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평화
존 놀스 지음, 신소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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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된 평화 - 존 놀스

 

누구에게든 특별히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역사의 한 순간이 있다.

 

서른이 넘어서도 여전히 미성숙된 정신연령을 가진 까닭에 청소년 문학은 매번 읽을 때 마다 한뼘 혹은 그 이상 내가 성장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상황만 달라질 뿐 10대에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고민의 한계가 크게 다르지 않아 국내현실과 동떨어지거나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어도 공감하는 데에는 큰 차이가 없다. 분리된 평화역시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만 주인공이 그 안에 깊숙하게 관련되었다 보기 어렵고 직접적인 적과 사건의 발생은 결국 자기자신과 친구와의 관계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1942년, 2차 대전이 진행되고 있던 그때 미국 뉴잉글랜드의 사립 기숙학교 데본을 배경으로 화자인 '나' 진 포레스터와 룸메이트 피니가 함께 했던 열여섯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성적도 좋고 규칙을 어길 깜냥이 안되는 진은 피니를 만나면서 일탈을 맛보게 된다. 전시중이라 당장 징집 될 상급반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는 학교 분위기는 그들의 일탈을 어느정도 눈감아 주어 원인이 전쟁인 것만 제외하면 보통의 자유로운 사립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적도 괜찮고 운동신경도 나쁘지 않은 진은 성적도 별로이고 오로지 운동신경과 화술이 발달한 피니에게 점점 경쟁심리와 질투를 느끼게 된다. 그 질투가 피니를 다치게 하면서 진과 피니는 서로에 대한 진실한 마음을 들여다 보게 된다.

 

운동을 잘할 뿐 아니라 데번에서 피니의 영향력은 같은 학생들 뿐 아니라 교사에게까지 미쳐 곤란한 상황에서 말도 안되는 변명과 핑계도 웃으며 넘긴다. 피니는 늘 거짓말과 변명을 달고 살았지만 정작 그의 마음속에는 그 어느것하나 거짓됨이 없기 때문이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은 것 그 자체였다. 수업은 싫지만 친구와 함께 있는 것이 좋은 그는 수업을 빼먹더라도 친구의 손을 붙잡고 신나게 즐길 줄 알았다. 몇년 째 신기록이 깨지지 않는 교내수영신기록을 가볍게 경신하지만 그에게는 승부욕이나 타인에게 내세우려는 허세스러움도 없다. 그저 그것을 할 수 있는지의 여부만 중요할 뿐이다. 반대로 진은 그렇지 못하다. 피니의 자신감과 솔직함을 좋아하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고 느끼면서도 마치 끌려가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바닷가는 자전고로 몇 시간이나 걸리는 데다 가는 게 금지되어 있어 완벽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거기에 간다면 퇴학당할 수도 있었고, 내일 아침 치러야 할 중요한 시험 준비도 완전히 망치는 셈이었으니, 나의 바람직하고 질서 정연한 생활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내가 정말 싫어하는 고된 장거리 자전거 주행을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나는 대답했다. "좋아."   p.49

 

피니가 자신을 비롯한 또래의 그 누구보다 특별하고 그럴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수록 진은 그에게 심한 질투를 느꼈다. 결정적으로 피니가 아무렇지 않게 경기에서 승리하고 스포츠방면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것이 노력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물인 것처럼 상대방도 그런 줄 알았다고 말할 때 진은 크게 좌절감을 맛본다. 비록 자신이 조금 더 부족할지라도 적어도 경쟁상대가 된다고 믿고 있었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아직 성장하지 않은 진이 피니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안타깝게도 많지 않다. 그를 절대적인 신처럼 떠받들거나 이런저런 핑계로 그를 완전하게 떠나는 것. 그리고 남은 한가지는 경쟁 자체가 성립할 수 없도록 둘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결국 진은 피니를 그렇게 만들어버린다. 피니의 완벽함과 순수함을 질투했던 것은 진 만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두번째 피니에게 상처를 준 것은 피니를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었다고 생각되었다. 그날의 사고를 제대로 바로잡고 싶다는 브링커와 아이들의 바람은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피니가 적응하고 있다는 것, 그런 피니 덕분에 역시나 제대로 자신의 삶에 안착하고 있는 진이 또다른 모습의 피니로 느껴진 것처럼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 브링커가 외쳤다. "우리는 아직 모든 걸 듣지 못했어. 진실을 모두 밝혀내지 못했다고!"

-중략-

"진실 따위는 너나 가져, 브링커!" 그가 소리쳤다. " 그놈의 진실은 너나 실컷 가지라고!" 나는 피니가 그렇게 소리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네가 이 세상 모든 진실이란 건 다 해먹으라고!"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p.207

 

​그날의 진실에 대해 명확하게 알고싶은 것은 주변사람이 아니라 정작 피니 본인이었다. 하지만 죄를 고백하는 진의 말투는 고백함으로써 자유로워지길 원하는 모습이었고, 사건의 주인공인 두사람이 덮고자 하는 사실을 억지로 파헤치려는 브링커를 보면서 더이상 진실이나 사실의 중요성이 피니에게는 무의미했다. 그저 자신이 믿고자 하는 진의 모습만이 사실이면 충분했다.

 

중간 중간 결말을 암시하는 복선 때문에 남은 50여페이지를 남겨두고 읽기를 잠시 멈췄었다. 10대 청소년들의 일탈과 우정을 다룬 작품은 짖꿎은 장난과 감히 해볼 수 없는 대리만족에 웃음이 가득하지만 결말은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는데 이 책 또한 그런 결말을 택했기에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다 읽지 않고 읽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끝을 읽지 않으면 애초에 줄거리만 읽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테니까.

 

"겨울도 날 좋아해." 피니가 대꾸하고는, 자신의 말이 뜬금없이 들린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내 말은 계절도 누군가를 좋아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겨울을 좋아하고, 누군가가 무엇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쪽에서도 그 사람을 좋아해주기 마련이야.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지."  p.129

 

피니의 말처럼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상대방이 그래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불안함도 두려움도 없어 행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우리는 피니처럼 그런 마음으로 상대를 좋아하지 않는다. 설사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게 되더라도 언젠가 그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늘 의심하고 스스로를 고통속에 밀어넣는다. 진은 다행히 그런 고통에서는 벗어났지만 자신의 삶에 가장 행복했던 시절과 소중한 이를 맞바꾸는 댓가를 치뤄야했다. 그게 두렵다면 의심없이 상대를 좋아하는 수 밖에 없다. 이 책을 누군가는 전쟁이라는 불우한 상황이 가져다 준 안타까운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라 말할지도 모른다. 혹은 열여섯 아이들이 친구를 통해 배워가는 내적성장이라 말할 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책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것인지를 알려준 책이라 말하고 싶다. 작가 혹은 역자와 출판사의 의도를 비켜간 것이라면 이 또한 분리된 평화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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