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수찌와 버마 군부 - 45년 자유 투쟁의 역사
버틸 린트너 지음, 이희영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이 나라는 근현대사 시기에 타국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식민통치에 맞서 싸운 독립영웅이 존재했으며, 그 독립영웅이 암살당했습니다. 또한 쿠데타를 통해 군사 독재자가 등장했고, 군부는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잔인하게 탄압했으며, 이 민주화 운동을 이끌며 군부에 저항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어디일까요? 바로 미얀마입니다. 이 책은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필수적인 존재, 아웅산 수치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말합니다. 단순히 아웅산 수치라는 민주투사를 찬양하는 책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웅산 수치 여사의 한계점을 지목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지적은 아웅산 수치 여사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며, 동시에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미얀마는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습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미얀마의 독립 운동가들은 일본과의 관계를 원했고, 일본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 미얀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협력체계가 이루어졌습니다. 독립 운동가 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아웅산 장군과 네윈 장군이였는데, 일본은 군국주의에 네윈이 적합하다는 판단 하에 네윈을 더 신뢰했습니다. 미얀마는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냈지만, 독립을 앞두고 아웅산 장군은 암살당합니다. 그 후 1962년에 네윈은 쿠데타를 일으켜 무력으로 미얀마를 독재체제로 만들게 됩니다.

어떤 나라의 어떤 역사에서건 독재정권은 민주화의 열망과 마주하게 됩니다. 미얀마도 예외는 아니였고, 1988년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정치적 의도를 보이지 않았던 아웅산 수치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시위대 앞에서 첫 공식적인 정치 연설을 하게 됩니다. 감동적인 연설과 버마의 독립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는 아웅산 장군의 딸이라는 배경은 아웅산 수치를 순식간에 민주화 운동의 핵심 인물로 부각시켰습니다. 아웅산 수치는 민족민주동맹(NLD) 사무총장을 맡았고, 가장 대표적인 야당 지도자이자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상징적 인물로 부각됩니다. 군부는 아웅산 수치의 위력을 실감했고, 결국 그녀를 가택 연금하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군부는 어느정도는 사회장악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90년에 선거를 허용했지만, 선거 결과 485석 중 392석을 NLD가 차지하는 결과가 나옵니다. 국민들은 아웅산 수치를 지지했고, 심지어 군인들의 마을에서까지 NLD가 승리했습니다.

군부는 선거에서 졌지만 권력을 이양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에 대해 1990년에 불교 승려 수천 명이 시위를 일으켰지만, 군부는 군인들에게 승려들을 향해 자동소총 방아쇠를 당기라고 명령합니다.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 신자인 나라에서 승려들의 움직임은 군부에 가장 심각한 위기감을 불러 왔습니다. 군부는 사찰을 습격하고 승려들을 체포하고 투옥하고 살해했습니다. 군부는 미얀마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집단인 승려들까지 가혹하게 탄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아웅산 수치를 가택연금하고 야당 주요 정치인들을 제거 혹은 회유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은 사그러들었습니다. 1991년 아웅산 수치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국민들은 여전히 아웅산 수치를 민주화의 상징이자 희망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아랍의 봄' 중 하나인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을 다룬 와엘 고님의 책《레볼루션 2.0》을 보면,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계기는 칼레드 사이드라는 한 청년의 죽음이였지만 운동을 위해선 사람들을 모아 줄 수 있는 상징적 존재가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그 존재가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이였고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모하메드 모스타파 엘바라데이 박사였습니다. 엘바라데이는 대통령이 될 생각이 없음을 명확히 했지만 사람들은 엘바라데이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생각했고, 결국 무바라크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웅산 수치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아웅산 수치를 외치며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군부독재 종식을 갈망하며, 그의 이름을 외침으로써 더 쉽게 결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운동이 아웅산 수치라는 한 개인의 존재와 지도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현실은 버마 민주화 운동의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이 약점은 아웅산 수치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아웅산 수치는 인터뷰를 통해 "나는 군사정권과 NLD, NLD와 민주화 세력 사이에 어떠한 개인숭배도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 버마의 민주주의는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원칙에 의해 정착되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민주주의를 가져다 줄 어떤 특별한 힘도 없으며, 민주주의는 국민 모두의 힘으로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웅산 수치 본인에 대한 개인숭배는 이미 미얀마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불가피하게 아웅산수치 자신도 막을 수 없는 아웅산수치에 대한 개인숭배로 이어진다. 억압적인 군사정권이 대표하는 악과 부패, 영웅적인 민주 투사의 순결성과 능력, 이 둘 사이에 간극이 벌어질수록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이루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한 개인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조직의 연속성은 점점 더 위협받게 된다. - p.202 

또한 미얀마 정치체제의 미성숙함이나 사회적, 지적 구조의 약점이나 결점 등을 언급하지 않고 종교적 개념을 민주화 투쟁으로 연결시키는 신비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는 점도 약점으로 지적됩니다. 이는 오랜 자택연금 생활과 아웅산 수치의 어머니 영향이 크다고 분석합니다. 종교국가에서 아웅산 수치의 정신적 가치 추구와 버마 국민들의 아웅산 수치에 대한 개인숭배가 그녀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는 데 핵심적인 기능을 했지만, 아웅산수치를 둘러싼 이런 현상들은 버마 정치 현대화에 장애가 된다는 점입니다. 비슷한 조건에서 대업을 이루어 낸 간디나 넬슨 만델라와 비교해 보면, 간디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노련한 정치가였고, 넬슨 만델라는 오랜 감옥생활중에서도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유능한 인재들이 투쟁을 이끌었고, 만델라가 사회에 나왔을 때에도 그의 정당은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웅산수치는 오랜 자택연금 때문에 정치적 역량을 발휘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연금기간에 NLD는 군부에 의해 와해되어 이름만 남은 정당이 되었습니다.

책은 이런 아웅산 수치의 약점을 지목하고 있지만, 그녀의 약점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 뿐, 존재의 부정을 말함은 아닙니다.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필요하며, 약점을 인식하고 개선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얀마는 오랜 시간 동안 독재를 유지해왔고 효과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지만, 민주화 운동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아웅산 수치가 이끌었던 NLD는 힘을 잃었지만, 새로운 민주화 세대가 등장했습니다. 88세대라 불리우는 이들은 전 세계 각지에서 투쟁을 지속하고 있으며, 이들 또한 아웅산 수치를 정신적 지도자로 받들고 있습니다. 1990년에 미얀마의 민주세력은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했음에도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해 군부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NLD의 정치적 역량 부족이 큰 원인이였습니다. 아웅산수치에게 필요한 건 고승들에게 지혜를 묻는 영적인 인물이라는 자화상이 아닌, 사회적 정치적 개혁가임을 입증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2007년 이 책이 나올 당시에는 여전히 군사정권이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저자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민주화의 열풍은 다시 미얀마에 찾아왔습니다. 민간정부가 출범했고, 2012년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는 다시 한번 선거에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하지만 아직 미얀마의 민주주의는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여전히 군부가 지원하는 여당의 세력이 막강하며, 오랜 독재시기 동안 사회 전반적으로 뿌리내린 군부의 영향력은 쉽게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얀마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미얀마 민주화를 이끈 아웅산 수치의 선택은 더욱 중요합니다. 저자가 제안하는, 아웅산 수치가 더 노련한 사회적, 정치적 개혁가로 변화해야 한다는 지적은 아직 유효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민주혁명의 동력은 아웅산수치에서 미얀마 시민의 이름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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