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참 오래도 기다렸다. 화양연화가 2000년에 개봉했으니 무려 4년을 기다린 셈이다. 왕가위의 신작 2046은 이미 화양연화를 찍을 때 부터 예고를 했으므로 그 기다림은 더 지루했다. 아예 모르면 모를까 존재를 알고 있지만 언제일지 모르는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아주 지친 기분으로 이 영화를 봤다. 배가 고플때는 그 시기를 지나쳐 버리면 더이상 배가 고프지 않다. 나는 이 영화에 목마르지 않았다. 너무 오래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럴까? 2046은 이미 배고픈 시간은 지나버렸지만 어떻게건 끼니를 떼워야 한다는 생각에 먹는 라면같은 영화였다. 만약 배가 고플때 먹었더라면 라면은 맛있었을까? 불행하게도 나는 그 답을 알수가 없다.

2046을 얘기하려면 먼저 화양연화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영화와 화양연화는 연장선상에 있다. 주인공의 이름이나 중요한 기억들이 모두 화양연화에서 넘어왔다. 시간상으로 2046은 화양연화 그 이후가 된다. 혹시 화양연화를 보지 않았거나 화양연화를 봤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잠깐 줄거리를 소개하겠다. 초우(양조위)라는 이름의 남자와 수리첸(장만옥)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배우자가 있으며 연립주택에 이웃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초우의 아내와 수리첸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들은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할건지를 의논한다. 그러다가 우습게도 자신들마저 사랑하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그 사랑을 확인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이미 사랑으로 충분하게 상처를 받은 그들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그냥 뭍어두기로 한다. 신문기자인 초우는 싱가폴로 발령을 받으면서 수리첸에게 함께 가자고 하지만 수리첸은 거절한다. 그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에 가서 그녀에 대한 사랑을 벽에 난 구멍에다 고백을 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처럼 비밀을 구멍에다 대고 말한다음 그 구멍을 막아버린다. 그러면 비밀이 탄로날 일도 없으며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힘이 들 일도 없다.) 

2046에 등장하는 남자의 이름은 초우(양조위)이다. 초우는 신문기자인 동시에 작가이다. 초우는 싱가폴에서 홍콩으로 막 도착해서 여관을 찾는다. 예전에 수리첸(장만옥)과 함께 묵었던 방번호인 2046호에 묵으려고 하지만 그 방은 수리를 해야 한다고 해서 그는 2047호에 묵는다. 하지만 알고보니 2046호는 수리중이 아니라 루루(유가령)이 자살을 했기 때문에 그 흔적을 치우려고 했던 것이다. 2046호에 또 다른 여자 바이링(장쯔이)이 묶는다. 초우와 바이링은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되지만 진심인 바이링에 비해 초우는 그녀를 단지 즐기기 위해 만나는것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여관 주인에게는 딸이 있는데 첫째딸인 왕징웬(왕정문)은 일본인인 애인 (기무라 타쿠야)를 사랑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들의 사랑을 반대한다. 초우는 기억을 떠 올린다. 예전에 싱가폴에서 검은거미라 불리우던 수리첸(이번에는 장만옥이 아닌 공리이다.)을 만났던 기억. 그리고 루루(유가령)을 만났던 기억. 초우는 소설을 쓰게 된다.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남자와 그 남자가 사랑하게 되는 두명의 안드로이드 여 승무원 (왕정문, 유가령)에 관한 이야기인 2046을 쓴다.



 

 

 



 

 

2046

사실 2046은 무척 난해한 영화이다. 내가 줄거리를 쓰면서도 저게 맞는건지 틀리는건지도 모르겠을 정도로 말이다. 아마 말로 줄거리를 설명해보라고 했더라면 나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단편적으로 툭툭 끊어지더라도 어떻게건 이어나가기만 하면 되는 글로 썼으니 나는 저만큼이라도 2046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화양연화와 끝임없이 연결된 것 같으면서도 따로 노는 2046은 거기다 초우가 쓰는 소설 2046과 뒤섞여서 도무지 언제가 언제인지 알 수가 없다. 거기다 수리첸이라는 이름은 예전의 여인인 장만옥과 공리가 똑같은 이름이다. 초우는 화양연화와 이름도 같고 직업도 같으며 캄보디아와 싱가폴에 있었던것 마저 같지만 인물로만 보자면 완전히 다른 인간이다. 화양연화에서의 그는 따뜻하고 소심한 남자였고 사랑에 대해 용기를 가지지 못했던 남자였던 반면 2046의 그는 냉소적인 바람둥이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그 두 인물을 동일한 인물이라고 보기가 힘들었다.

내가 처음으로 왕가위라는 이름의 감독을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막 들어가서였다. 내 친구의 자취방에서 짜파게티를 먹으며 왕가위의 아비정전을 봤었다. 그때 받은 충격은 무척 컸었다. 저런 영화도 있구나. 세상에는 저런 스타일로 영화를 찍는 감독도 있구나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 중경삼림과 타락천사 동사서독 그리고 해피투게더에 이르기까지 나는 왕가위 감독의 열혈 신봉자가 되었다. 2000년이 되어서 본 화양연화는 여태까지의 왕가위 감독이 보여준것과는 조금 다른 아주 정적인 작품이었는데 나는 딱 그때까지가 왕가위 감독의 감각이 살아있던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2046은 다시 예전으로 리턴한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감각적이라는 것은 무한할 수 없나보다. 인간의 젊음이 영원할 수 없는것 처럼 말이다. 왕가위의 2046은 그 작품에 등장하는 여 배우들 만큼이나 서글프다. 한때는 아름답고 젊었던 그녀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녀들의 얼굴은 세월이 느껴졌다. 차라리 자연스러운 나이의 흔적이면 서글프지 않았으련만 여전히 탱탱한 피부와 주름하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왕정문도 유가령도 공리도 모두 서글펐다. 오직 실제로도 젊은 장쯔이만이 서글프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왕가위 영화 역시 예전의 감각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이제는 그의 감각은 구닥다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도저히 숨길수가 없었다. 배우가 보톡스와 화장과 주름살제거 수술로도 세월의 흐름을 감출 수 없듯. 왕가위 감독의 감각도 이제는 퇴보했음이 느껴졌다.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이 작품은 개막작이었고 4분 54초만에 표가 매진되어 버렸다. 그만큼 왕가위 감독이 오랜만에 작품을 냈다는 얘기도 될 것이고 또 아직까지는 왕가위감독의 브랜드 네임이 먹힌다는 소리도 될 것이다. 영화 중간중간에는 LG마크가 자주 등장한다. 왜 그런가 했더니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까 LG에서 화양연화 개봉당시 내한한 왕가위감독과 PPL 계약을 맺었다고 한다.(계약금액은 5억 7천만원이고 LG마크는 초우가 쓰는 소설인 2046의 미래 도시에서 총 4번정도 등장한다.)

너무 큰 기대를 하고 봐서 그런지 이 영화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다. 굳이 가지라면 서글픔 정도랄까. 같이 봤던 친구 역시 왕가위의 열혈마니아 였었는데 그녀는 심지어 영화를 보다가 졸기까지 했다. 내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이제 더이상 왕가위가 한때 그의 영화속에서 별이었던 배우들을 데리고 영화를 찍는 일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늙은 배우들을 등장시키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왕가위의 영화에서 젊고 아름다웠던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 이미지를 그대로 끌고 가려고 하고 왕가위 역시 그들이 그때의 분위기를 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세월은 어떤걸로도 막을수가 없다. 그리고 흔적을 지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왕가위에 한참 미쳐있던 스무살의 여자가 이제는 서른이 되어버린것 처럼 말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쉽고 서러워도 세월이 가는걸 인정해야만 한다. 이제 왕가위 감독은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일때가 온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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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verick 2004-10-14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왕가위보다는 양조위때문에라도 이 영화를 꼭 보려구요..
양조위의 그 표정은 정말이지... 전 남자이긴 합니다만 그의 표정을 보려고
그가 나오는 영화는 다 보려고 하는 편이죠
플라시보님 글대로라면 스포일러를 좀 보는게 나을것 같네요 그래야 이해가 빠를듯 ㅎㅎ

LAYLA 2004-10-1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사서독볼때 헷갈려서 엄청 고생했었는데 이번에도 ...고생할거 같네요...^^
호화캐스팅이 무조건 좋은게 아니군요 :-)

플라시보 2004-10-15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verick님. 네 저 영화는 미리 사전정보를 약간 가지고 보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특히나 화양연화를 보지 않았다면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가 힘들거든요. 음. 그리고 양조위. 저도 참 좋아라 하는 배우입니다.^^

LAYLA님. 제가 동사서독을 비디오로 가지고 있었거든요. 한 세번 정도 보니까 완전하게 이해가 가더라구요. 아마 극장에서 봤으면 전부 내용에 대해 토론하느라 정신이 없었을듯^^

tarsta 2004-10-15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 동사서독. 저는 그때 그 영화에 푹 빠져서는 극장에서만 네 번 봤습니다.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본 적이 거의 없으니 저로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죠. 비디오로 본 것 까지 합치면.. 꽤 봤죠. 대사를 거의 받아적다 시피 한 적도 있었어요. 그 겨자색사막, 황량하기 그지 없는데도 옐로우오커의 노란 색이 자꾸 눈을 잡아 끌어서 황량하지만 어쩐지 썰렁한 느낌은 없던 그 사막. 언젠가 사막에 한 번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실제로 보면 아마도 다른 느낌이겠지만..
비디오로 가지고 계시는군요. 괜히 반가워서 한마디 남기고 갑니다. :)

플라시보 2004-10-16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동사서독 하도 많이 봐서 대부분의 내용은 다 외웁니다. 흐흐. 참 괜찮고도 특이한 영화였죠.

마냐 2004-10-17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벼르고 벼르는 영화인데....옆지기가 "따로 보자"고 하더군요. 이미지 과잉이 이젠 싫다나요...그래서, 잘됐다..이 영화는 옆지기와 보지 않는게 더 좋겠다...하면서 더욱 기다리고 있었슴다..ㅋㅋㅋ 암튼, 님의 리뷰는 좋은 참고가 될 듯 합니다. 한 템포 늦춰서 기대를 조금 죽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