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과 불의 노래 1부 - 왕좌의 게임 3 얼음과 불의 노래 1
조지 R. R. 마틴 지음, 서계인 외 옮김 / 은행나무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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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매력적인 이 소설의 특징은 작가가 특정 작중 인물 한 둘에게만 감정을 쏟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꼭 선인(으로 보인다고)이라고 해서 승리하고 명예를 쟁취하는 것도 아니며, 악인이라고 해서 심판받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때로는 캐릭터들에게 너무 가혹해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참고 읽다보면 작품 속의 말처럼 그건 모두 '신의 뜻'일 뿐이다. 그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는 이야기의 흡입력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작가가 좋아한다는 티리온이라는 인물도 아주 재미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존 스노우와 대너리스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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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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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시 감상은 사정상 나중에.

다음 읽을 책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트리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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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을 맞아 세계문학전집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장정일의 소설 <구월의 이틀>속 한 문장과 무관하지 않았다. ‘호기심 가는 것부터 빼 읽기 시작하면 결국 나머지는 다 못 읽게 되는 게 전집’이라는 구절을 읽었을 때부터 나는 그 말에 완벽히 공감했다. 나 또한 이전까지 세계문학전집류에 관심을 갖고 이따금씩 그것들 중 몇몇 권을 읽어오긴 했지만, 그것을 전부 읽는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지 못했었다. 이유는 장정일의 문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우선 그 방대한 분량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었고, 다음으로는 세계문학전집을 구성하고 있는 책들이 전부 흥미로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지적 허영에서 나온 일종의 도전심리로, 나는 지난 11월 말부터 세계문학전집을 몇 권까지가 됐든 1권부터 차근히 읽어보기로 결심하였다. 시중에는 다양한 전집류가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특유의 길쭉하고 예쁜 책 판본과 도서의 구성에 대해 호감을 느끼고 있던 ‘민음사’의 판으로 세계문학전집을 선택하여 1권부터 빌려 읽기 시작하였다. <암흑의 핵심>은 바로 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7번째 출간 작품이다.



시작과 끝 부분에만 잠깐 등장하는 서술자 ‘나’가 듣게 되는 말로의 이야기를 일종의 액자소설 같은 형식으로 구성한 이 작품은, 선원 말로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모험 이야기를 하는데서 시작된다. ‘인도양이니 태평양이니 중국해니 하는 곳을 실컷 돌아다니다가 막 런던으로 돌아’온 말로는 ‘뭍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실증이 나’기 시작해 ‘다시 취업할 배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17p)

말로는 어린 시절부터 지도상에 표기되지 않은 미 탐험지역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선원이 되어 여러 나라와 바다를 돌아다니게 된 것인데, 일자리를 찾던 그의 눈에 아직도 지도 속에 공백으로 처리된 지역이 눈에 띈다. 아프리카의 콩고다. 말로는 숙모 한 분의 도움을 받아 콩고에서 원주민들에게 살해 된 선장의 대신 할 사람을 찾는다는 회사로 찾아가게 된다.



작가의 삶을 반추해 봤을 때, 그 자신의 분신임이 분명한 작품의 화자 ‘말로’가 해주는 모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200여 페이지가 넘지 않는 많지 않은 분량에 비해 그리 읽기 쉬운 작품만은 아니다. ‘나’가 말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말로의 서술은 자연스럽게 대화체로 이루어지는데, 그 일인칭의 대화 투는 문어적인 문체에만 익숙해져 있던 독자들에게 다소간의 생소함으로 다가온다. 여기에 뚜렷한 네러티브나 플롯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작품의 구조 또한 혼란스럽다. 소설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이야기는 부재하고 그 사이엔 철저히 선원의 기록과 같은 건조한 줄거리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갖는 문학적인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읽기 힘들었던 이 책을 읽어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단순한 곤욕스러움이 아닌, 일종의 섬뜩함과 의문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렇다. 말로의 탐험 속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되던 당시 아프리카의 모습, 혹은 커츠의 죽음과 같은 풍경은 책을 읽은 뒤에도 여운이 강하게 남는다. 아마도 이는 이 소설이 가진 특유의 암울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가장 큰 영향을 준 듯한데, 그것이 집약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말로가 커츠를 만나게 되고 또 그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는 장면에서다.



항해를 통해 콩고에 도착하게 된 말로는, 콩고에서 자신이 일하게 된 모회사의 대행점을 맡아 경영하는 커츠라는 인물을 찾아 ‘검은 대륙의 중심’을 향해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천신만고 끝에 커츠를 마주하게 된 말로지만, 커츠는 처음 아프리카로 건너올 때 ‘국제야만풍습억제협회’라는 단체를 위해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위엄있는 선의를 가지고 그 거대한 이국적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 그와는 달랐다.(113p) 말로가 마주했던 커츠는 상아(돈)에 미쳐있던 편집증 환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보고서에는 ‘모든 야만인들을 말살하라!’고 가필되어 있었고, 아마 그 보고서에 가필을 하게 되는 과정 사이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114p)

말로를 통해 암시되는 커츠의 삶의 과정 덕분에, 커츠가 죽음을 맞게 되는 장면에서 마지막으로 뱉은 ‘무서워라! 무서워라!’라는 말은 다양한 해석을 암시한다. 자신의 지난 삶을 반성하는 후회나 회한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인지, 혹은 억울함과 안타까움을 담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한 죽음의 공포를 담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로와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158p) 그리고 이 마지막 말을 포함한 작품 내의 여러 가지 은유를 생각하는 동시에 언어와 번역의 문제도 생각하게 됐다.



조셉 콘래드는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 귀화해 영어로 작품을 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스무 살이 다 되어서 배우기 시작한 타국의 언어로 작품을 썼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작품이 이렇게 세월이 흘러도 잊혀 지지 않는 고전이 된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오랜 세월 간 읽혀온 만큼 이 책은 다양한 역자에 의해 다양한 번역으로 출간되어 왔다. 번역상의 차이에 대한 흥미가 생겨서 이 책의 다양한 판본을 모아 읽어 보았다.

그래서 기본 골조로 삼고 선택한 판본인 민음사의 것을 기준으로 하여, 역자가 다른 몇 권의 책을 비교해 보았다. 물론 이들은 같은 소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판본이 다르더라도, 이야기의 전개상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어느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우선, 제목만 살펴보더라도 민음사의 것은 <암흑의 핵심>이지만, 나영균 역의 자유교양사판 1989년 출간본은 <어둠의 속>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2006년 발간된 북피아판에도 동일한데, 이유는 번역가가 같기 때문일 것이다. 출판사를 바꾸고 어느 정도로 오역이나 오, 탈자를 바로잡은 후 재출간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석구 역의 을유문화사판 2008년 출간본의 경우는 이들과는 또 다르게 <어둠의 심연>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마지막으로 1982년 삼성출판사의 장왕록 역의 경우도 <암흑의 오지>라는 제 4의 제목으로 출간된다.



원제가 <Heart of Darkness>인 것을 생각하면 이 모두는 각자 나름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들 중 어느 제목을 취할 것인가에 따라 작품이 궁극적으로 갖는 의미가 달라진다. 제목은 작품의 내용과 주제를 가장 단적으로 암시하는 중요한 일을 담당한다. 원제의 'heart'가 갖는 의미는 여럿이다. 가장 첫째 의미로는 말로가 가고 싶어 했던 지도상의 검은 부분일 것이고, 그 다음의 의미로는 이 작품을 가장 보편적으로 분석해왔던 것인 말로를 통해 보여지는 제국주의라는 ‘암흑’의 진실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관점으로는 커츠로 표현되는 인간 내면의 알 수 없는 본성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번역판의 제목들도 각자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세 번역판 제목의 경우는 나름대로의 타당성과 함께 원제가 갖는 의미를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마지막 제목의 경우는 첫 번째 의미만을 강조하고 후자의 의미들을 포함할 수 없어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제목 외에도 얼마간의 번역상의 차이는 보이지만, 그 중에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커츠가 남기는 마지막 말일 것이다. 앞서도 민음사 판에서는 ‘무서워라! 무서워라!’라는 말을 남기며 커츠가 죽었다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원래 ‘The horror! The horror!’라는 문장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을 나영균은 1989년 판에서는 ‘끔찍스럽다! 끔찍스러워!’라고 했지만, 2006년 판에서는 그것을 ‘끔찍하다! 끔찍해!’로 정정한다. 이석구 또한 나영균의 2006년판과 동일하게 ‘끔찍하다! 끔찍해!’로 번역하였으나, 장왕록은 이들과는 또 다르게 ‘지옥이다! 지옥이다!’라고 번역한다.

제목과 마찬가지로 커츠의 마지막 외침은 다양한 목소리로 읽힌다. 번역의 문제를 꺼낸 것은 이 때문이다. ‘The horror! The horror!’ 라는 문장을 저렇게 다양한 형태로 번역해 낸 것은 아마 번역가 각자가 느꼈던 커츠의 최후에 대한 의견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같은 문장을 다양하게 번역하고, 또 그 의미가 미묘하게나마 다르게 변하는 것에 있어서 사람들은 번역이라는 것의 한계를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한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번역가는 곧 창작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번역의 과정을 통해 독자에게 가능한 원작과 가장 가까운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 번역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해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선택된 단어들은 다 각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번역이 가진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고 또 오래전부터 논쟁이 되어왔던 소재는 역시 콘래드가 바라보는 제국주의에 대한 것일 거다. 내가 참조한 다섯 권의 책의 해설이나 역자 후기에도 역시 그러한 관점을 통해 작품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랬기 때문인지 나는 이 소설을 제국주의를 중심에 놓고 보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려는 시도 속에는, 그 ‘인증된’ 세계문학들을 다시 내가 가진 눈으로 바라보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어도 그것이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코 나에게 있어 좋은 작품은 아닌 것이다. 물론 나도 이 작품을 보면서 콘래드가 말로의 입을 통해 삽화식으로 제시한 제국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커츠라는 인물의 삶과 죽음 속에 더 큰 의미를 찾았다.

우리 대학에서 선정한 100권이나 되는 인문학 권장도서들도 이미 ‘인증된’ 말할 것 없는 훌륭한 책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이미 익숙해진 독법에 의해 읽고 느끼기만 한다면, 그것도 결코 그 책들을 읽는 바람직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남들이 느꼈던 백 가지보다 내가 느낀 한 가지가 더 소중하고 마음에 와 닿는다.

번역가들이 각자 번역하면서 얻은 깨달음들로 각자의 단어를 선택했듯이, 나도 남들이 느낀 것이 아닌 내가 느낀 것들을 더 소중하고 가치 있게 생각해야 한다. 전문가들을 통해서 나온 잘 다듬은 문장이나 날카로운 시선이 아닌, 비루하고 좁은 나의 글과 시야라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나의 단어와 말들을 찾아서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제야 내가 읽은 좋은 책들이 비로소 내 것이 되며 진정한 의미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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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의 게임 2 - 얼음과 불의 노래 1부
조지 R. R. 마틴 지음, 서계인 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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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나누는 여러 가지의 기준이 있겠지만 이렇게 둘로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네러티브가 중심에 있느냐, 아니냐. 물론 모든 작품엔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이 아니다. 하지만 네러티브에의 집중 정도에 따라 작품을 구별 할 수도 있다.

장르문학이 욕 먹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네러티브에 모든 것을 쏟아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로지 흥미만을 위해 소설을 쓴다던가 하는 식의 비판을 받는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이야기만큼 우리의 흥미를 끄는 책들도 없을 거라고.

열람실 사이의 책장을 어슬렁 거리다가 이 책들을 봤다. 과거에 한 번 읽으려고 시도했던 기억이 나는데 분량의 방대함에 질려 지레 포기했었다. 하지만 요즘 세계문학전집을 비롯해 이런 저런 무겁고 밀도 높은 책들을 읽으려고 하니까 너무 힘들었다. 독서 자체를 즐기는 순간이 그리워져서 별 생각하지 않고 빌려서 단숨에 2권까지 읽었다.

단지 세계가 작가가 꾸며낸 것이라 허황된다고 장르문학을 비판하는 것은 절대 옳지 못하다. 오로지 작품 내에서 나름의 개연성을 가지고 이야기가 끌려간다면 그것은 이미 훌륭한 문학이다. 이른바 마술적 리얼리즘이다. 거기에 더해 재미까지 있다면 금상첨화리라. 뭐, 그걸 떠나서 로마인들은 취미는 판단할 수 없는 거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책, 마음에 드는 책은 읽으면 그만이고, 그렇지 않은 책은 버리면 그만이다. 굳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욕하려고 그것을 읽는 수고를 한다거나, 재미있지만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것 같아 읽지 않으려 참는 일들은 무척 멍청한 일일거다. 세월이 지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뀐다. 모쪼록 더 고집스러워 지지만 않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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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의 게임 1 얼음과 불의 노래 1
조지 R. R. 마틴 지음, 서계인 외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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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얘기지만 워터가이드라는 장르문학 웹진?같은 사이트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네티즌은 다 개떼같다는 생각에 거기도 별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거기 사람들에겐 제법 품위(?)같은 게 있었다. 어쨌든 장르 문학은 소수자들의 전유물이었고 핍박받을수록 닮은 사람들은 뭉치기 마련이니.

어쨌든 그 홈페이지가 망하면서 정말 아쉬운 마음이 컸는데, 이유는 역시 그곳에서 소개받은 많은 책들이 대부분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역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였을텐데, 이 소설도 거기에 써 있던 훌륭한 리뷰 덕분에 관심이 가서 읽게 되었으니 여전히 감사한 마음이다. 물론 배운 사람들이 워낙 많다보니 거기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각자 무언가 자신에 대한 강한 프라이드가 존재했다. 나야 못 배워서 뭐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체로 눈팅만 하고 가끔 리플 한 두개를 다는 게 고작이었으니, 그들의 아집과 주장에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는 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지적하거나 논쟁할 정도의 자신도 능력도 없었다. 그 생각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굳어지며 그냥 침묵하는 쪽이 항상 낫다는 쪽으로 결론 내렸지만, 이건 결코 비겁하단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반박도 알아들을 만한 사람한테나 하는 것이고, 현석이 말대로 그런 조언을 해주는 것 자체가 이미 큰 가치를 지니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줘봤자 무의미하단 생각도 든다.

말이 많이 어긋나고 있지만 결국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것이다. 그 물이 황금물이라도. 이렇게 쓰다보니 그 쯤에서 적당히 홈페이지가 망한 것도 괜찮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거기에서 소개받은 많은 작품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앰버연대기, 르 귄의 여러 작품들 등에 대해서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학벌 좋고 똑똑한 사람도, 5년동안 1000권의 책을 읽었다는 사람들도 많았던 곳이니 다들 지금쯤은 엄청 잘 살고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코 애정이 남지는 않는다.

이 책도 물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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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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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에 의해 독후감은 1월 말 이후에 올리겠음.

 

대신 부록으로 2010 결산

 

B(44)

세월이 갈수록 읽는 게 줄어들어 걱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산 할지 여부에 대해 고민을 했지만, 간단히 적어둔다. 운이 좋다면 두어 권 쯤 더 읽고 올해가 마무리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올해 출간된 책이 아닌 올해 읽은 책 중에서 고른 것이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정유정

완득이도 영화화 되니까 이 책도 빨리. 예상하시겠지만 여기서 책을 꼽는 순서는 단지 책을 읽은 순서다.

로큰롤 보이즈-미카엘 니에미

특별히 읽은 책들의 리스트를 보지 않고도 단번에 떠올린 2010 올해의 책.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눈의 여행자-윤대녕

내 맘의 스테디셀러 윤대녕. 연초마다 두어권씩 꼭 읽는다. 내년에도 아마. 작년에 몇 권 읽은 그의 작품들 중 저 두 작품을 놓고 고민하다가 하나를 도무지 고를 수 없어 두 권을 다 적어 놓는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레이먼드 카버

잊을 수 없을 문장.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밤은 노래한다-김연수

나에게 김연수는 항상, 읽기 힘들기 때문에 쉽게 책을 빌릴 수 없는 작가다.

A-하성란

어중간하게 6권을 꼽고 싶진 않았지만, 하성란의 완벽한 부활.

 

(+)2권까지 읽었을 때만해도 1q84는 강력한 올해의 소설이었지만 3권을 읽는 순간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외에도 미학 오디세이, 변신이야기, 침묵하는 소수, 구월의 이틀 정도는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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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성철 스님이 던졌다는 저 유명한 화두를 생각해보자. 처음에 스님은 도를 향한 공부 끝에 나름의 깨달음을 얻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다고 하나, 공부를 보다 깊이 하니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라는 것을 새롭게 깨쳤다고 한다. 스님은 거기에 멈추지 않고 다시 더욱 깊은 공부를 했고, 결국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최후의 깨달음을 얻어낸다. 처음 얻은 깨달음과 고민 끝에 얻어 낸 깨달음이 결국 같은 것이었다는 이 말장난 같은 얘기는, 그렇지만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을 생각 할 거리가 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얻게 된 이 선문답 같은 결론이 어떤 의미를 가졌든, 처음의 ‘산은 산, 물은 물’은 결코 마지막의 ‘산은 산, 물은 물’과 같은 깨달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 <미학 오디세이>는 구석기인들의 동굴 벽화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연히 발견된 그 구석기 시대 벽화의 사실적인 표현법에 의한 정밀한 그림은, 현대인의 눈으론 철저한 위작으로만 생각된다. ‘예술사에서 이 정도의 표현을 찾아보려면 한참이나 뒤로 내려와야’ 했고, ‘인류 최초의 예술이 탄생하자마자 이처럼 단번에 생생한 자연주의적 묘사 수준에 도달했다는 건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고, ‘뒷날의 개화된 인간들도 이 정도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선 수천 년에 걸친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17~8p)

하지만 저자는 이런 신비한 현상의 타당성을 다양한 그림 자료들을 통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나간다. 그에 따르면 구석기인들은 ‘개념적 사유가 시지각을 지배할 정도로 발달’하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19p) 하지만 인류는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며 정착생활과 농경을 하기 시작한다. 농경은 인간에게 추상 능력을 요구했다. 자연 현상에 대한 추상은 그들에게 있어 어떠한 ‘개념’을 자리 잡게 한다. 그 개념은 이제 구석기인들이 가졌던 ‘벌거벗은 눈’(사물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게 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한다. ‘그들의 눈은 점점 더 개념의 지배를 받게 되고, 그럴수록 사물을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아는 대로’묘사하게’ 된다.(21p)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예술이 멈춰버렸던 것은 아니다. 얼마간의 시간이(엄청난 세월이겠지만) 흐른 뒤 인류는 다시 사실적인 표현법에 의해 대상을 그려낼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구석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사실적인 표현법에 의해 들소를 그렸다고 한들 그 두 그림이 같을 수는 없다. 처음의 ‘산은 산’과 마지막의 ‘산은 산’은 같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은 예술사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고전에 심취해 일어났던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낭만주의가 싹튼다. 이성과 정전(카논), 완결된 형식에 대해 질렸던 사람들은, 감성과 자유로움을 찾는다. 예술의 중심엔 더 이상 신이 아닌 인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낭만주의 또한 영원한 힘을 발휘하진 못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해 한계를 느낀 사람들은 다시 그 왕좌에 신을 끌어다 앉힌다. 고전주의는 다시금 주체의 자리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 고전주의가 처음의 고전주의와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른바 신고전주의의 대두다. 이 또한 ‘산은 산, 물은 물’의 과정이었던 것인데, 역시 그것도 처음과 같은 산과 물일 수는 없다.



2.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저자 진중권은 현재 진보주의 논객으로 가장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으며 그 외에도 교수, 작가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그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자신의 전공인 ‘미학’에 대한 첫 출간작이다. 저자 자신이 학사부터 석사까지 전공했던 미학 전반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이 가진 가치의 부피와 질량은 의심의 여지없이 만족스럽다. 여기에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며 현대고전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은 그 명성을 더한다. 그렇다면 책의 제목인 <미학 오디세이>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미학’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미의식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금 더 보충설명을 하자면, 미의식은 곧 아름다움을 느끼는 의식구조로 풀어 쓸 수 있다. 결국 미학이란 사람은 왜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보고 아름다운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은 쉽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왜’ 아름다운지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하지 못한다. 이 책은 바로 그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 쓰여 진 책이다.

제목의 뒷부분인 ‘오디세이’는 잘 알려져 있다 시피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머’가 쓴 작품의 제목으로,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 이후 귀향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온 다른 많은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오디세이’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넘어 어떤 긴 방랑이나 모험을 대표하는 말로 사용된다.

결국 이 책의 제목은 사람이 미의식을 느끼는 것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려 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시대에 따라서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에 대한 저마다의 기준과 이유를 밝히려는 여정을 뜻한다. 흔히 아름다움의 기준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 또한 왕조가 바뀌듯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져왔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미에 대한 기준이 하나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불변하는 것은 아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는 결코 진리일 수 없다.



이 책의 가장 앞머리에 쓰여져 있던 문장처럼 태초부터 아름다움은 존재하고 있었다지만, 사람들이 각자 찾아냈던 아름다움은 저마다가 달랐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피카소의 그림과 이발소에 걸린 그림 이야기, 책 전반에 걸쳐 나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저자가 이야기하려는 아름다움에 대한 상반된 두 가지의 커다란 주장을 읽는다. 이 두 주장의 요지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들도 쉽게 생각해 봤을 객관과 주관의 문제다. 본문으로 돌아가자.

책 말미에 저자는 유클리드와 ‘피카소의 작품과 저 이발소 그림 가운데 어느 게 더 훌륭한 작품’인가에 대한 가상의 대화를 한다.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발소 그림이 더 뛰어난 것일까, 아니라면 ‘당연히’ 피카소의 것이 더 뛰어난 것일까. 피카소를 비롯한 현대미술을 보면서 난해함을 한 번이라도 느꼈던 사람이라면 그 질문은 피부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끊임없는 질문에 재 질문을 통해 논조를 키워간다. ‘취미에 관한 한 논쟁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 유클리드는 ‘객관적 기준이 없다면 굳이 예술이란 게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으로 맞선다. ‘창작의 자유를 누리면 뭐하나. 어느 게 예술이고 어느 게 사긴지 구별조차 안 된다면’.

‘칸트처럼 공통감이란 게 있다고’ 가정한다면 미의 객관적 기준이 생기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저자에게 다시 유클리드는 ‘공통감이 있는데, 왜 사람마다 미적 판단이 달라’지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구한다. 저자는 대답하지 못한다.

저자는 결국 다소 미진한 태도로 그 중간의 타협점에서 글을 맺는다. ‘미는 혹시 주관과 객관 모두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주관과 객관이 만나서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고전주의에서 말하는 미의 규준’과(객관성) ‘현대예술이 누리는 창작의 자유’(주관성)를 동시에 살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저자는 이야기한다. 객관과 주관이라는 두 주장이 시대가 바뀌며 여러 가지 이름들과 그 세부 이론의 미묘한 차이들로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지만, 그 둘이 서로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책에 등장하는 에셔의 판화 중 하나인 ‘원의 극한(천국과 지옥)’이라는 작품 속의 악마와 천사를 통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157p) 빛은 어둠으로 인해서 비로소 완전해진다. 둘은 서로가 합쳐져 하나가 된다.

그렇지만 분명히 이 결론에 대해 명쾌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이 결론이 책의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주관적인 것인가 객관적인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아름다움은 주관적이기도 하며 객관적이기도 하다는 대답은 극히 동어 반복적이다.



3.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지만 그 동어반복적인 결론은 명쾌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충분한 기분이 든다. 처음의 ‘산은 산’과, ‘산은 산이 아닌’과정을 통해 재 도출 된 ‘산은 산’은 결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저자가 저 상반된 두 주장을 책 전반에 걸쳐 소개하고, 의문을 던지는 대신 어느 한 쪽 주장에 대해 편을 들어 독자를 설득하려 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랬을 경우 물론 어떤 독자들에게는 충분한 만족감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독자들에게는 불만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산은 산, 물은 물’을 알게 된 것이라기보다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의 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도 물론 그러한 의문의 제기에 페이지 전반을 할애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아르케익과 콘트라포스토,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상반되는 여러 미학적 이론을 소개하면서도 작가는 그 둘 중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은 나름의 타당성이 있으며, 각자의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미온한 태도로, 결국 아름다움엔 ‘알 수 없는 그 무엇’(je ne sais quoi)이 있는 것이라 결론 내리는 모습도 그리 밉지만은 않다.

극심한 사상적 대립이 있던 시대는 지나갔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서로에게 어떠한 종류의 분명한 선택을 하길 강요한다. 왼쪽의 반대는 오른쪽이고, 좋은 것의 반대는 싫은 것이며 그 둘 중 하나를 택하고 나머지를 배척하길 요구한다. 내 편이 아닌 당신은 적일뿐이다. 그 사이에서 <미학 오디세이>는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이상의, 사상을 넘어서는 자유의 선택지를 늘려준다. 세상을 보는 제 3의 눈을 준다. 그렇게 열려진 마음의 창으로 본 물은 물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닐 수도 있으며, 나의 오른쪽은 마주 선 당신의 왼쪽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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