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위한 정의 - 번영하는 동물의 삶을 위한 우리 공동의 책임
마사 C. 누스바움 지음, 이영래 옮김, 최재천 감수 / 알레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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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너스바움의 <동물을 위한 정의>는 그동안 주류를 이루었던 ‘인간의 시선에서’ 정의된 동물이 아닌 ‘동물’을 위한 정의를 내리기 위한 시도이자 내용을 담고 있다. 아주 단순하게 동물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조차 동물도 ‘고통’을 느끼는 종이 있기 때문에 무자비한 포획 혹은 학살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동물원처럼 연구가 아닌 철저하게 인간의 ‘행복’을 위한 행위도 근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들을 추종해왔다. 간혹 동물원에서 재롱을 부리며 조련사와 함께 친분을 나누는 것을 보고 우정이라 말하고 어쩌면 ‘행복하게’사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마사 너스바움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감각의 일부분(쾌고감수능력)을 느낀다고 해서 존중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동물이 종과 상관없이 그들이 가진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역량 접근법을 주장한다. 소위 ‘내 자식은 내 눈에만 예쁘다’라는 명제는 비단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반려동물에게 끔찍한 사람들 조차 저 먼 바다에서 무자비한 포획이나 제대로된 제도와 정책이 없어 플라스틱을 먹고 아사해버린 동물에게는 관심이 없다. 또 영장류처럼 인간의 모습과 비슷하거나 진화론과 연계되어 있는 일부 종에게만 좀 더 연민을 갖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얼마전 서평을 적었던 <위대한 파리>의 저자 에리카 맥앨리스터의 말처럼 동물을 존중하기 이전 이미 척추동물과 무척추동물의 연구비중 부터도 큰 차이를 보인다. (종수로만 치면 후자가 훨씬 더 많다) 이 모든 것은 지배계층의 시선이자 자연의 사다리, 바로 생물의 가장 최상위층이 인간이라는 오만에서 비롯된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은 저자의 견해와 일부 일치하지만 극명하게 다른 몇 가지가 있다.

하지만 중요한 한 사안에 있어서는 밀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밀은 쾌락에 대한 벤담의 급진적 민주화 대신 “고결한 쾌락”과 “저열한 쾌락”을 구분하는 친숙한 빅토리아주의를 다시 도입했다. 더구나 동물을 예로 들어 “만족한 돼지”라는 말로 이를 설명했다. 신체적 쾌락에 대해 밀에게 남아 있는 청교도적 잔재는 다른 동물과의 동류의식에 대한 올바른 사상을 세우고 그런 동류의식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107쪽

본질적으로 역량 접근법은 노력하는 생물에게 번영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다. 역량 접근법 이론가에게 번영할 기회란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후 우리가 역량 목록에서 만나게 될 긍정적인 기회의 목록, 즉 건강을 누리고, 신체 완전성을 보호하고, 감각과 상상력을 개발하고 발휘할 수 있으며, 삶을 계획할 가능성을 가지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고, 놀고 쾌락을 즐기고, 다른 종 및 자연계와 관계를 맺고, 자신을 주요한 방식을 통제할 수 있는 긍정적인 기회의 목록을 의미한다. 143쪽

동물원과 테마파크는 관람객과 조련사 모두를 동물의 온전한 삶의 형태에 무지하게 만드는 데 열중한다. 따라서 관객과 조련사는 동물원 환경이 얼마나 피폐하고 불우한지 알아보지 못한채 우정이라는 환상에 빠져든다. 393쪽

위의 발췌문만 보더라도 단순하게 동물의 권리가 고통없이 덜 죽이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국제포경규제협약에서 잔인한 포경을 금지하는 것에 순응하지 않고 사회적 규약을 넘어 ‘고유 문화‘라며 예외를 두는 경우도 있다. 이를 두고 저자는 ’문화‘라는 개념 자체의 정의도 제시(283쪽)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너무나 당연했던 동물 존중, 인간 존중을 위한 근거가 부족했던 이들, 여전히 차별적 존중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꼭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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