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필립 K. 딕 지음, 권도희 외 옮김 / 집사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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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항상 소수(마이너)보다 다수(메이저)쪽에 속해있던 게 익숙했던 내가 볼 때 소수의 사람들은 항상 빛나보였다. 하지만 나이를 먹곤 이따금씩은 소수가 될 때도 있었는데 실제로 그때의 나는 스스로가 (빛나는)소수란 생각을 하진 않았었다. 결국 교단의 교사와 학생이나 공연장의 가수와 관객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표제작의 대문자는 결국 마이너가 모여 메이저가 된다는(혹은 메이저는 마이너로 나눌 수 있다)아주 단순한 역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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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나의 집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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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책을 네 권? 세 권?쯤 읽어 봤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별로 안 좋아하던 차에 신문에서(신문이 아닌가? 사실 잘 기억 안 난다. 무튼 신문이라 치고) 연재하던 이 소설의 자투리와 공지영의 결혼과 이혼같은 기사를 대충 읽었더랬다. 나도 그저 그런 사람이다보니 소설 자체보다 가십거리에 더 눈이 갔고, 전엔 몰랐던 사실이라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원숭이를 보는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가 금새 잊어버렸었다. 그러다 기현이에게 이 책이 있는 걸 보곤 그때 생각이 나서 빌렸다.

내가 공지영을 싫어했던 이유는 초기작의 경우 후일담문학이란 점에서 우선이었다.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운(혹은 무지한) 우리 세대에겐 그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전무하다. 타인의 트라우마는 자신에게 적용되지 못한다. 공지영의 후일담문학은 우리세대에게(적어도 나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다. 아무런 흥미도 없다보니 책을 읽는 순간에도 그 순간을 전부 즐기지 못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이유는 '우행시'속에서 본 수박 겉핥기식 성찰이 그것이었다. 후일담은 버렸으나 특유의 인위적이고 조악한 네러티브의 구성은 정말 어떠간 공감도, 감동도 없었고 그저 급히 책을 덮고 싶은 뜨악함만을 가지게 해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최악의 책 속에 있던 어떠한 설명하고 인정하기 힘든 '진심'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는데 당시의 나는 그것을 하나의 희망으로 인정하기 보다는 일종의 변이로 이해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그 '진심'이 이 작품을 뿌리내리고 꽃피우게 한 씨앗이 아니었을런지.

장황한 설명은 잠시 옆에 치워두고 즐거운 나의 집에 대한 감상을 우선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정말 좋았다. 결혼과 이혼의 연속이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내가 싫어하던 네러티브의 결점은 사라졌고 책은 전체적으로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서술자는(주인공이라 쓰려다 그 표현을 쓰지 않는 건 이 소설의 주인공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공지영의 맏딸 19세의 위녕이다. 위녕이 이혼한 아버지 밑에서 살다 엄마와 살기를 선언하고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며 이 소설은 시작되는데 공지영은 위녕의 19세란 나이와 복잡한 가족관계와 그리고 공지영 자신의 삶을 빌미삼아 참 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혹은 독자에게) 던진다. 이 소설은 결국 그 많은 질문들과 내오지 않는 답을 말하려 애쓰는 과정의 서술이다. 사실 읽으면서 대체 어디까지가 진짜 '사실'이고 어디에서부터가 작가의 '공상'인지 상당히 궁금했고 아마 다른 사람들도 그러할 터인데 작가는 이것에 대해 이또한 하나의 쓰기일 뿐(작가의 말)이라며 담담히 대꾸할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내용이 공지영의 손 끝에서 나온 바 나는 모든 서술을 사실로 받아들이려 한다. 모든 사건을 사실로 믿는다는 뜻이 아닌 공지영 생각의 진솔함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죄다 실제 사람이니만큼 그녀는 문장, 단어 하나에도 그들을 생각하며 쓰지 않을 수 없었을테고 그런 만큼 진솔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이건 곧 나 또한 그녀의 작가의 말에 대해 동조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엔 적어도 그녀의 작품은 차치하더라도 작가의 말에 대해선 시비를 걸 생각은 없다.

전에 공지영을 읽지 않았던 사람보다 전에 읽었던 사람들에게 우선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전에 그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던 그 생각들은 어떤 의미로든 바뀌게 될 것이다. 일테면 착하게 살아야 한단 빤한 말들 빤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실제로 착하게 사는 것뿐이다. 공지영의 이번 한 권의 말들은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큰 의미를 갖는다. 이따위 뜬구름잡는 감상문 몇 줄보다 '즐거운 나의 집'한 권을 읽으며 각자 사유의 무게를 견뎌보자.

나는, 정말, 좋더라.

 

사족.우선은 칭찬일색이고 싶었다. 한번 더 읽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딴죽 걸기는 다음 번 기회로 미룬다. 읽든, 그렇지 않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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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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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SF/팬터지적 공상에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마치 작가가 자신의 좌/우뇌에 각각의 인격을 부여해 말다툼을 시키듯 진행된다. 이성적이지만 불안하고 미숙한 좌뇌와 감성적이고 감정적이지만 공격적인 우뇌의 공방은 한 작가가 쓴 대화답게 치밀하고도 연쇄적으로 서로에게 잽을 날려댄다. 하지만 그런 치열한 관념과 이론의 대립의 연속인만큼 네러티브가 부재(좀 더 까다롭게 말하자면 부재에 '가깝다')한다. 이야기에 점성이 없다보니 독자의 흥미는 쉽게 떨어져 나가고 공감의 측면에서도 상당히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 이따금씩 흥미로운 소재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소설을 보는 이유는 인문학적 지식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철학적, 타 학문적 소재를 소설에 인용해 소설의 깊이와 넓이를 깊고 넓게, 풍부하게 하는 것은 응당 찬사받을 일일지라도 그것이 네러티브를 대신할 순 없다. 그렇기에 마지막에 주창하는 작가의 말-이 이야기는 누가 뭐래도 실화다-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해 독자와의 게임이라거나 신빙성을 주기는 커녕 '개소리'만한 의미도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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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첵 필립 K. 딕의 SF걸작선 4
필립 K. 딕 지음, 김소연 옮김 / 집사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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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리티 리포트,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자인 필립 k.딕을 읽었다. 독서가로서 SF와 팬터지같은 선입견 가득한 장르문학을 읽는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선입견이 생긴 것은 홍수와 같은 허섭쓰레기 인터넷 팬터지 소설의 경쟁 출판이 아마 가장 큰 원인인 것 같은데, 그 덕에 모든 장르문학에까지(추리,공포,로맨스,팬터지,SF)지배적인 편견이 자리잡아버렸다. 중요한 건 소재가 아니라 주제와 메시지인데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겉모습 이상의 판단을 하지 않을정도로 그 선입견은 너무 커졌다.

하지만 넓게 보자면 최근 각광받는 베르베르, 파울로 코엘료, 댄 브라운, 파트리크 쥐스킨트, 아멜리 노통브 등의 대중문학들도 일부 장르문학적 요소를 '대놓고' 작품 전반에 설치하기도 하며 많은 순문학 작가들 작품 속에 장치로 쓰이는 환상신들은(최근 읽은 소설에서 보자면 바리데기 속 무속신앙이라던가 라우라 아스키벨, 이사벨 아옌데 등 라틴문학 전반에 깔려 있는 환상성 따위) 이젠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런 것을 포함해서 생각해보면 문학 자체로 순수/장르 따위로 나누는 일 자체가 굉장히 바보같은 짓으로 느껴진다. 더 이상 SF나 팬터지를 좋아하는 사실이 부끄럽거나 감춰야 할 음지의 취미인 것은 아닌 것이다.

필립 k.딕의 작품은 하나의 잘 빠진 디지털기기를 보는 듯하다. 매끄러운 디자인에 다루기 편하고 기능도 만족스런 그런 것들 말이다. 아주 매끄러운 네러티브와 적절한 소재와 주제의 조화, 군더더기 없는 문체따위 말이다. 하지만 SF의 초 중기 발전단계의 전형적 작가의 소설인만큼 그 이상의 뚜렷한 개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당시엔 선구적인 소설이었겠고, 최근의 개성 뚜렷한 작가들이 그의 영향력 아래 발전했을 걸 생각해보자면 큰 의미가 있겠지만, 하지만 어차피 결국 중요한 것은 현대의 독자가가 아닐까. 그런 점에서 SF의 훌륭한 고전 이상의 의미론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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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손안에 넣기 - 미술가, 딜러, 경매 하우스, 그리고 컬렉터들의 숨은 이야기
리처드 폴스키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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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팝아트를 쓰레기라고 생각하던 나지만 앤디 워홀만큼은 꽤 좋아하고 있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와의 연관성 이라던가 그가 생전에 내뱉었던 말들은 나를 꽤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고 그의 작품들 또한 나에게 큰 감흥을 주었었다. 이 책은 미술품 개인 딜러인 작가의 미술품 거래에 대한 이야기이며 앤디 워홀(의 작품)을 '소유'하기 위한 고군분투기이다. 평소 생소했지만 약간의 관심은 있었던 미술품 거래의 세계를 책은 상당히 재미있게 이야기해주는데, 작가는 앤디 워홀의 작품을 항상 하나 정도는 꼭 갖고 싶어했고 이따금씩 그의 작품들과 인연이 닿기도 했는데 대개는 헛탕을 쳤다. 그리고 그런 시행착오 끝에 앤디 워홀을 작품 몇 점을 손에 넣기도 하고 다시 되팔기도 하는데, 그런 과정을 자세히 서술함으로써 단지 앤디 워홀뿐 아니라 미술품 거래의 세계를 가깝게 말해준다.

나도 반 고흐에 빠졌던 시절엔 반 고흐의 작품을 (아주 마이너한 것이라도, 사실 나는 그의 소품같은 크로키들을 꽤 좋아한다)한 두 점쯤은 돈을 모아서 소유하고 싶어했는데, 이 책에 나온 것을 보면 반 고흐 작품의 최고 경매가는 875억 이라고 한다(...).

무튼 그 미술품 경매의 세계는 조금 생소하지만 상당히 재미있으며 이의 대부분은 작가의 경쾌한 필력에 빛지고 있는데, 다만 미술이나 팝아트 중 하나라도 관심이 없다면 이 책은 정말 지루하게 느껴질 것이리라. 결국 이 작품은 앤디워홀 손 안에 넣(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을 말하)기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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