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적이 아니다 -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 그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신기철 지음 / 헤르츠나인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영화『태극기 휘날리며』에선 안타까운 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 하나는 진태의 약혼녀 영신이 반공청년단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입니다. 영신은 북한군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지만, 빨갱이로 몰려 죽게 됩니다. 반공청년단의 이런 행동은 영화를 위한 극적 장치도, 전쟁통에 과열된 과격함도, 순간의 감정에 의한 즉흥적인 살인도 아니었습니다. 영신이 겪은 일들은 수많은 한국 국민들이 겪은 실화이며, 체계적인 대량학살이었습니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한국전쟁에서, 한국 국민들,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은 북한의 인민군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한국 군대는, 그 총부리를 인민군뿐만이 아닌,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한국 국민들을 향해 들이댔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국부(國父)라 부르는 이승만은, 한국전쟁 당시 많은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전쟁기술이 발달하면서 전쟁이 벌어지면 군인보다 민간인들이 더 많이 희생되고, 점령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적국의 군인들에게 살해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적국의 민간인이 아닌, 자신의 국민, 자신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자기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칼로 찔러 살해하는 부모가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람을 부모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승만이 가장 먼저 공포한 법령은 전쟁을 위한 계엄령이 아니라,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었습니다. 이 법령을 통해 이승만은 수많은 시민들을 부역 혐의로 몰아 살해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얻었습니다.

권력욕에 눈멀었던 늙은 독재자는 항일투쟁에서조차 전선에서 멀수록 안전하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은 점점 다가오는 외부의 적뿐만이 아니었다. 내부 지배 질서의 흔들림 역시 공포였다고 한다. 해방 후 5년 동안 저질러 온 전횡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는 전쟁 상황에서 당장 눈앞의 적은 인민군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정치적 반대자들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 p.34

전쟁 초기 미국 대사는 인민군에게 잡히기 전까지 최대한 오래 대통령이 서울에 머물러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이승만은 즉시 피난 갈 것을 고집했습니다. 국회 토론에서 서울을 사수할 것이 결정되었고, 이를 알리기 위해 국회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이미 이승만은 남쪽으로 피신한 뒤였습니다. 이승만은 전쟁이 시작된 순간부터 수도를 지킬 생각이, 국민을 지킬 의지가 없었습니다. 이승만의 다양한 행적은, 침략하는 적보다 적에 협력할 것으로 보이는 국민들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건국 후 테러, 암살, 학살로 일관했던 독재자가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잘못보다 국민을 원망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이승만은 계엄령을 선포했는데, 계엄령의 범위에 전라도를 제외했습니다. 이로 인해 피난민을 자신이 도망쳐온 곳과 멀리 떨어진 호남으로 유도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정부 수립 전후부터 이승만 정부에 사사건건 대들었던 지역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의 국민들을 이승만은 처리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북한군이 진군하면서 국군은 후퇴했고, 국군이 후퇴하는 길을 따라 한국군에 의한 한국인의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8사단은 후퇴하면서 제천, 예천, 영천에서 민간인을 집단 학살했고, 6사단은 횡성, 원주, 여주, 충주, 음성, 괴산, 문경, 청원, 상주에서, 수도사단, 2사단, 7사단은 진천, 청원, 안동, 보은, 의성, 청송에서, 3사단은 울진, 영덕, 대구에서 시민들을 살해했습니다. 미군에 의한 학살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정보에 의해, 때로는 의도적으로, 육군과 해군, 공군의 종합적인 공격을 받아 민간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민간인 학살은 전투성과로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후퇴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극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한지역을 수복하는 과정에서도 이루어졌습니다. 압록강까지 진군하는 과정에서, 1.4후퇴를 하는 과정에서도 민간인들은 살해당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이미 국가보안법은 불법 학살 행위를 조장하는 합법적 근거였다. 단독정부 수립 직후 1948년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국가보안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입증 가능한 행위가 아닌 범죄 의도를 추정해 처벌하는 데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주관적, 정치적 판단만으로 반대세력을 탄압하는데 국가보안법을 적용했다. - p.240

이승만 정부의 한국전쟁은 방어 전쟁이라고 하면서 점령군이나 저질렀을 법한 집단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한강철교, 수원공항 등 다양한 실수들 역시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한강철교 폭파로 인해 1만명이 넘는 국군이 강을 건너지 못했으며,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국민들은 부역자라는 누명을 쓰게 되었고, 다리를 끊었지만 인민군의 진격 저지와도 큰 관련이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충청도로 피신해서 국민들에게 안심해도 괜찮다고 기만적인 라디오 방송을 했습니다. 이 거짓 방송을 듣고 재빨리 피난을 간 사람들은 애국자가 되었고, 대통령의 말을 믿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용공분자나 부역자가 되서 대통령의 손에 처형당했습니다.

이승만의 광기는, 반공주의와 정치권력과 결합해 합리적인 대량학살을 벌였습니다. 민간인 학살 책임에 있어서 이승만의 책임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이승만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독재 시절엔 조명되지 못했고,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사의 어려움 등으로 국가가 스스로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에 와서야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희생자들에게 사죄가 이루어졌습니다. 어쩌면 이승만은 한국전쟁 발발을 자신에게 반대하는 한국인이 없는 클린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전쟁 내내 벌어진 한국군에 의한 한국 민간인 학살은, 국가적 폭력, 자발적 복종, 합리성이란 형태를 가집니다. 이 특징을 가지는 것은,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하는 현대성의 '밝은 핵심', '현대 문명의 꽃', 바로 홀로코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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