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대립에서_대화로
와다 하루키 지음, 임경택 옮김 / 사계절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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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와 나라 간의 영토분쟁은 낯선 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 독도를 가지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만, 이웃나라 일본은 독도 문제 외에도 러시아와 쿠릴 열도 문제, 중국과 센카쿠 열도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 대립구도는 전부 구조가 다릅니다. 일본이 인접한 국가들과 모두 영토분쟁을 가지고 있는 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혹은 냉전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자 와다 하루키는 이런 상황에서 4개국이 관련된 동북아시아 영토문제의 해결을 대립에서 대화로 변화하고자 하는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 간의 쿠릴열도 문제는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던 일본과 연합국의 일원인 소련은 대립구도상 전쟁을 벌여야 하는 관계였지만, 일본은 중국과 미국, 영국전에 신경써야 했고 소련은 독일전에 신경써야 했기 때문에 서로 건드리지 않는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은 소련측에 일본전에 참전해줄 것을 계속 요구했고, 소련은 얄타 회담을 계기로 대 일본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은 참전 조건으로 쿠릴 열도를 받기로 했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게 된 계기가 원자폭탄인지 소련의 참전인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결국 소련의 참전은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는데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결국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하면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게 됩니다. 이는 영토문제에 대해서 혼슈, 훗카이도, 규슈, 시코쿠로 일본의 주권이 한정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 밖의 작은 섬들에 대해선 연합국 결정에 따른다는 의미였습니다.

2001년 유엔 연간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100여 곳에서 해양경계선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해양경계선 문제는 아주 민감한 사안으로 이웃국가 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할 만큼 중대한 문제다 -《심해 전쟁》p.93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2조에서 러시아가 받게 될 쿠릴열도가 논의되었는데, 이 조약에서는 쿠릴열도에 대해 일반적으로 확정된 지리학적인 상식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소련은 쿠릴 열도는 북태평양의 22개 섬의 고리로 인식했으며, 일본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약이 비준된 뒤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포기한 쿠릴열도의 정의에 에토로후 섬과 구나시리 섬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궤변을 펼칩니다. 이러한 일본의 궤변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냉전이라는 현실 아래 미일관계에서 비롯된 산물이였습니다. 미 국무성은 1952년 쿠릴 열도의 하나인 하보마이 군도의 한 섬에서 격추된 미군기 사건에 대해 항의문을 보내고 배상을 요구하면서 일본과 소련의 교섭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미국은 이 항의문에서 평화조약과 얄타회담에서 말한 쿠릴열도에 하보마이 군도의 일부인 유리 섬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소련은 하보마이 군도를 놓고 일본의 주권 행사와 미국의 원조에 따른 방위 수행을 방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미국의 지지 하에 일본은 2도 반환설을 계속적으로 주장할 수 있게 됬습니다.

시간이 흘러 일본과 소련은 국교 정상화를 하고자 교섭을 하게 됬습니다. 이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 소련의 흐루시초프는 일본이 원하는 쿠릴열도의 2도를 넘겨주는 인도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냉전시대에 미국은 일본과 소련의 국교 정상화를 견제하고자 했고, 교섭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으로 하여금 4도 반환을 요구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맞춰 일본은 북방 4도는 쿠릴열도가 아니라 일본의 고유영토였으며, 이런 일본령이 된 4도를 제외한 18개 섬이 쿠릴 열도였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소련으로서는 4도 반환은 받아들일 수 없었고, 2도 인도안을 계속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흐루시초프에 이어서 러시아의 실권을 장악한 고르바초프, 옐친, 푸틴까지 평화협정의 조건으로 2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4도 반환을 요구했고, 일본 내부에서도 2도 인도안을 지지하는 국회의원을 반역자로 낙인찍으며 감옥에 가두는 등, 러시아 측에서 보면, 일본은 러시아와의 영토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독도문제 역시 2차 세계대전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에 주권국가라는 개념이 도입된 이후 한국과 일본의 국경 획정되었는데, 1876년 일본 내무성은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령이며 일본령이 아니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당시 독도는 망루를 세우고 무선 또는 해저 전신을 설치해 러시아의 발트 해 함대를 감시할 수 있는 유용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때문에 러일전쟁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일본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5년 뒤엔 경술국치가 일어나게 됩니다. 때문에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독도의 병합은 한반도 전역의 강제병합 전조이며 서곡임으로 인식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독도 관련 담화문에서도 나타납니다.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독도는 일본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가장 먼저 병탄되었던 우리 땅입니다. 일본이 러일전쟁 중에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편입하고 점령했던 땅입니다. (중략)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주권회복의 상징입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문제와 더불어 과거 역사에 대한 일본의 인식, 그리고 미래의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일본의 의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입니다. - 노무현 독도 담화문 中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의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는 1946년 SCAPIN 제 677호를 발표해 일본이 정치, 행정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역과 할 수 없는 지역을 지정했는데, 일본의 범위에 제외하는 지역으로 맨 처음 울릉도, 독도, 제주도를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1947년 대일 강화 준비를 위해 평화조약안을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조선 독립의 승인에 제주도와 거문도 및 울릉도를 분명히 언급했지만, 독도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 3도와 독도는 나란히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독도가 일본령이라고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이 참여하지 못한 이 회담에서 나타낸 미국의 애매한 입장태도는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고유영토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됬습니다. 분명히 확실한 것은, 독도는 일본이 1905년 이래로 40년간 이 섬을 영유했으며, 일본의 패전 이후 연합국군이 일본의 관리에서 제외했으며, 1954년부터 한국이 경비대를 보내 오늘날까지 실효지배를 계속하고 있다는 점이며, 한국의 실효지배는 해방 직후부터의 영유권 주장에 근거한다는 점입니다. 그 주장의 핵심은 1905년 1월 일본의 독도 영유는, 조선의 침략을 시작하면서 5년 후 강압적인 한국 병합의 전조로 행해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일본에서 이 주장을 논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주장에 따른 독도 지배는 한민족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절대 철회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한국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상의 상황을 생각하면 조선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는 일본으로서는,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이고, 한국의 지배는 불법 점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의라고는 전혀 없는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독도에 이어 한민족의 소중한 국토, 한반도를 불법 점령하여 자국의 영토로 삼아 버리고, 끝내 35년 뒤에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실효지배하는 독도에 대한 주권 주장을 일본이 단념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이룰 전망이 없는 주장을 계속해서 한일관계, 일본인과 한국인의 감정을 점점 더 악화시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 pp.264~265 

일본 외무성이 영토문제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고유영토'론은 한번도 외국의 영토가 된 적이 없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고유영토는 교섭의 용어가 아니라 싸움의 용어입니다. 레이코프가 지적했듯이, 고유영토란 언어에는 불법 점거, 불법 점령이라는 프레임이 들어 있으며, 최후 통첩적인 요구, 군사 행동을 불러올수도 있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일본의 극우파와 일본사회가 우경화되면서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저자는 이 논리가 허점투성이일 뿐만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일본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며, 당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일본의 전후 정치와 체제 모두를 다시 검토해야 하며, 영토문제의 논의에서 정신혁명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저자 와다 하루키는 한국과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서로 협력하고, 그 협력을 발판으로 북한과 중국이 민주주의로 나아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시작은 바로 영토문제를 대립에서 대화로 해결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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