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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ㅣ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정에 의해 독후감은 1월 말 이후에 올리겠음.
대신 부록으로 2010 결산
B(44)
세월이 갈수록 읽는 게 줄어들어 걱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산 할지 여부에 대해 고민을 했지만, 간단히 적어둔다. 운이 좋다면 두어 권 쯤 더 읽고 올해가 마무리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올해 출간된 책이 아닌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고른 것이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정유정
완득이도 영화화 되니까 이 책도 빨리. 예상하시겠지만 여기서 책을 꼽는 순서는 단지 책을 읽은 순서다.
로큰롤 보이즈-미카엘 니에미
특별히 읽은 책들의 리스트를 보지 않고도 단번에 떠올린 2010 올해의 책.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눈의 여행자-윤대녕
내 맘의 스테디셀러 윤대녕. 연초마다 두어권씩 꼭 읽는다. 내년에도 아마. 작년에 몇 권 읽은 그의 작품들 중 저 두 작품을 놓고 고민하다가 하나를 도무지 고를 수 없어 두 권을 다 적어 놓는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레이먼드 카버
잊을 수 없을 문장.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밤은 노래한다-김연수
나에게 김연수는 항상, 읽기 힘들기 때문에 쉽게 책을 빌릴 수 없는 작가다.
A-하성란
어중간하게 6권을 꼽고 싶진 않았지만, 하성란의 완벽한 부활.
(+)2권까지 읽었을 때만해도 1q84는 강력한 올해의 소설이었지만 3권을 읽는 순간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외에도 미학 오디세이, 변신이야기, 침묵하는 소수, 구월의 이틀 정도는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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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성철 스님이 던졌다는 저 유명한 화두를 생각해보자. 처음에 스님은 도를 향한 공부 끝에 나름의 깨달음을 얻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다고 하나, 공부를 보다 깊이 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깨쳤다고 한다. 스님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다시 더욱 깊은 공부를 했고,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최후의 깨달음을 얻어낸다. 처음 얻은 깨달음과 고민 끝에 얻어 낸 깨달음이 결국 같은 것이었다는 이 말장난 같은 얘기는, 그렇지만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을 생각 할 거리가 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얻게 된 이 선문답 같은 결론이 어떤 의미를 가졌든, 처음의 ‘산은 산, 물은 물’은 결코 마지막의 ‘산은 산, 물은 물’과 같은 깨달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 <미학 오디세이>는 구석기인들의 동굴 벽화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연히 발견된 그 구석기 시대 벽화의 사실적인 표현법에 의한 정밀한 그림은, 현대인의 눈으론 철저한 위작으로만 생각된다. ‘예술사에서 이 정도의 표현을 찾아보려면 한참이나 뒤로 내려와야’ 했고, ‘인류 최초의 예술이 탄생하자마자 이처럼 단번에 생생한 자연주의적 묘사 수준에 도달했다는 건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고, ‘뒷날의 개화된 인간들도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선 수천 년에 걸친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17~8p)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신비한 현상의 타당성을 다양한 그림 자료들을 통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나간다. 그에 따르면 구석기인들은 ‘개념적 사유가 시지각을 지배할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19p) 하지만 인류는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며 정착생활과 농경을 하기 시작한다. 농경은 인간에게 추상 능력을 요구했다. 자연 현상에 대한 추상은 그들에게 있어 어떠한 ‘개념’을 자리 잡게 한다. 그 개념은 이제 구석기인들이 가졌던 ‘벌거벗은 눈’(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게 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한다. ‘그들의 눈은 점점 더 개념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럴수록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아는 대로’묘사하게’ 된다.(21p)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예술이 멈춰버렸던 것은 아니다. 얼마간의 시간이(엄청난 세월이겠지만) 흐른 뒤 인류는 다시 사실적인 표현법에 의해 대상을 그려낼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구석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사실적인 표현법에 의해 들소를 그렸다고 한들 그 두 그림이 같을 수는 없다. 처음의 ‘산은 산’과 마지막의 ‘산은 산’은 같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예술사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에 심취해 일어났던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싹튼다. 이성과 정전(카논), 완결된 형식에 대해 질렸던 사람들은, 감성과 자유로움을 찾는다. 예술의 중심엔 더 이상 신이 아닌 인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낭만주의 또한 영원한 힘을 발휘하진 못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 한계를 느낀 사람들은 다시 그 왕좌에 신을 끌어다 앉힌다. 고전주의는 다시금 주체의 자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고전주의가 처음의 고전주의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른바 신고전주의의 대두다. 이 또한 ‘산은 산, 물은 물’의 과정이었던 것인데, 역시 그것도 처음과 같은 산과 물일 수는 없다.
2.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저자 진중권은 현재 진보주의 논객으로 가장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으며 그 외에도 교수, 작가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그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자신의 전공인 ‘미학’에 대한 첫 출간작이다. 저자 자신이 학사부터 석사까지 전공했던 미학 전반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이 가진 가치의 부피와 질량은 의심의 여지없이 만족스럽다. 여기에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현대고전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 명성을 더한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인 <미학 오디세이>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미학’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미의식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하자면, 미의식은 곧 아름다움을 느끼는 의식구조로 풀어 쓸 수 있다. 결국 미학이란 사람은 왜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보고 아름다운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하지 못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쓰여 진 책이다.
제목의 뒷부분인 ‘오디세이’는 잘 알려져 있다 시피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머’가 쓴 작품의 제목으로,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이후 귀향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온 다른 많은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오디세이’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넘어 어떤 긴 방랑이나 모험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된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은 사람이 미의식을 느끼는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려 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시대에 따라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에 대한 저마다의 기준과 이유를 밝히려는 여정을 뜻한다. 흔히 아름다움의 기준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 또한 왕조가 바뀌듯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져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미에 대한 기준이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변하는 것은 아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는 결코 진리일 수 없다.
이 책의 가장 앞머리에 쓰여져 있던 문장처럼 태초부터 아름다움은 존재하고 있었다지만, 사람들이 각자 찾아냈던 아름다움은 저마다가 달랐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피카소의 그림과 이발소에 걸린 그림 이야기, 책 전반에 걸쳐 나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아름다움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의 커다란 주장을 읽는다. 이 두 주장의 요지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들도 쉽게 생각해 봤을 객관과 주관의 문제다. 본문으로 돌아가자.
책 말미에 저자는 유클리드와 ‘피카소의 작품과 저 이발소 그림 가운데 어느 게 더 훌륭한 작품’인가에 대한 가상의 대화를 한다.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발소 그림이 더 뛰어난 것일까, 아니라면 ‘당연히’ 피카소의 것이 더 뛰어난 것일까. 피카소를 비롯한 현대미술을 보면서 난해함을 한 번이라도 느꼈던 사람이라면 그 질문은 피부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끊임없는 질문에 재 질문을 통해 논조를 키워간다. ‘취미에 관한 한 논쟁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 유클리드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면 굳이 예술이란 게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으로 맞선다. ‘창작의 자유를 누리면 뭐하나. 어느 게 예술이고 어느 게 사긴지 구별조차 안 된다면’.
‘칸트처럼 공통감이란 게 있다고’ 가정한다면 미의 객관적 기준이 생기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저자에게 다시 유클리드는 ‘공통감이 있는데, 왜 사람마다 미적 판단이 달라’지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저자는 대답하지 못한다.
저자는 결국 다소 미진한 태도로 그 중간의 타협점에서 글을 맺는다. ‘미는 혹시 주관과 객관 모두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주관과 객관이 만나서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고전주의에서 말하는 미의 규준’과(객관성) ‘현대예술이 누리는 창작의 자유’(주관성)를 동시에 살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이야기한다. 객관과 주관이라는 두 주장이 시대가 바뀌며 여러 가지 이름들과 그 세부 이론의 미묘한 차이들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지만, 그 둘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에셔의 판화 중 하나인 ‘원의 극한(천국과 지옥)’이라는 작품 속의 악마와 천사를 통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157p) 빛은 어둠으로 인해서 비로소 완전해진다. 둘은 서로가 합쳐져 하나가 된다.
그렇지만 분명히 이 결론에 대해 명쾌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 결론이 책의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인 것인가 객관적인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아름다움은 주관적이기도 하며 객관적이기도 하다는 대답은 극히 동어 반복적이다.
3.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지만 그 동어반복적인 결론은 명쾌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충분한 기분이 든다. 처음의 ‘산은 산’과, ‘산은 산이 아닌’과정을 통해 재 도출 된 ‘산은 산’은 결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저자가 저 상반된 두 주장을 책 전반에 걸쳐 소개하고, 의문을 던지는 대신 어느 한 쪽 주장에 대해 편을 들어 독자를 설득하려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랬을 경우 물론 어떤 독자들에게는 충분한 만족감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독자들에게는 불만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산은 산, 물은 물’을 알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의 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도 물론 그러한 의문의 제기에 페이지 전반을 할애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르케익과 콘트라포스토,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상반되는 여러 미학적 이론을 소개하면서도 작가는 그 둘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은 나름의 타당성이 있으며, 각자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미온한 태도로, 결국 아름다움엔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이 있는 것이라 결론 내리는 모습도 그리 밉지만은 않다.
극심한 사상적 대립이 있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서로에게 어떠한 종류의 분명한 선택을 하길 강요한다. 왼쪽의 반대는 오른쪽이고, 좋은 것의 반대는 싫은 것이며 그 둘 중 하나를 택하고 나머지를 배척하길 요구한다. 내 편이 아닌 당신은 적일뿐이다. 그 사이에서 <미학 오디세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이상의, 사상을 넘어서는 자유의 선택지를 늘려준다. 세상을 보는 제 3의 눈을 준다. 그렇게 열려진 마음의 창으로 본 물은 물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닐 수도 있으며, 나의 오른쪽은 마주 선 당신의 왼쪽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