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권력의 얼굴
제러미 블랙 지음, 박광식 옮김 / 심산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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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부터 인류는 지구의 모양에 대한 지식적 욕망을 가져 왔습니다. 그 결과 지구의 모양을 계산하는 것부터, 지역적인 부분을 지도로 그리는 일까지 인류의 역사는 꾸준히 측정을 거듭해 왔습니다. BC 275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책임자였던 에라토스테네스가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의 그림자 길이의 차이를 통해 지구 둘레는 42,000km일 것이라고 계산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하지만 북극을 포함한 모든 지역을 완벽하게 볼 수 없었기 때문에 구형일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극지방과 일부 대륙의 중심부는 19세기까지 지도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지역이 밝혀지지 않는 한, 지구는 구형일 수도 있지만, 도넛 모양일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류는 기술의 발달로 우주에 나가면서 지구는 둥글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3차원인 우주공간에서 2차원인 지구 표면을 보았기 때문에, 지구 표면의 지도를 쉽게 시각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의 발달 덕에 대부분의 지도 사용자들은 지도의 표면적인 정확성과 객관성을 신뢰합니다. 이러한 정확성은 근대 지도에 깔려있는 이데올로기이며, 존재 이유입니다. 즉 지도는 객관적이기 때문에 정확하고, 실제를 공정하게 과학적으로 재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은 2차원 다양체 혹은 곡면이다. 우리는 세계의 가능한 모양들을 생각함으로써 이 개념에 도달할 수 있으며, 2차원 다양체를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형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2차원 다양체 혹은 곡면이란 그 위의 모든 구역들을 종이에 지도로 표현할 수 있는 수학적 대상이다. 2차원이라는 말은 그 대상에 속한 임의의 점 근처의 점들을 두 개의 상호 독립적인 방향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푸앵카레의 추측》p.37 

하지만 지도는 현실의 선택적 재현입니다. 지구 같은 3차원의 구형을 2차원으로 표시하려면 본질을 거세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대부분의 지도는 그것들이 표현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대단히 작기 때문에, 지도 제작자들은 무엇을 보여줄지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도 제작자가 재현자라기보다는 창작자라는 사실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이 선택 과정에 정치가 있으며, 권력이 있습니다. 지도의 역사는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정치 권력에 대한 강조는 상당수 현대 지도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지도를 이용한 국가의 자기주장은 국민과 국가의 영역을 분명하게 표시하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에, 지도를 통한 공간 정리는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교육 과정이기도 합니다. 데니스 우드가 쓴《지도의 힘》에서는 그러한 관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드는 지도는 이해관계에 복무함으로써 기능하며, 이해관계는 감춰져 있고, 역사의 핵심적 일부분이라고 말합니다.

3차원인 구체를 2차원인 지도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지도는 필연적으로 왜곡이 따르며, 지도의 투영법을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를 통해 그 지도가 어떤 권력을 반영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럽화된 사회에서 쓰이는 지도들은 모두 유럽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항해자들의 필요에 맞춘 지도인 메르카토르의 적도 투영법은 중세 기독교권의 지도와 달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삼지 않고 유럽을 중앙에 배치합니다. 또한 북반구는 위쪽에, 남반구는 지도의 반도 차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표시함으로써 북반구의 우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898년의 반데르 그린텐 투영법은 1988년까지 미국 지리학협회에서 사용했는데, 그린란드, 알래스카, 캐나다, 소련이 실제보다 크게 표시됬습니다. 반데르 그린텐 투영법에서는 소련이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그려졌는데, 유라시아 전체를 위협하는 압도적인 존재로, 봉쇄해야 하는 대상으로 묘사됩니다. 즉 이 투영법은 냉전시대에 맞는 지도의 이미지인 것입니다. 1988년이 지나자 미국 지리학협회는 로빈슨 투영법으로 바꿨는데, 이 투영법에서는 소련의 크기가 갑자기 축소됐습니다.

유럽 식민주의의 종식과 근대 과학의 발전이라는 흐름에 따라 독일의 아르노 페터스는 새로운 지도를 제안합니다. 페터스의 투영법은 열대 지방을 엄청나게 키워놓았고, 그 결과 아프리카의 길이가 극단적으로 과장됐습니다. 기존 질서의 재정립을 겨냥한 시도의 하나로, 제3세계의 관심이 커져나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페터스의 지도는 열띤 환영을 받게 됩니다. 또한 유럽이 세계지도의 한 가운데에, 그리고 북반구가 위쪽에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도전하는 지도도 등장했습니다. 《맥아서 수정 세계지도》는 오스트레일리아를 지도의 한 가운데에, 남반구를 위쪽에 배치함으로써 기존의 관념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은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는데, 여전히 세계지도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우위를 시사하고 있습니다. 유럽중에서도 동유럽에 비해 프랑스, 독일, 영국 등의 지도화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세계 대아틀라스》를 보면 그러한 서구중심주의적인 경향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럽의 경우 1인치에 94마일의 축척이 적용된 반면, 남미는 197마일의 축척이 사용됬고, 아프리카 남부의 카탕가 지역은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대부분의 극동 지방, 그 중에서도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한국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데, 이 세 나라는 극동 지역을 다룬 페이지에서 한꺼번에 다루는가 하면 축척도 237마일로, 세밀도도 떨어집니다. 그 결과 이 극동 지역의 지도를 다른 지역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인구가 희박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런 서구중심주의는 아동용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어스본 아동백과사전》에 나오는 지도들을 보면 아시아의 경우 농업 위주의 목가적인 이미지를 채택했고, 아프리카의 경우 동물만을 사용해 표현합니다. 이러한 이미지는 서구를 제외한 지역은 산업화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햄린 아동백과사전》의 지도는 남한과 북한에 같은 색을 사용했고, 심지어 경계선은 표시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중국의 인접 국가들에는 모두 같은 계열의 색을 사용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서구중심주의는 장소의 명명법에서도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데, 많은 경우 과거의 식민지들이 유럽 제국주의의 잔재를 씻어내기 위해 발생합니다. 인도의 경우 뭄바이, 딜리, 첸나이를 사용하지만 지도는 봄베이, 델리, 마드라스로 되어 있습니다.

유럽과 유럽인이 가장 중요한 세계로 표현되는 지도학적 강조의 원인은 바로 경제력에 있습니다. 지도나 지도책은 서구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팔리고, 지도 판매에 따른 이윤도 서구에서 훨씬 큽니다. 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지역을 자세히 다룬 지도책들은 자금 지원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은 편인데, 이런 지원들 또한 대부분 서구에서 지원해줍니다. 또한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해외 판매를 해야 하는데, 이는 주요 국제어로만 지도를 출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도책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지명이나 범례, 설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서구의 우위성은 제작 뿐만 아니라 배포에서도 우위를 누리고 있는데, GPS의 보급으로 그러한 관념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사례는 인식적인 측면에서 서구화가 반드시 식민 통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20세기 에티오피아에서 서구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가장 거셌을 때 발간된 《에티오피아 아틀라스》는 이데올로기적으론 대단히 선명했지만, 지도 제작법에서는 서구의 것이였습니다.

이렇듯 지도는 지도 이상의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분야를 지도로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지도는 세계관 뿐만이 아니라 사회, 경제 문제를 표현할 수 있고, 선거와 같은 정치 뿐 아니라 국경, 전쟁 등 수없이 다양하고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습니다. 이 블로그에서 사용중인 프로필의 그림만 봐도 지도를 통해 다른 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지도가 도면인 한, 지도는 인간 활동의 산물이자 기록물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인간 활동의 논쟁적 성격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공간과 공간성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제시, 기록하고 또 다른 관점들과 다툼을 벌이는 과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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