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서치 앤 리서치사의 조사에 따르면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들의 약 89%가 가장 공포를 느끼는 병원은 치과라고 한다. 나는 매우 평범한 인간이므로 당연히 내가 이용했던 그 모든 병원들 중에서 치과를 제일 무서워한다. 그러나 막상 내가 이빨이 아픈 것 같아 라고 말을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빨은 방치하면 방치할수록 더 큰 돈과 더 큰 고통을 요구할 것이 뻔하므로 재빨리 치과를 찾으라고 말한다. 마치 자기네들은 그 89%에 해당하지 않는 비범한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리서치 앤 리서치사라는 이름의 리서치 회사는 없다. 내 친구가 만들어낸 가상의 회사이다.)
치과가 왜 무서운지 말해보라면 일단 내가 진료를 받기 위해서 드러누워야 한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대부분의 진료는 아파 구르지 않는 한 의자에 앉아 진행된다.) 그리고 내가 누워야 할 의자 바로 옆에는 내 이빨을 뚫거나 뽑아낼 각종 드릴과 펜치 그리고 석션을 위한 기구들이 즐비하며 제일 위에는 수술에나 쓰일 것 같은 커다란 등이 달려있다. 그리고 의사들은 대게 진료를 시작하면 일단 그 등을 켜고는 입을 크게 벌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쇠로된 뾰족한 것들로 내 이빨을 누르면서 말한다. ‘이 이빨이 아프시단 거지요?’ 이미 아프다고 말을 했는데도 굳이 뾰족쇠로 내 이빨을 짓눌러서 진짜로 확실하게 아프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더구나 치료시 내 얼굴에 튀길 각종 오물을 걱정해서 입 구멍만 뚫려 있는 천을 얼굴에 뒤집어씌우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오싹오싹 공포체험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까는 뻥을 쳤지만 인간은 뇌와 가깝게 위치한 부분일수록 공포감을 훨씬 더 많이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치료를 받을 장소는 뇌에서 그다지 멀다고 할 수 없는 이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라식 수술을 한 인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는 이빨이 아파도 어지간하면 꾹 참는 편이다. 고맙게도 이 세상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진통제는 두통 다음으로는 치통을 언급하며 내가 치과에 가야할 시간을 뒤로 미룰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치과를 가게 되었다. 그것도 이빨이 전혀 아프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다. 출발은 그간 내가 자주 전화를 하지 못해서 약간 미안해하던 친구 (사실 그녀도 나에게 전화를 잘 걸지 않았지만) 에게 안부 전화를 걸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나 : 친구야 오랜만이구나
친구 : 그렇구나. 근데 너 요즘 바쁘냐?
나 : 글쎄 뭐... 그러니까 바쁘다면 바쁠 수도 있겠지만 딱히 그렇다라고 하기에는...
친구 : 안바쁘구나 그럼 너 내 부탁 좀 들어줘야겠다.
나 : 음.......
친구 : 내가 알다시피 회사를 다니느라 바쁘잖니. 근데 내가 얼마 전 눈에 넣어도 안아플 내 딸을 양치시키다가 충치를 발견했거든? 그래서 말인데 나대신 니가 치과에 며칠 좀 데리고 가줘야겠다.
뒤늦게 나는 여차여차한 일들로 내가 얼마나 바쁘고 거기다 피곤하기까지 한지 설명하려 했지만 친구는 이미 마음을 굳힌 뒤였다. 그래서 나는 내 친구의 세 살배기 여자 아이를 데리고 치과를 가게 된 것이었다. 사실 내 친구의 부탁도 부탁이었지만 그 딸아이가 나를 ‘공주 이모’ 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 아이를 데리고 놀이공원도 동물원도 아닌 치과를 데리고 간데 단단히 한몫 하기는 했다. (그 아이는 백화점에서 만난 이모는 백화점 이모. 공주 인형을 선물한 이모에게는 공주이모라고 부른다. 그래도 어쨌건 내가 이 나이에 이 외모에 어디가서 공주 소리를 듣겠나 싶은 건 사실이다.)
편의상 그 여자 아이를 민지라 부르기로 하자. 민지를 처음 데리고 간 치과는 시설도 좋아 보이고 치과 의사가 무려 열댓 명은 포진하고 있는 무척 큰 병원이었다. 가자마자 나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반항해대는 아이를 3명의 간호사와 함께 간신히 치과 의자에 눕혀서 치아 상태를 확인한 다음 코디네이터라 부르는 사람과 (정확하게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담을 했다.
코디네이터 : 어머니 아이의 치아에 현재 4개의 충치가 발견되었거든요?
나 : 저는 얘 엄마는 아닌데요...음..뭐 그건 중요한건 아니지만...근데 애 이빨을 보면 까맣게 썩은 건 하나거든요?
코디네이터 : 어머니 많은 환자분들이 까맣게 썩어서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치아만 충치라고 생각하는데요. 속이 썩어 있어서 진료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도 있답니다.
나 : 아....네... (나 어머니 아닌데)
코디네이터 : 그래서 말인데요. 민지가 아직 어려서 아직 4개의 충치를 치료하려면 공포감이 너무 심해서 억지로 치료를 강행할 경우 트라우마가 생길수도 있고 해서 저희 병원에서는 이런 어린 아동의 경우에는 마취를 권하고 있습니다.
나 : 치과 치료는 당연히 마취를 하는 거 아니었나요?
코디네이터 : 부분 마취가 아니라 전신마취를 말하는 겁니다.
나 : 충치 치료하는데 전신마취요?
코디네이터 : 걱정 마세요. 저희 병원에는 마취 전문의도 있구요. 어제도 세 살 난 남자 아이가 전신마취로 충치 3개를 무사히 치료했습니다.
나 : 아...네.... (근데 충치 뽑으려고 전신마취는 좀 심한 거 아닌가?) 그럼 비용은 얼마나?
코디네이터 : (매우 밝게 웃으며) 네.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제가 어머님과 상담을 하는거랍니다. 일단 충치 치료에 전신마취까지 하시구요. 그 다음에는 불소 치료를 하셔야 합니다. 불소치료가 꼭 필요한 이유는 아이의 이빨에 불소를 씌우면 차후에 발생할 충치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거든요. 그러면 이렇게 전신마취까지 해 가면서 충치 치료를 하시러 올 일도 없어지는거죠.
나 : 아....네.... 그래서 비용이 전부 얼만가요?
코디네이터 : 네. 다 해서 380만원인데요. 저희가 특별 행사 기간이라 40만원 DC해서 340만원에 해 드리겠습니다.
코디네이터와의 상담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코디네이터가 뭐하는 사람인지를 알게 된 것 이외에 네 살배기 아이의 영구치도 아닌 유치의 충치 치료에 우리 할머니의 위아래 틀니 제작에 버금가는 돈이 깨진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안전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한 전신마취에 관해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병원을 상대로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과 동시에 모든 책임은 사인을 한 당사자에게 있다는 각종 문구에 사인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시 친구에게 전화를 했고 친구는 수소문 끝에 다른 병원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리로 아이를 데리고 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돈은 줄였지만 생각지도 않은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치과는 뭐랄까 무척 한가해 보였다. 원장님 한분이 진료를 하시고 간호사도 딱 한명이었다. 아까보다는 현저하게 비용이 적게 들겠다 싶었지만 이게 웬일인가. 그 의사는 너무 심하게 세심했다. 내가 이전의 병원에서 알려준 비용과 전신마취를 운운하자 의사는 마치 심하게 상처라도 받은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말했다.
‘그렇게 치료를 하고 나면 아이가 치과의 공포에서 벗어날 방법은 영원히 사라지는 겁니다. 당연히 부분 마취만 하고 치료를 해야지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지금도 사탕을 빨고 있는 민지의 충치 치료는 4개 정도로 끝이 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미리부터 치과에 적응해서 마치 약국에 진통제를 사먹으러 가듯 치과를 아무런 공포감 없이 가게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곧 이어 매우 공포스런 말이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일단 애들은 엄마가 하고 나면 자기들도 따라하지요. 그러니까 어머니 먼저 이 의자에 누워 시범을 보이시겠어요?’
이젠 뭐 더 이상 엄마가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도 귀찮아서 나는 그래 시늉인데 뭐 어때 저 어린것도 잠시 후면 드릴로 이빨을 갈아야 하는데 싶어서 눈 딱 감고 의자에 누웠다. 그런데 의사가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지금 중요한건 민지의 충치 치료가 아니라 내 이빨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면서 예의 그 뾰족쇠로 여기저기 찔러가며 지금 당장 치료를 해야 할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마음 같아서는 내 이빨일랑 잊어버리시고 그냥 계획대로 아이나 치료해달라고 하고는 싶었으나 저 멀리서 사탕을 빨며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와 의사를 번갈아 쏘아보고 있는 민지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어른으로서 약간 비겁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못 말릴 착한 심성이 비집고 나와서 그만 OK를 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일주일째 민지와 함께 내 치과 치료를 하고 있다. 민지의 치료는 언제 하냐고? 그건 일단 내 치료과정을 모두 지켜봐서 민지가 치과 치료는 전혀 무섭지 않아 라고 충분하게 느낀 다음에야 한단다. 물론 나는 민지가 그렇게 느끼도록 아무리 아파도 오른손을 드는 것으로 여태까지 비명이 해 왔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민지 덕분에 비록 내가 알지 못했으나 속에서 썩어 들어가고 있던 내 이빨들을 더 큰 비용과 고통의 쓰나미가 닥치기 전에 치료하게 된 것은 뭐 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솔직히 나는 이렇게 말 하고 싶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이냐고 난 마음의 준비도 전혀 안되었는데 말이지. 치과 치료 따위에 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냐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리서치 앤 리서치사의 조사에 따르면 무려 89%의 인간들이 치과를 무서워한다고. 그리고 나는 매우 평범한 인간이라고.
*이번주 마감할 원고인데 어제밤 갑자기 아파트에 정전이 되는 바람에 매우 스펙타클한 상황에서 완성이 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