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책세상 / 1994년 8월
평점 :
품절


사람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을때 한번쯤은 복수를 꿈꾼다. 비록 여러가지 이유로 복수를 실천에 옮기는 경우는 극히 드물겠지만 상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상처, 혹은 그 이상의 고통과 아픔과 절망을 안겨주는 꿈을 꾼다. 복수에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들이대며 '원수여 내 칼을 받으라' 고 외치는. 누가 봐도 내가 지금 너에게 복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정면대결형 부터, 나의 존재를 감추고 주변 상황들을 교묘히 조작해서 그를 곤경에 빠드리는 그림자형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안전한 복수는 두번째이다. 물론 첫번째처럼 복수를 해서 상대방의 목이라도 따 버린다면 그로써 모든것이 끝이 나겠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원수여 내 칼을 받아라' 만큼이나 자주 들었던 소리가 '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 혹은 '내 형제의 원수를 갚아주마' 이다. 복수하려는 상대가 천에 고아에 홀홀단신으로 살지 않는한. 그를 제거 한다고 해서 모든 복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응징을 당한 상대방의 주변인중 누군가가 밤마다 시퍼런 칼날을 달빛에 비추며 복수를 꿈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하지만 두번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비록 상대방의 코앞에서 복수를 해 줌으로써 상대방이 나에게 복수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두려움에 떠는 쾌감은 없겠지만 뒷탈없이 안전한 복수가 될 수 있다. 복수만 하고 나서 이 세상을 하직할게 아니라면 미래에 대한 생각도 해야 한다. 복수도 복수지만 일단 나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두번째 방법에서는 복수가 복수를 낳을수가 없다. 상대방은 내가 복수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며 누가 끌어당기는지도 모르는 늪으로 서서히 몸이 빠져들어 간다. 재수에 옮이 붙었다 느끼겠지만 그 옮을 누가 붙인건지는 절대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대신 첫번째 복수보다는 상당히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맞장을 뜨는 짜릿함을 포기한 것은 어디까지나 복수를 하고 있는 나 라는 존재를 숨기기 위한 것이므로. 상대가 아무리 원인을 찾아내려고 해도 찾아낼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남은 일이라면 복수를 당하는지조차도 모르고 복수를 당하는 상대방을, 음침한 곳에서 미소를 띄며 지켜보는 일 뿐.

장 자크 패슈테르의 '표절' 은 바로 이러한 복수를 그린 이야기이다. 주인공 에드워드는 자신의 원수인 니콜라 파브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도래하고 에드워드는 자신을 숨긴채 니콜라에게 복수를 한다. 그 복수라는 것은 작가인 니콜라에게 치명타를 입히는 표절 시비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손에 피한방울 뭍히지 않고 완전하게 복수를 한다. 물론 복수를 위해 태어난 복수의 화신은 아니므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혹시나 실패할까봐 (자신이 복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거나 자신의 조작이 알려질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에 철저하게 복수를 준비한 탓인지 모든 상황은 그가 예견한 시나리오대로 완벽하게 연출이 된다. 에드워드가 니콜라에게 복수를 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은 그가 사랑했던 야스미나라는 여자를 니콜라가 차지하고 또 그녀를 죽음에 이르도록 내몰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에드워드의 복수에 기름을 부었을 뿐. 이미 불씨는 그들이 처음 만났을때 부터 서서히 지펴졌다. 애드워드는 단지 니콜라를 미워하지만은 않는다. 이런걸 바로 애증이라고 부른다의 교과서로 써도 좋을만큼 니콜라를 향한 에드워드의 감정은 복잡하다. 조용하고 소심한 에드워드. 어딘가에 있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만큼 주목받을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 그런 그의 옆에 어딜가나 보석처럼 반짝이는 에드워드는 질투의 대상이자 스스로 끊임없이 모욕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다. 그래서 에드워드는 니콜라에게 복수를 한다. 철저한 준비와 계획끝에 이루어지는 에드워드의 복수는 복수를 꿈꾸는 모든 이들이 차라리 아름답다고 느낄 만큼 완벽하다.

표절의 가장 큰 미덕은 복수의 도구로써 책이라는 다소 이채로운 소재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사람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이용하는 것도 아닌. 자신이 만든것이 분명한 창작물에 대해 표절 시비를 불러 일으키는것. 그것은 가장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한 인간을 파멸시키는 길이다. 그리고 그 파멸은 도저히 회생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르고 마침내 복수의 대상자 스스로 모든것을 끝장내도록 한다. 1994년 프랑스 범죄 문학상을 받은 이 책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치밀하다. 왜 여태 이 책을 몰랐는가 싶을 정도로 나는 이 책을 잡자 마자 단숨에 읽어 치웠다. 초반부에는 약간 느슨하게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에드워드가 니콜라에게 복수를 준비하는 중 후반에 들어서면 엄청난 가속도가 붙는다. (실제 이야기의 진행이 빨라진다기 보다 읽는이의 호흡이 빨라진다.) 이렇게 대단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몰랐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이 책은 재미있다. 추리소설처럼 범인이 누구인지 끝에 가서야 알려줌으로 인해 극정 긴장감을 고도로 끌어내는 것이 아닌. 이 책은 범죄자의 관점으로 쓰여져 있다. 즉 복수를 왜 하게 되었으며 어떤식으로 복수가 진행된다는 것을 뻔하게 알면서도 추리소설 만큼이나 긴장감과 스피디함을 보이고 있으며. 그것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놀랄만큼의 흡입력을 가진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복수하고 싶은 상대를 만난다. 그 상대가 철천지 원수이고 누가 봐도 저 둘은 앙숙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복수하고픈 마음이 시들해져 버릴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대가 가장 가까운 친구이거나 혹은 가족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복수의 상대가 멀리 있는것이 아니라 항상 내 주변에 맴돌며 나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면 어떻겠는가. 웃는 낯으로 대하면서도 등 뒤에서는 칼을 갈고 그의 불행을 들으면 겉으로는 동정하면서 속으로는 웃음이 비져나오는 것을 참기 힘들다. 이런식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한번 시작을 하면 도저히 멈출수가 없다. 어떤 특별한 이유. 그 단 한가지로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복수를 꿈꾸는것 보다 조금씩 조금씩 먼지만큼 작게 쌓여가기 시작하는 증오와 미움은 어떤 요소로도 제거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마침내 표면적으로 터트릴만한 구실이 되어줄 사건이 발생하면 복수의 불은 기름부음을 받는다. 작가 장 자크 패슈테르는 이러한 상황을 이 책 '표절'에서 너무나도 잘 표현을 했다. 작가의 책을 읽고 그 얘기가 작가 자신의 얘기라고 믿어버리는 것 만큼 멍청한 독자의 본분을 다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나는 어쩔수 없이 이 책을 읽고 또 한번 상상을 한다. 이 얘기가 자신의 얘기는 아니라 할지라도 (실제로 그는 작가 로맹 가리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장 자크 패슈테르는 살면서 한번쯤은 이런식의 증오와 미움을 키우고 복수를 꿈꿨을 것이다 라는 상상을 말이다. 이 얘기가 순전히 작가의 상상력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천재적이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유치한 발상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믿어버린다. 죄가 있다면 장 자크 패슈테르가 너무나 흠없는 작품을 썼다는 것에 있으리라.

올 하반기 들어 가장 재미있는 책 한권을 읽었다는 생각이 드는 이 작품 '표절'은 추천을 해도 전혀 걱정이 되지 않을만큼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거기다 놀랍도록 책값이 싸기도 하다.) 별 다섯을 주고 거기다 금가루까지 뿌려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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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5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즈마리 2004-12-15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nks to 입니다..^^

흰 바람벽 2004-12-15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거 사놓긴 했는데 앞에 읽다가 속도가 안나가서 걍 던져놨거든요.

당장 당장 읽어야 겠어요~ 으~~ 흥분.긴장.기대.
추천도 콕!! ^^

플라시보 2004-12-15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감사해요. (흐흐. 가격이 싸서 님이 산다고 해도 부담이 안되는군요.^^)



흰 바람벽님. 처음에는 저도 속도가 좀 안났는데요. 중반부로 들어서면서 흥미진진 (내가 이 표현을 쓰다니...) 해 집니다. 어여 읽어보세요.^^

깍두기 2004-12-15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흥미진진...그 표현 딱 좋으네요. 그 표현이 어때서 그러십니까^^

플라시보 2004-12-1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 깍두기님 알고 그러시는거죠? 에잇 몰라욧^^

瑚璉 2004-12-1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번째 패러그래프,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오기가 있습니다 ("에드워드" -> "니콜라"). 직업병입니다 (-.-;). 양해하세요.

플라시보 2004-12-1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련님. 지적 감사합니다. 니콜라를 에드워드로 써 뒀군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