지구를 지켜라와 견줄만하다.) 단서를 남겨서 잡히고 싶어하는 살인자. 혹은 살인자의 단서를 가지고 쫒아가는 형사라는 마케팅 전략도 훌륭했다. 그것만을 기대하고 갔던 관객들은 의외의 감동까지 받아서 나올테니 말이다. 이 영화는 시나리오, 감독, 배우의 3박자 뿐 아니라 마케팅의 힘 까지 잘 활용을 한 보기 드문 케이스가 될 것이다.


끝으로 이 영화를 그저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올 것 같아서, 혹은 엄정화에게 팜므파탈의 이미지를 기대하고 보지는 말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보다는 다른 엉뚱한 얘기를 해댈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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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eol 2005-10-28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오로라 공주 vs 내 생애~ 중 고민했는데..
플라시보님의 글도 생각나고 혼자서도 유쾌해졌음해서 내생애로 낙찰!
이 글을 먼저 봤다면 더 고민했을 수도 있겠네요 흐흐

저도 엄정화에 대해 비슷한 편견이 있었는데 함 보고 싶어요..
암튼 어제 본 주인공들이 다 사랑스러워서 보는 내내 기분 좋았어요..ㅋ

플라시보 2005-10-28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미레님. 내 생애도 그렇고 오로라 공주도 그렇고 모두 괜찮은 작품이었습니다. 내 생애 재밌었죠? 흐흐. 등장인물들이 모두 사랑스럽다는 님의 말에 저도 공감합니다. 기회가 닿으신다면 오로라 공주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오프닝씬을 주의해서 봐 주세요.^^)

sooninara 2005-10-28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너무 보고 싶게 만드시는군요!!
소문 나기전에 봐여지^^ 이런 영화는 소문 난뒤에 보면 재미가 반감되서요.
내생애~~일주일도 개봉 3일째날에 봤어요

플라시보 2005-10-28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ooninara님. 후훗. 그래서 저는 기대작은 언제나 개봉 첫날에 봅니다. 그래야 제일 먼저 보고 남들에게 '재밌어' 혹은 '보지마' 하고 말 할 수 있거든요. 낄낄. 이 영화 내 생애에와 마찬가지리로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

그림자 2005-10-2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시보님 덕분에 볼까말까한 저도 낼 보러갑니다^^

비연 2005-10-29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봐야겠슴다!^^

플라시보 2005-10-29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자님. 네. 보시면 아마 후회하지 않으실껍니다. 간만에 확실하게 추천할 영화를 만난것 같아요.^^

비연님. 흐흐. 그러시길. 님도 재미나게 보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