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래... - 박희정 단편집
박희정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집을 나와서 10년째 혼자 살고 있다. 어쩌다가 가정 혹은 집을 떠올리면 여동생과 한가롭게 만화책을 봤던 기억이 가장 크게 남아있다. 집에서 살던 그때의 나는 주민등록증은 나왔지만 교복을 입고 다니는 학생의 신분이었으며, 에너지는 넘쳐서 막 폭발할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아무일도 하지 못했었다. 토요일날 일찍 학교를 마치면 나와 여동생은 만화책을 쌓아놓고 과자를 먹으면서 내방이나 혹은 여동생 방에서 함께 만화를 봤었다. 어차피 각자의 만화를 볼꺼였지만 왜그런지 우린 꼭 한방에서 만화를 봐야했다. 그러다 어느 한쪽이 푸핫거리면서 웃으면, 한쪽은 뭔지 모르면서도 막 웃으면서 '왜? 왜?' 하고 어깨를 흔들곤 했었다.

미대를 지망하고 있고 당시 만화그리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여동생 덕분에 나는 풍족하게 만화를 봤었다. 내가 용돈을 받아 열심히 음악CD를 사는동안 여동생은 만화를 사재꼈고 우린 그걸 함께 공유했었다. 지금도 간혹 만화를 사서 보긴 하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만화를 가장 많이 그리고 재밌게 봤던 시절은 그 시절이 아닌가 싶다.

그 시절을 지나지 않았다면 나는 박희정이라는 만화가를 영영 몰랐을 것이다. 기껏해야 악동이를 그린 이희재정도나 알았겠지. 야 이노마의 강미영도, 언플러그드 보이의 천계영도, 빨강머리 앤의 김나영도, 금지된 사랑의 한혜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텔 아프리카의 박희정도 모두 그때 알게되고 좋아하게 된 만화가들이었다. 사실 그 중에서도 나는 박희정을 가장 덜 좋아했던것 같다. 뭐랄까 그 뻔하고도 당연하게 아름다운 그림이 싫었었다. 누구나 다 좋아하고 누구나 다 열광하는 그녀의 그림. 그때는 그렇게 누구나 다 공감하는 것에 나 역시 공감하는게 스스로를 무척 별 볼일없이 평범한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것 같아서 싫었었다.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 대학을 다니고 다시 직장인이 되면서 나는 만화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건 과자와 함께 만화책을 쌓아두고 읽을 여동생과 더이상 한 공간에서 지내지 못함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만화 이외에도 할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에너지는 넘치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그때와 달리. 나는 늘 피곤해서 쉬고 싶어도 주변에서 일이 뻥뻥 터지는 바람에 잠시도 안심할 수 없는,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삶을 살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조금씩 만화를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시리즈물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고 해서 내가 좋아했던 작가들의 단편 중심으로 조금씩 보기 시작하고 있다. 이 책도 그렇게해서 사게 되었다.

박희정의 만화는 누가봐도 너무 아름답고 잘 그린 그림이다.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인체비율을 아주 무시하지는 않은 그림. 등장인물은 모두 똑같이 생겨먹은게 태반인 만화 속에서 그나마 인물마다 다른 얼굴 다른 표정과 다른 느낌을 심어주려는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감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인물의 의상과 소품에 신경쓴 흔적이 역력한 (심지어 그당시 유행하는 옷 상표를 그대로 그려놓는) 모습까지. 박희정의 그림은 스크린톤을 좀 과하게 써서 복잡하긴 하지만 확실히 잘 그리는 그림이다. 거기다 내용도 그만하면 서정적이고 우수하다. 지나치게 폼을 잡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마냥 가볍지도 않다. 그러니까 굳이 표현을 하자면 아무도 싫어하지 않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다고나 해야할까? 딱히 싫어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하는 만화가 바로 박희정의 만화가 아닌가 싶다. 나름대로 흡입력도 강하고 스토리를 끌고가고 연출해내는 능력도 뛰어나다. 그런데 아주아주 좋아 죽겠지는 않았다. 예전에는 그랬었는데. 어떤 만화인지 모르겠지만 읽는 내내 아주 좋아 죽을것 같았는데 회사 업무를 땡땡이치며 보는 박희정의 만화는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난했다. 말로 표현하자면 읽을만해 정도. 어쩌면 내가 만화를 너무 오래 읽지 않아서 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고등학교 시절에서 너무 오래 와 버렸거나 말이다.

요즘들어 만화를 사 보면서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 정성들여서 그린 만화들이 싸도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든다. 박희정의 만화만 하더라도 무척 공을 들인것 같은데 단돈 7천원의 가격을 달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이 만화를 좀 더 많이 사 읽어서 만화도 제대로 된 값을 받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내가 7천원을, 아니 알라딘서 샀으니 그보다 더 적은 돈을 주고 사기에는 이 만화에 들어간 정성이 너무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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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1-2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희정의 이번 단편은.. 그림도 아름답고, 진행도 세련됨에도 불구하고, 저도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어요.. 웬지 저만치 떨어져 있는 느낌이랄까..^^;;

LAYLA 2005-01-21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날개님 말씀에 동감 흐흐

플라시보 2005-01-22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음...저도 약간 그렇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좀 떨어져 있다는 느낌^^

LAYLA님. 찌찌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