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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여름. 나는 알라딘에서 경제쪽의 리뷰를 많이 쓰시는 어떤 분으로 부터 내가 분명히 재밌어할 책이라며 이 책을 추천받았었다. 나는 책을 8월 중순에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고 다 읽은 날짜는 어제. 즉 2004년 5월 9일이었다. 이 책을 다 읽는데 거의 10개월이 걸린 것이다. 내가 이 책에 별 다섯을 주지 않는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이 책을 다 읽기까지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로인한 약간의 스트레스 때문에 별 한개를 빼 버린 것이지 절대 책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다. 책은 아주 훌륭하고도 재밌다. 더구나 나처럼 철학은 어려워 라는 생각으로 프로이드건 비트겐슈타인이건 그 밖의 누구건간에 손을 들어버린 인간에게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책을 다 읽는데 10개월이라는 기간이 걸렸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오래 읽었으며 보통 이정도로 속도가 나가지 않으면 포기해 버리는데 또 어째서 그 긴 시간이 걸림에도 끝까지 읽어치웠는지도 알 수 없다.
제목에서 나타나 있듯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금 더 깊게 생각을 해 보면 단순히 사랑해가 아니라 왜라는 물음에서 약간의 고민을 엿볼수도 있다. 그냥 너무 사랑해라던가 정말 사랑하는구나가 아닌 왜 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의문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그 문제에 관한 생각. 즉 철학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책의 화자는 한 남자이다. 미혼이며 직장이 있고 혼자 살고 있는 꽤 평범한 남자이다. 그는 어느날 비행기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클로이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러다 그녀와 만남을 가지게 되고 당연하게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에 빠진 다음 단계가 계속해서 빠지는 것이면 좋겠지만 실제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 바로 원하던 것을 얻게된 자의 오만. 즉 상대의맘에 안드는 구석이나 단점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 따라온다. 그리고 그 단점들은 어느순간 크게 보이기 시작한다. 저 단점들을 내가 다 알았더라도 나는 사랑을 시작했을까 라는 의문이 들 만큼.
그리고 그 다음 단계. 그런 단점들로 인해 사랑이 끝장 나 버리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어느새 정이라는게 생기고 익숙함이 생기며 함께지낸 시간들이 쌓여서 남들은 모르는 둘만의 암호같은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사랑은 더더욱 영글어가는 듯 보인다. 이제 남자는 클로이라는 여자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으며, 어쩌면 클로이라는 여자를 사랑하는 자신 혹은 클로이와 자신이 함께 만들어내는 풍경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랑은 그 익숙함 만으로 지속되게 가만있지 않는다. 광고에도 나왔다시피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 움직이므로.
어느날 그는 클로이가 자신의 친구와 외도를 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하지만 인정하지는 않는다. 의심은 들지만 의식적으로 그 의심을 누른다. 하지만 자신을 속일수는 있어도 변한 상대방의 행동은 속일수가 없다. 클로이는 점점 변해간다. 시큰둥해지고 무덤덤해지고 짜증과 싸움이 늘어간다. 그러다가 만난지 1주년이 되는 날. 역시 둘이 처음 만났던 장소인 비행기 안에서 클로이는 헤어지자고 말한다. 그는 받아들인다. 적어도 겉으로는 말이다.
사랑하던 사람이 갑자기 떠나겠다는 선언을 하고 나면 남은 사람이 할 일은 딱 한가지이다. 슬퍼하기. 혹은 괴로워하기. 뭐라 불러도 상관없을 마음의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했던 일들을 하나 하나 떠 올리고 사람은 가고 없지만 함께 했던 모든 사소한 일들을 부여잡고 그 기억들과 함께 산다. 그러다 마침내 남자는 클로이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 시도는 시도로 끝나고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클로이를 미워한다.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자기가 버림받을 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것과 달리 이제는 자기를 버린 클로이라는 여자에게 모든 원망과 미움을 다 보낸다. 그리고 다음 단계. 서서히 잊어간다. 억지로 떠 올려야 생각이 날 만큼. 그리고 가끔은 그렇게 잊었다는 것에 스스로 감상적인 슬픔에 젖을 만큼 말이다.
남자는 클로이를 잊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여자 레이첼을 만나게 된다. 그는 어렴풋이 자기가 클로이를 만났을때와 똑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려 하고 있음을.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다짐이 소리없이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자. 또 다시 빌어먹을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의 심리상태에 의존하여 전개 해 나간다. 다행스럽게도 남자의 심리상태는 시간 순서에 따라 흐르므로 따라잡기가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큰 사건 없이 한 남자의 내면. 그것도 오직 사랑이라는 것에 촛점이 맞춰져 있는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은 마치 조그만 구멍이 하나밖에 나 있지 않은 상자에 갖혀 있는 것 처럼 답답증을 느끼게 한다.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이야 책에서 흔한 일이겠지만 그들은 인생의 전체랄지, 아니 한 토막이라 하더라도 갖가지 사건에 대해 생각하고 느낀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오직 사랑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것도 여러가지 사랑이 아닌 클로이라는 여자를 향한 단 하나의 사랑만을 집요하게 이야기 한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는데 내가 난독증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긴 세월이 걸렸던 것은 답답함에 숨구멍을 터주기 위해서 읽는 중간중간 쉬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한페이지를 읽고 하루를 쉬었고 때로는 한줄을 읽고 한달을 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내 기억력 나쁜 머리에서 일어난 일 치고는 가히 기적적으로 한달전에 읽은 책의 앞장과 현재 읽고 있는 뒷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혹시 생각이 너무 많아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을 만나고 사귀기로 하고 남들에게도 애인이라고 소개를 하면서도 나는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해 마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오히려 이게 사랑이 아닐까? 뭐 맞겠지 하는 심정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단순했다면. 나의 학습 능력 만큼이나 내가 사랑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생략했더라면 나는 사랑을 조금 더 쉽게 해 볼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남자 주인공에게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사랑을 하면서 지나치게 생각이 많았다. 허나 따지고 보면 누구나 사랑을 하면서 그 정도의 생각은 하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머리속으로 해서 그 분량을 알 수 없을 뿐. 그 모든 과정을 글로 옮겨놓는다면 알랭 드 보통 보다 한 수 더 뜰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는 많은 철학자들과 그들의 글귀가 인용되어 있다. 하지만 별로 어렵지 않은 정도의 인용이라 괜찮다. 가끔은 단순한 선으로 이뤄진 그림이나 도표등이 등장하긴 하나 역시 어렵지 않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한 남자의 내면을 오래도록 질기게 들여다봐야 한다는 압박감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을 사람들에게 권할 생각이다. 나처럼 그 압박감에 못이겨 읽는데 10개월이 걸리건 1년이 걸리건 꼭 한번은 읽어 봐야할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단지 재밌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생에 한번 이상은 꼭 하게 되는 사랑이라는 행위 혹은 마음에 대해 한번쯤은 이렇게 착잡할정도로 차곡차곡 짚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