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M 3:00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 이대로 좀 더 삐대고 있다가 모자를 쓰고 방송국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우리 프로그램의 유일한 여자 게스트로서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샤워를 하고 화장품도 좀 찍어 바르고 가 주실 것인지. 결국 샤워는 하지만 화장은 안하고 얼마 전 면세점에서 건진 시커먼 마크제이콥스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기로 결정.
PM 4:30
한 것도 없는데 어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매우 놀라워 하며 아파트를 나섬. 그런데 어이쿠야 선글라스를 끼고 나서야 아큐브를 착용하는 것을 깜빡 했다는 사실을 발견. 가방을 뒤져보니 다행스럽게도 평소 잘 안쓰는 안경 중 하나가 굴러다님. 안도의 한숨을 쉬며 택시를 잡아탐. 보통은 택시 안에서 원고에 쓴 책들을 그제서야 읽는 시츄에이션을 벌이지만 오늘은 다행스럽게도 두 권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책이라 뿌듯함. 여유롭게 창밖으로 보이는 희뿌연 풍경을 감상함. 당췌 보이는게 없어서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든것이 매우 몽환적으로 보임. MP3에서 흘러 나오는 브렛 앤더슨의 목소리와 기똥차게 잘 맞아 떨어짐.
PM 5:00
거의 마하의 속도로 달려주신 택시 운전기사 덕분에 30분만에 방송국에 도착하는 기적을 행함. 방송국 수위 아저씨는 이제 내 얼굴을 익힐때도 되었건만 여전히 어딜 가냐고 질문해주심. 주여..하고 작게 뇌까리고 싶은걸 꾹 참음.
PM 5:05
PD, 엔지니어, 스튜디오 안의 아나운서와 인사를 하고 원고를 받음. 이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B스튜디오로 감 (거의 비어있음) 간만에 앉아서 원고 연습이나 해 볼까 했으나 뭐가 잘못된건지 아무리 눌러도 스튜디오 스피커가 꺼지질 않음. 할 수 없이 핸드폰을 켜고 친구와 실시간 문자 날리기 놀이를 함. 핸드폰이 너무 안보여서 액정이 맛갔나 싶었는데 여전히 선그라스 끼고 있음을 발견. 안경으로 바꿔 쓰니 빛이 있으라 하시되 빛이 있음.
PM 5:10
생방송 하던 PD 잠시 짬을 내어 건너오더니 '오늘은 커피도 못 드리겠네요' 함. 바쁘단 소리임. 안그래도 그의 커피, 설탕, 프림의 조화가 매우 입맞에 맞지 않았던차에 오히려 반가움. 명랑하고도 쾌활한 목소리로 내가 알아서 마시겠다 함. 대체 PD는 왜 나에게 커피믹스를 타서 주는 간편함 대신 자기가 직접 제조하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그러는지 잘 이해가 안감. 더구나 요즘 커피믹스는 설탕 조절까지 되는데 말이지.
PM 5:20
생방 들어가기 5분 전. 아무리 내가 쓴 원고라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봐줘야 할 것 같아 대충 살펴보니 맙소사 말 안되는 문장 너무 많고 말로 하기 힘든 문장 역시 너무 많음. 재빨리 볼펜으로 내 것만 고침. 진행자는 알아서 잘 하시겠지 방송 경력 20년을 자랑하는 베테랑인데 암만.
PM 5:25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핸드폰부터 끔. 예전에 생방 도중에 진동이 울려서 난감해서 죽을뻔한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남. (한 손으로는 원고 잡고 입으로는 말해가며 한 손으로 부시럭대며 가방을 뒤져 꺼야했던) 이 트라우마는 절대 안 없어질 듯. 거의 생방송 1분전. 진행자 매우 여유롭게 등장.
PM 5:30
방송 시작. ON AIR 에 불이 들어오고 진행자와 나. 무척 친한척 하며 서로 원고를 주거니 받거니 읽음. 도중에 진행자 갑자기 에드립 치기 시작. 황사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던 나는 '괜찮던데요?' 라고 얼빵한 소리나 해댐으로써 더 이상의 에드립은 용납치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표현해줌. 이토록 잘 쓴 원고에 왜 자꾸 에드립을 쳐대는지 알다가도 모를일임. 더구나 에드립을 치면서 얼굴도 안보고 원고만 뚫어지게 쳐다봄. (어쩌면 거기다가 자기 에드립을 적어놨을지도..음...)
PM 5:35
한참 한비야의 경력을 얘기하는데 국제 NGO 긴급구호 팀장이라는 말을 하고 난 다음 머릿속에서 '옆집에 사는 개 이름 빙고라지요~ BINGO BINGO BINGO 빙고라지요' 하는 노랫말이 떠나질 않음. 결국 그녀가 나온 어려운 발음의 미국 대학 이름을 틀리게 발음함. 방송 경력 2년 게스트 경력 5년차 답게 '죄송합니다'라는 멘트를 하고 다시 정정함. 생각해보니 그냥 넘어갔어도 아무도 몰랐을텐데 괜히 정정했다 싶어 후회막급.
PM 5:45
드디어 두 번째 책 소개로 넘어감. 근데 미쳤지 이석원을 정석원이라 썼음. 아놔 미치겠음. 그것도 내 원고가 아닌 진행자 원고라 수정도 불가능함. 다급해진 나 진행자가 들으랍시고 이~석원 하고 눈치를 줬으나 베테랑 답게 내 멘트는 하나도 안듣고 있다가 원고에 쓰인 그대로 정석원이라 발음하심. 순간 공일오비에 너무 미쳐있었던 지난날이 약간 후회스러움
PM 5:55
이제 슬슬 마감을 해야 할 시간임. 그러나 진행자 전혀 시간 안 봄. 오늘도 역시 내가 스스로 원고 건너뛰며 짜집기 쇼를 하여 시간을 맞추느라 쌩쇼를 다함. 그제야 진행자 시간을 보더니 우리의 마감이 56분 30초 라는걸 떠올렸는지 급히 마무리 멘트 읽어주심. 다음 이 시간에 더 유익한 책으로 찾아뵙는다는 클로징 멘트가 너무 지겹지만 달리 쓸 말이 없어서 진행자, 5년째 같은 말을 하고 있음. 뭐 책은 어지간하면 다 유익하니까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애청자 여러분들께 끝인사 날림.
PM 5:57
진행자. 클로징 하자 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남.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같이 사라짐. 아무래도 스튜디오에 최대한 늦게 들어오고 최대한 빨리 나가기가 직업 윤리인것 같음.
PM 6:05
'수고 하셨습니다. 아~ 오늘 책 선정 좋던데요' 5년째 PD에게 늘 같은 말 들음. 내 클로징 멘트 만큼이나 당신도 참 할 말이 없으신가보구료 싶어 잠깐 동질의식 비슷한걸 느낌. 내 방송 날짜도 아닌데 게스트 하나가 펑크내는 바람에 땜빵을 해달라 하심. 그 땜빵 여부도 이틀 후에나 알려준다 하심. 아무리 내가 최장수 게스트라 만만해도 그렇지 책을 두 권이나 읽어야 하고 원고까지 써야 하는데 너무하는거 아니냐고 말 하기에는 보도자료들에게 미안해서 차마 암말 못함. PD 약간 미안했는지 애청자들에게 나눠주는 독일 유기농 화장품 교환권을 주심.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방송 하루전에만 말씀해주세요' 라며 깨방정을 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