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가 자주 들어가던 인터넷 사이트에, 닉네임이 '마노기' 인 분이 계셨다. 무슨 천연기념물 제 몇호쯤 되는 희귀 새 이름인가보다 했었는데 어느날 그분이 마노기의 뜻을 밝히셨다. 마노기는 바로 장만옥의 만옥을 가르키는 말이었다. 그때 내 나이가 스물 셋? 아님 넷쯤 되었나보다. 아무튼 나는 장만옥이 뭐가 예쁘다고 닉네임을 마노기로 쓰나 싶었다. 그랬다. 그때는 장만옥이 뭐가 매력적인지 전혀 알지 못했었다. 당시 내 눈에는 홍콩 배우는 뭐니뭐니 해도 오렌지를 헤집고 태어난듯 상큼한 왕정문이 최고라고 생각했었다. 그랬다. 그때는 어렸었다. 그래서 나는 장만옥의 매력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달 뒤면 계란 한판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은 알것같다. 서른 둘이라던 그 분이 왜 닉네임을 '마노기' 라고 지을정도로 장만옥을 좋아했었는지를 말이다.
내가 일하는 건물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있다. 그래서 꽤나 게으른 나 이지만 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영화 만큼은 원없이 봤다. 퇴근길에 들러서 봐도 되고, 가끔이긴 하지만 일을 하다 말고 스윽 빠져 나가서 영화관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가기도 한다. 오늘 나는 두번째 방법으로 장만옥이 나오는 영화 클린 (Clean) 을 혼자서 봤다. 클린은 별로 장사가 안되는지 오후 3시 30분이 마지막 프로였고 나머지 시간에는 여선생 VS 여제자를 상영했고. 영화를 보러 들어가니 나를 포함해서 3명의 관객이 전부였다. 이 영화로 2004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까지 받았지만 대한민국에서도 소도시인 이곳에서는 그녀 혼자서 원톱으로 관객을 끌어들이기에는 무리였나보다. 아니면 예전의 나처럼. 너무 어린 관객들이 그녀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말이다.
한물간 록스타 리. 그리고 그의 아내 에밀리 (장만옥)는 캐나다에서 투어 중이다. 하지만 한물간 록스타답게 그들을 원하는 곳은 없다. 음반 계약자들은 싼값에 후려치려고 하고 리의 음악도 신통찮다. 설상가상으로 리와 에밀리는 헤로인 중독자이다. 사람들은 에밀리가 리를 망쳤다고 말한다. 캐나다의 호텔방에서 에밀리와 리는 말다툼을 한다. 에밀리는 화가나서 차를 몰고 나가버리고 그 사이 리는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한다. 다음날 에밀리가 도착했을때 리는 이미 죽어있고 집에는 경찰들이 와 있다. 경찰들은 흥분해서 호텔방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에밀리를 저지하다가 에밀리의 가방을 뒤지게 되고 그 속에서 마약을 발견한다. 에밀리는 마약 소지죄로 6개월형을 선고받는다. 6개월 후 에밀리는 석방되지만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륻을 맡은 시아버지는 그녀가 새로운 사람이 되기 전 까지는 자기들이 맡아서 키우고 있는 리와 그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데려갈수도 만날수도 없다고 말한다. 하루아침에 남편도 돈도 집도 아들도 없어져버린 에밀리는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또 살기 위해서는 마약도 끊고 번듯한 직장도 잡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클린이란 영화가 나왔다는 기사를 접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이 영화의 감독이 올리비에 아싸야스라는 사실이었다. 알다시피 장만옥과 올리비에 아싸야스는 한때 부부였지만 지금은 이혼을 한 남남이다. 한국 사회같으면 서로 철천지 원수가 되어서 헤어졌을 것인데 놀랍게도 이들은 함께 작업을 했고, 그 결과는 칸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TV드라마에서야 헤어지고도 서로 친구로 잘 지내는 쿨한 신세대 이혼부부들이 등장하지만 현실에서는 좀 어렵지 않을까 하는게 내 생각이었는데 아닐수도 있나보다. 만약 그들이 인터뷰할때 입으로만 나불거리는 '서로 좋은 친구로 남기로 했어요' 부류였다면 어떻게 영화를 같이 할수가 있었겠는가. 그것도 배우와 배우가 아닌 배우와 감독으로 말이다. 이 영화에서 올리비에 아싸야스는 그동안 장만옥과 함께 작업을 한 어떤 감독들 보다도 장만옥에게 많은 무게를 실어 주었다. (영화 속에서 여배우가 아름답거나 매력적이기는 흔한 일이었지만 무게를 가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혼을 하더라도 저렇게 직업적 동료로는 여전히 남을 수 있는 그들이어서 그런지 이 영화엣 장만옥은 다른 어떤 영화에서 보다 자신의 연기력을 십분 발휘한다. 특별해 보이는, 누가 봐도 '우와 연기' 라는 생각이 드는 대단한 장면 같은건 없지만 장만옥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같은 무게로 끌고 나간다. 여배우 치고도 무척 갸냘픈 몸을 가졌지만 대단한 액션이나 큰 재스쳐 없이도 그녀는 화면을 채우고도 남을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물론 그 카리스마가 문신하고 여기저기 정신 사나울만큼 장신구를 달고 있는 락가수들의 카리스마와는 또 다른 것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영화를 모성을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는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여기서 장만옥이 보여주는 것은 모성애가 전부가 아닌것 같다. 물론 그녀가 깨끗해지려는. 즉 마약을 끊고 새 일자리를 구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장만옥의 모성애에 포커스를 맞추었다기 보다는 그냥 장만옥이 연기한 에밀리의 삶에 중점을 둔것 같다. 어느날 갑자기 자기를 지켜주고 보살펴주던 남편이 사라지고 그녀는 세상에서 외토리가 된다. 가진 돈도 없으며 돈을 벌 만한 능력도 없는 그녀. 아들에게 말 한것 처럼 마약을 하는 삶 이외에 다른 삶은 알지 못했던 그녀가 서서히 세상을 살아간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누구에게 의지해서가 아닌. 오직 그녀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또 행동해야 한다. 잘 나가던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라져버린 삶을 그녀는 어떻게건 꾸려나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처음부터 으쌰하고 종잇장 뒤집듯 열심히인 딱 영화같은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는 영화 밖의 사람들이 그런것 처럼 실패도 하고 뭔가 옹골찬 부분도 모자라고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다가 또 다시 갈등하고 애를 쓰는 것을 반복한다. 극중에서 누군가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녀는 서서히 변한다. 필요하다면 사람은 변하기도 한다는 그녀의 시아버지 닉놀테의 말처럼 말이다.
별로 오래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살아보니 사는데 정답은 없는것 같다. 처음부터 바른생활 인간으로 태어나 오직 바르게만 살면 모르겠지만 사는게 어디 그렇게 흘러가는가. 우린 가끔 시궁창에도 빠지고 진흙도 뭍혀가면서 산다. 그러다가 서서히 조금씩 자기도 모르게 인생의 고삐를 쥐고 있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닳게 된다. 어떻게 살건 정답은 없지만 결과는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내가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거나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 것 처럼 남들도 마찬가지다. 그냥 살면서 잠깐씩 머물고 스치는 사람들일 뿐이다. 설사 그게 핏줄의 이름으로 혹은 사랑의 이름으로 엮인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영화에서 그녀는 친정쪽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친척이 운영하는 식당에 취직하지만 금방 쫒겨난다.) 그렇다고 해서 시댁쪽의 도움을 받지도 않는다. 친구들도 예전에 잘 나갈때의 그녀를 대하던 것과 지금은 사뭇 다르다. 내일일도 알수 없는 인간인데 감히 자기 인생은 탄탄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사는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이 영화에서 장만옥을 클린하는 것은 결국 장만옥 자신인것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