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김영주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고백하자면, 난 이미 원작을 읽은 영화는 보지 않는 편이다. 아무래도 내가 읽으며 상상했던 목소리와 모습이 맞지 않으면 원작을 영상으로 본다는 기쁨보다는 실망감이 더 큰 편이기 때문이다. 영화 퇴마록이 그랬고 다빈치 코드 역시 일년이 지나서야 DVD를 빌려봤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오히려 원작을 찾아보는 편인데...애니나 영화에는 시간 제약이 있어서 다 표현하지 못했던 디테일을 원작에서 확인하며 한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맛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원작인 소설과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약간 다르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내 예상에서 약간 빗나간 작품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내가 현재 책을 읽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곳은 우리 학교 도서관으로, 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 책도 어느 착하신 분이 신청해서 들어온 걸 게시판에서 보고 집어왔던 경우다. 물론 전에 봤던 애니메이션이 생각나 신나게 집어오긴 했지만 스토리도 어렴풋한데 이름이 기억날리가 없었다. (이게 바로 리뷰가 늦어진 이유...)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책이 예쁜 삽화와 표지로 새로 나온 모양이지만 난 아무래도 화려한 만화 그림체보다는 일러스트같은 삽화가 맘에 든다. 소재 자체가 타임 리프 같은 복잡한 이론을 다루고 있어서 원작 소설이 조금 더 길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이 한 권의 책에 단편소설이 3편이나 들어있었다. 하나같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같이 조금은 가벼운 SF 이야기로 주인공이 다 여자아이라 더더욱 소재가 어렵다기 보다는 읽기 편한 감이 있다.

우선, 표제작인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의 이모 되시는 가즈코의 학창시절의 이야기로 애니메이션의 기초가 된 듯 설정 자체는 비슷한 편이다. 여주인공인 가즈코는 친구인 가즈오, 고로와 함께 과학실 청소를 한 뒤 문단속을 하다 실험실에서 인기척을 듣고 들어갔다 난데없는 라벤더 향에 정신을 잃는다. 양호실에서 깨어난 가즈코는 자신에게 이상한 힘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비슷한 설정(3명의 친한 친구, 과학실, 타임리프 등)에서 시작했지만 소소한 설정은 확실히 시대(이모와 조카)가 다른만큼 약간씩 다르다.

역시 가장 큰 차이점은 캐릭터성으로 남자 주인공인 가즈오의 나이는 정말 반전 중의 반전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봤기에 더더욱 충격적이었던 것 같지만. 타임 리프 힘을 얻었다고 신나게 썼던 조카와 달리 이모는 갑자기 생긴 힘에 당황해 하고 현실적으로 반응하는 편이다. 단편이기에 전개가 빨라 애니메이션같은 오밀조밀한 재미는 없지만 워낙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소설인만큼 갑자기 타임리프를 얻은 평범한 여자아이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다.

두번째 작품인 <악몽>은 세 단편 중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으로, 아무래도 이야기를 슬쩍 알고있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참신하지만 너무 짧은 보다는 소설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악몽이 개인적으로 훨씬 재미있었다. 마사코는 친구인 분이치의 집에 수학숙제를 하러 갔다가 전통 가면을 보고 까무라칠 듯이 놀라고 만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낸 마사코는 스스로 그 이유를 자문하기 시작하고, 결국은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줄거리 추리기에는 약해서 재미가 반도 못 살았지만, 주인공 아가씨가 매우 박력있게 놀라기는 하지만 어찌나 논리적으로 생각을 하는지 당장에 심리학자의 길을 권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야기 자체도 귀엽지만 가장 귀여웠던 건 마사코의 동생인 겁쟁이 요시오였다. 엄마, 아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그렇게나 영향을 받다니 심약한 게 너무 귀엽지 않은가! 비록 요시오 자신한테는 하나 하나가 큰 일이었겠지만...

The other world는 타임리프, 타임머신 등 시/공간을 뛰어넘는 츠츠이 야스타카의 이론이 집약된 작품인 것 같다. 내 성격이 워낙 대강대강인지라 읽으면서 시/공간 뛰어넘기에 대해 그렇게 깊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앞으로 내 머리 안에서의 시/공간 뛰어넘기는 씨실과 날실같은 구조로 연상될 것 같다. 세 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짧지만 내겐 임팩트가 무척 커서 책을 덮고나서 생각난 건 였다. 뭐랄까... 처음에는 굉장히 부러웠지만, 뒷쪽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호러틱한 무서움보다는, 그런 식으로 내가 이기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않은가! 거기다 한 순간의 생각에 따라 휙휙 바뀌는 세계라니. 어린 시절 현실감없이 생각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무서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모로 뒷골이 오싹한 단편이었다.

전체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인데다 나이대가 중고등학생이다보니 그 나이대의 풋풋함이 전반적으로 배어있는 것 같다. 실제 이 작품이 나온 시기가 60년대라고 하던데 그 시절에 SF적인 소재를 맛깔나게 살린 작가의 역량이 새삼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역시 애니로 나온 <파프리카>도 츠츠이 야스타카의 작품이라고 하니 다른 작품들도 차근차근 찾아 읽어봐야겠다.

-보통 사람이 이런 희한한.....다시 말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과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당황해서 잘 확인하려고도 하지 않고 잊어버리려는 경향이 있지. 본능적으로 이런 현상을 싫어하는 거야. 고로 군도 그런 게 아닐까? (72)

-과학이라는 것은 불확실한 것을 확실한 것으로 하는, 그 과정의 학문이야. 따라서 과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그 전 단계로서,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가사의한 현상이 없으면 안 되지. (72)

-미래에서 기다릴게, 꼭 기다릴게.....(135)

-'언젠가, 누군가 멋진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 사람은 나를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알고 있을 거고.....' 어떤 사람일지, 언제 나타날지,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멋진 사람과.....언젠가.....어디선가....(140)

- 우리 작은아버지가 심리학자인데 무서운 게 왜 무서운지를 알게 되는 순간,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고 예전에 말씀하신 적이 있어. (159)

-무서움을 꾹 참고 아득히 먼 아래의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왠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난간 너머로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 혹은 갑자기 죽고 싶어져서 그대로 뛰어내리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가 가슴속에 가득 퍼져서 왁! 하고 소리 치고 싶을 정도로 무서워진다. (166)

-무섭다고 느끼는 것은 '죄의식'이 있어서래. (174)

-인간의 마음이란 어쩜 이리 복잡할까. 정말 이상하고도 재미있어....(185)

-노부코는 분명 시로에게 싸우지 말라고 부탁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당하면서까지 잠자코 있으라고는 하지 않았다. 시로가 그 원수 같은 불량학생들을 혼내주었으면 하고 내심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노부코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너무 이기적이라 생각하기는 했지만, 시로가 비겁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33)

-다원우주, 그리고 동시존재.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는 연속된 시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역사를 가진 세계를 한 가닥의 날실로 본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그 날실을 무수히 가로지르는 수없이 많은 씨실이라 할 수 있다. (239)

-노부코는 이렇게 잔혹하고 인정사정없는 시로를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적어도 그녀 스스로는.....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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