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
미하엘 유르크스 지음, 김수은 옮김 / 예지(Wisdom)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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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사람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물보다 진하다는 피로 이루어진 관계에서도 돈문제 등으로 서로 신뢰를 잃기도 하고, 연인끼리 혹은 친구 사이에서도 신뢰는 쉽게 얻기 힘듭니다. 그러한 신뢰관계를 바로 어제만 해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사람과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기적이라고 불리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은 1차 세계대전 도중 일어났습니다. 특정한 지역의 특별한 사람의 기적이 아닌 수많은 사람이 낳은 기적이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유럽인들은 전쟁 직전에는 더불어 살았던 이웃들끼리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전쟁 직전엔 수십만명이 모여 평화시위를 벌였지만, 전쟁이 시작되자 흑백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애국주의자들과 언론에서는 전쟁을 찬양했고 고무했으며, 대중들은 점차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게 됩니다. 이런 거대한 물결에 수많은 반전주의자들, 유명한 학자들 또한 휩쓸려 전쟁에 찬성합니다. 그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를 외친 유명한 학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뿐이였습니다. 젊은이들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열광적으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당시 시작된 여성해방의 흐름은 영국의 과격 여권론자들로 하여금 여성의 병역의무 도입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하게 했습니다. 여권론자들은 거리에서 군복을 입지 않은 젊은 남자를 만나면 전선으로 떠나지 않은 남자는 겁쟁이라는 의미의 흰 깃털을 건네곤 했습니다.

평화주의는 나를 지배하는 본능적인 감정이다. 어떤 식의 이론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증오와 잔혹성에 반대하는 마음 깊은 곳의 저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대중은 선전에 중독되지 않는 한 결코 전쟁을 열망할 수 없다. - 아인슈타인 

전쟁이 시작되고 어떤 편도 결정적인 땅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선 지하에 참호를 파고 끝없는 참호전이 시작됩니다. 참호에서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축축함과 추위, 이와 쥐에 맞서 싸워야 했고 적의 공격, 부실한 보급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광기어린 선동에 휩싸인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와서야 전쟁의 실상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광적인 전투 대신 생존을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전쟁 초기의 몇달 동안 서부전선 전체 참호들에서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합의가 통용됩니다. 볼일을 보러 갈 때는 공격하지 않았고, 식사할 때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막대기에 고정해서 엄호 위에 높이 세운 표지판으로 각자 식사시간을 알리면 대략 1시간 정도는 사격을 중지했습니다. 독일군, 프랑스군 혹은 영국군의 많은 매복저격병들은 교대시나 정찰시에 우연히 서로를 만나면 사적인 휴전을 결정하곤 했습니다. 전쟁이 5개월 정도 진행된 후로는 서로 쏘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상대편을 못 본 척하기도 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몇몇 요구들은 보잘것없는 병사들의 묵인 속에서 존중되고 실현되었습니다. 그들이 침묵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사령부에 있는 최고위 사령관들보다는 반대편의 비슷한 계급의 병사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체는 쌓여갔고, 병사들은 절실히 평화를 원했습니다.

1914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독일군 진지에서 노래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떤 지역에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들려왔고, 어떤 지역에선 '아데스테 피델레스'가 들려 왔습니다. 독일군의 노래에 프랑스군, 영국군, 벨기에군의 병사들은 긍정적으로 화답했고 그들은 대표자들끼리 만나 크리스마스에 휴전할 것을 합의합니다. 공식적인 친교행위는 반역죄로 간주되어 처벌될거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크리스마스만이라도 평화를 원했고 현장 장교들은 그런 행위를 묵인해줍니다. 그들은 서로 참호 밖으로 나와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시체들의 장례식을 합동으로 치뤘고, 서로의 보급품을 교환했고, 가족사진을 보여주고, 서로의 이발을 해 줍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축구경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였지만 실상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배신 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현실이 미쳤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에 영국군, 프랑스군, 독일군, 벨기에군 병사들은 광기의 대안을 찾았고, 그것은 자연스럽고 건전한, 공포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그들은 평화를 이뤄냈고 그럼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를 치유했습니다.

촛불이 반짝거리는 곳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완벽한 영어로 '애니 로리(Annie Laurie)'를 불렀다. 아직 믿을 수 없어하는 적에게 보내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한소절 한소절 넘어갈수록 의혹은 사라지고 유혹은 커져갔다. 크리스마스 이브는 마술적인 순간이었다. 영국군 이병 퀸튼은 이 장면을 15년 후 플뢰르베 전투에 관한 보고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다. "전쟁과 민족적 증오에 대한 모든 생각이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는 그때 아이들처럼 행복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지나간 뒤 병사들은 그 이전보다 노골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다시 서로에게 총을 쏘기 싫어했고 이 잠깐의 휴식을 더 즐기고자 했습니다. 본국에서 화려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던 최고위 사령관들은 이런 보고를 받고 강력한 대응을 요구했으며 현장 장교들은 즉결처형을 거론하며 협박합니다. 그런 대응에 주저하고 우물거리며 병사들은 결국 단념합니다. 모순을 저항으로 바꾸는 방법을 그들은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불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다른 식의 전략을 생각해냈고,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그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상대편을 향해 총을 쏘기는 했지만 정확히 겨냥하지 않았는데, 명령에 복종하면서도 따르지 않는 것은 단순하고도 매력적인 해결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은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교황의 전쟁중단 호소는 현장까지 전해지지 않았고, 언론은 지속적으로 상대방을 악으로 묘사하는 홍보물을 배포했습니다.

모든 선전포고는 일종의 국민축제가 되어야 해. 투우경기에서처럼 입장권과 음악이 있는 축제 말이야. 경기장에는 수영복을 입고 몽둥이를 든 양국의 장관과 장군들이 선수로 등장하지. 거기서 서로 싸워서 남은 사람의 국가가 승리하는 거야. 여기서 엉뚱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나은 방법이잖아. - '서부전선 이상 없다' 中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던 전쟁터 속에서 병사들은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와 같은 인식을 공유했고 음악의 힘을 통해서, 크리스마스라는 공통된 종교적 힘을 통해서 잠깐이나마 평화의 모습을 구현합니다. 그런 평화에의 갈망은 일시적으로나마 권위에의 복종도 이겨냅니다. 하지만 그후 지속된 전쟁속에서 그러한 용기는 더이상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저 '우린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라고 말하면 될 것을, 음악 한 소절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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