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총구에서 나오지 않는다 - 인류는 전쟁 없는 세상을 꿈꿀 권리가 있다
아르노 그륀 지음, 조봉애 옮김 / 창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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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나 평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평화를 외치며 시위를 하는 청년들을 세상 물정을 아직 모른다고 평가합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싸워서 이겨야 하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이라는 관념 속에서 현실이 아닌 꿈에 사로잡히는 것은 해악이라고 여깁니다. 꿈을 꾸고 상상을 하는 행위는 많은 어른들을 볼안하게 만드는데, 어른들에게 있어서 꿈꾼다는 것은 일상적인 속박과 질서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질서는 생각과 창의적인 활동을 제한하기는 하지만, 불안 혹은 불확실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리적 억압은 다른 사람을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을 낳고, 이는 히틀러와 같은 재난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평화의 갈림길은 어린 시절에 있습니다. 서구문화권에서는 사랑 역시 소유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부모는 자식 역시 자신의 소유물 가운데 하나로 여겨 마음 내키는 대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녀 각자가 지닌 고유하고 독립적인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자발적으로 예절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부모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은 아이에게 스스로 경험하게 하고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고 자신이 어린 시절 경험하고 학습한 그대로를 아이에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부모가 직접 나서 결정짓고 행동에 옮기는 방식은 아이에게 잠재된 사회성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복종의 원리는 사회적으로 계속 전승됩니다. 아이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어른의 뜻에 굴복시키려는 양육 태도는 아이들의 내면에 무력감이 자라게 하며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느낌과 함께 심한 분노를 자리잡게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원인 제공자인 부모에게 분노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아이는 부모가 격분해서 자신에게 화내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아이는 자기 자신을 공격하거나, 대체로 약자로 여겨지는 제3자에게 분노를 터뜨립니다. 상처 입은 자아로 살아가고 스스로 열등하다는 의식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면 자기보다 약한 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서로 묶어주는 것, 말하자면 살인에 대항하는 제동장치로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공감의 기능이 어떤 상황에서는 왜 작동하지 않는가?  

자신의 정체성과 애정결핍으로 인해 전인적인 인간성을 갖추지 못한 아이들은 대부분 자라면서 정해진 규율에 순종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의 내면에는 잠재적으로 모든 생명체를 향해 분노하고 증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적당한 적을 만나면 그들의 잠복되어 있던 폭력성은 언제든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폭력이 강인한 남성적 영웅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러한 폭력의 이면에는 자기 자신의 본모습으로 살지 못하는 인간,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인정받지 못해 타인을 억압함으로써만 살아 있음을 느끼는 나약한 인간의 불안감이 있습니다. 많은 연구 결과 전시에도 무의미한 살상 명령에 불복종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에 참가했던 병사 중 80퍼센트는 전투 현장에서 총을 발사하지 않은 경험이 있다는 통계도 있는가 하면, 베트남전에서는 20퍼센트의 병사가 시민과 전쟁포로를 고문, 살해하는 일에 명령을 받고도 가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 반해 특수부대 가운데 하나인 그린베레는 냉철한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심리학자 데이비드 마크 멘텔은 그린베레 대원들과 참전 거부자들을 비교 연구한 결과 그린베레 대원들은 육체적으로 심한 폭력이 동원된, 유난히 권위적인 환경에서 자랐음을 밝혔습니다.

현대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인 경쟁과 대립은 우리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규정하고 있으며 공기처럼 통용되는 원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 불신, 불안 등을 발생시키며 자발적 고립과 다른사람과의 심리적인 거리두기라는 상황을 만들어 공동체의 단결을 더욱 방해합니다. 사회는 사람의 가치를 부와 권력, 명예와 지식 따위로 단정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때로는 사회적 상하 관계만으로 사람의 존재의의를 평가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외적 성공에 집착하게 하는 사회는 타인의 지속적인 관심과 열광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최신 스타일의 패션이나 브랜드에 집착하고 같은 언어코드를 공유함으로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따돌림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적으로 텅 빈 공간을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 하고, 심리적 위안을 얻습니다. 성공과 권위, 겉모습이 중요한 가치가 되면 정치인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권위에 복종하게 되고, 때론 히틀러와 같은 비극을 보여주게 됩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아무런 역할도 해내지 못한다. 부시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아주 완벽하고, 조화로우며, 포괄적인 태도를 보여줬지만 사실은 아무 역할도 기대할 수 없는 기묘한 견해를 내놓았다. 올랜도 체육관에서 그에게 환호했던 군중 앞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선택만이 놓여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사실들을 믿느냐, 아니면 모순되긴 하지만 명확하고 유쾌하게 느껴지는 세계관을 선택하느냐? 군중은 사실을 부정하기로 했다. - 마크 대너 

교육과 이성만으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부모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삶의 원초적 믿음을 확립하기 어려우며, 이는 민족말살과 대량학살과 같은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성취와 소유를 가장 중시하는 사회 구조에서 소유는 권력구조를 필요로 하고, 권력 구조는 부의 대물림을 통해 유지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심각한 정신적 왜곡을 가져오고, 이는 증오와 폭력의 원인으로 작동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부모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라왔어도 사회적 구조로 인해 받지 않아도 될 무시와 굴욕을 받고 성장하며, 이는 가난을 수치이자 게으름 탓으로 돌리는 문화의 사상이 사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더 테러리즘에 물들고 있고, 테러리즘이 낳는 적대감과 폭력은 또다시 증오와 폭력의 문화를 가속화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우리의 내면에 있는 왜곡된 심리와 맞서 싸울 때, 고유한 생명력을 얻고 진정한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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