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사이버 성폭력에 맞서 싸우기 : 불법 촬영물을 중심으로’ 중 스피노자 부분

스피노자는 「윤리학 3부 정리에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독특한 실재의 본질을 ‘코나투스conatus‘, 곧 자신의 존재 속에서 존속하려는 노력,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즉, 코나투스의 인간적인 표현은 ‘욕구‘ 내지 ‘욕망‘이다. 욕망은 자기 자신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노력으로서의 활동이다. 스피노자는 기쁨, 슬픔, 사랑 등의 정서가 이성과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정서가 없다면 인간은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정서affectus, affect를 "신체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억제하는 신체의 변용affectio들이자 동시에 이러한 변용들의 관념들"로 정의하면서 인간의 모든 정서는 욕망conatus, 기쁨laetitia, 슬픔ristitia 이라는 세 가지 기본 정서에서 파생된다고 간주한다(3부 정리11의 주석). 정서는 사유 속성에 속하는 관념의 한 종류이지만 인지적 기능에 따라 정의되는 일반적 관념에 따라 신체와 정신의 역량의 증대 및 감소를 나타낸다(진태원, 2015).
특히 스피노자의 인간학은 인간들이 다른 사람의 욕망을 모방하는 정서모방 개념을 중시하는데, 이 개념에 따르면 사람들의 욕망과 정서(기쁨, 슬픔, 사랑, 미움, 희망, 두려움, 시기 등)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정서를 모방한 결과다. 이는 인간들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원초적 개인들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실존하고 성립한다고 보는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존재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2010/2012)의 표현에 의하면, 스피노자에게 인간들의 관계는 관개체성transindividuality의 성격을 지닌다. "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의 항상 이미 다른 개인들(이미 개인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개인 자신역시 다른 개인들이라는 존재의 일부를 이룬다)과 맺고 있는 관계의 총화인 것이다."(진태원, 2018: 330). 이러한 관개체적 존재론으로 인해, 인간들 각자는 정서모방의 네트워크에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욕망을 비롯한 정서를 갖는 법을 배우게 된다.
스피노자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를 들어 이것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아이들의 신체는 마치 계속 평형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웃거나 우는 것을 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웃거나 울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곧바로 모두 따라하려고 하며, 마지막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할 만한 모든 것을 스스로 욕망한다."(윤리학 3부 정리 32의 주석). 스피노자는 더 나아가 정서모방이 반드시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만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연민이라든가 공감, 민족주의적 정서 등은 모두 정서모방의 대표적 사례들이다. (90% 지점)

이러한 감정들도 정서모방 개념에 입각하여 설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분개indignatio를 타인에게 잘못 대해준 이에 대한 미움이라고 정의한다("윤리학 3부 "부록" 20항). 여기서 타인이란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분개 개념은 사회정치적 소요를 설명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 설명된다. 스피노자의 『정치론』 4장 4절에 의하면 "국가civitas는 자신의 권리 아래 존재하기esse sui juris sit 위해서는 두려움과 공경의 원인들을 유지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국가로 존재하지 못하게 된다. 왜냐하면 통치권imperium을 보유한 이(또는 보유한 이들 중 하나)가 술에 취한 채로 또는 벌거벗은 채로 창녀들과 함께 거리를 활보하거나 광대짓을 하면서 또는 자기 자신이 만든 법을 공공연히 위반하거나 무시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보

존한다는 것은, 동시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 신민들을 도륙하거나 약탈하고, 젊은 처자들을 성폭행하는 일 그리고 그와 유사한 행위들은 두려움을 분개로 바꾸게 되며, 결과적으로 사회상태를 적대상태로 바꾸게 된다."
물론 이 당시의 국가는 군주론』에 제시된 마키아벨리의 교훈을 염두에 둔 상황이므로 지금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차이가 있겠지만, 두려움이 분개로 전환되면 사회상태statum civilem에서 적대상태statum hostilitatis로 전환되는 원인이 된다(진태원, 2018). 이러한 분개의 감정은2018년 혜화동 불법 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를 촉발시켰다고 할 수 있다. 홍대 남성 누드 모델 사진 유출 사건은 피해자가 사건을 인지하기도 전에, ‘정의로운‘ 목격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공론화되었고, 학교는 신속하게 가해자를 색출하려고 노력했고 즉시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여성 가해자는 ‘긴급‘ 체포되었고 포토라인에 세움으로써 불법 촬영의 ‘범죄성‘을 전시했다. 이는 여성들이 그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바라던 불법 촬영 범죄를 대하는 모범 답안이었다(김민정, 2018).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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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첫번째 챕터 ‘창조산업의 핑크게토와 여성 크리에이터의 성별화된 창의성’ 밑줄

핑크게토는 원래 젠더화된 노동 분업으로 인한 젠더화된 공간을 나타내는 지리학적 개념으로 출발했다. 이후 노동 시장 여초 직군이나 특정 문화, 사회 등에서 여초 현상을 가리키는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같은 현상에 내재한 성별 위계와 분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미디어 산업에서의 핑크게토는 여성 크리에이터들이 유독 많이 분포하고 있는 특정 분야 콘텐츠들을 통해 관찰되고 있다. (67%)

이 과정 속에서 비경제적인 것으로서의 여성들의 생활은 ‘정보화된‘, ‘전시를 위한‘, ‘판매를 위한‘ 일상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이렇게 매일의 보통의 일상이 시장 속으로 초대될 때, 그리고 인터넷 페이지에서 정치와 경제 정보가 소위 유머, 건강, 생활 등과 동일하게 배치될 때, 노동과 놀이, 일상과 비일상, 경제적인 것과 비경제적인 것의 경계 역시 명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콘텐츠 생산은 정치, 경제, 문화적인 역동을 만들어내며, ‘일상‘의 의미와 형식, 그리고 경계를 바꾸어내고 있다. 대단히 탈경계적인 방식으로 소위 컨버전스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70%)

성별, 연령, 학력 등과 무관한 일로 여겨지는 콘텐츠 크리에이터 영역에 왜 핑크게토가 형성되는가? 소위 말하는 창의성, 창조적 지식이라는 것의 획득이 단발의 경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도 누적적인 경험을 거쳐 인지 체계 속에서 자기 것으로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즉 창조적 지식은 누적된 경험과 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의 특수성 속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개인적 경험에 초점이 맞추어진 오늘날의 창의성이라는 개념이 바로 필연적으로 핑크게토를 만든다. 지금 여성 크리에이터들이 공통적으로 제공하고 있는 콘텐츠들은 실생활에 바로 적용 가능한생생한, 직접 체험하지 않고는 얻기 힘든 것들을 다룬다. 이때의 실용적인 콘텐츠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즉 여성으로서의 필요에 의해 알게 된 것들이다. (71%)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여성화된 영역‘ 안에서 커리어를 탐색하고 있다. 이들이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진로로 선택한 이유는 공통적으로 그것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좋아하게‘ 된 것은 소비 문화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경험과 그에 대한 욕망을 통해서이다. 다양한 소비에의 경험은 또래 사이에서 심미적 노동 분야에 자질이나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어 자신감을 가져다준다. 여성들이 수행해온 오랜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통해 익힌 소비자로서의 기술과 지식은 진화하고 있는 소비자 문화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고 있으며 여성들로 하여금 마케팅 영역을 포괄하는 서비스 직종으로 더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한다(Gray, 2003). (72%)

여성과 소비주의, 근대성에 관한 글에서 리타 펠스키(1998)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여성들은 남성들 사이에 교환되는 대상으로 간주되는 여성의 물신화 과정을 통해 상품 형식과 유사한 관계에 위치지어진다고 설명한다.
구매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스스로를 유혹적인 대상으로 만들도록 한다는 면에서 상품과 여성은 동일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보라 파슨스는 여성 소비자를 물신주의적이고 성애적으로 병리화시키는 남성 관찰자의 ‘시선‘ 이면에 여성들의 욕망을 관리하고 재생산하는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자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Parsons, 2000:49, 재인용 서지영, 2010). (72%)

여성 크리에이터들의 노동에서 드러나는 심미 노동적 특수성은 끊임없이 여성 노동자와 노동의 결과물을 여성과 여성의 몸으로 환원한다.

여성 크리에이터들의 콘텐츠는 필연적으로 젠더에 관한 균열을 내포하고 있다.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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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비인간, 법적 인간과 권리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밑줄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물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민주주의적 법체계를 상상해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 종을 권리의 주체로 인정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자.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가 될지는 모르지만, 다음 내용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첫째,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동물 종과 느끼지 못하는 동물 종 사이로 이동한다. 인간 범주는 단지 확장될 수 있을 뿐, 모든 존재자를 포괄하지는 않는다. 둘째, 고통을 느끼는 동물 종은 우리와 똑같이 인간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법적 인간 개념의 외연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편의상 우리를 "우리 인간" 인간 범주에 새롭게 포괄된 동물을 "동물-인간"이라고 부르자). 그럼 동물을 자기 행위의 책임을 지는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간주해야 한다. 예컨대 우리 인간이 동물-인간을 죽이는 행위는 물론, 동물인간이 다른 동물인간을 죽이는 행위도 살인으로 처벌해야 한다. 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동물을 죽이는 건 여전히 허용될 것이다. 더 나아가 동물-인간의 참정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인간이 가진 권리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정치적 삶에 참여할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별 인간은 정치적 참여를 통해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정한다. 이러한 민주적 참여에서 배제된 존재는 결코 자율적 인간의 지위를 온전하게 획득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상상해보면, 근대정치체제가 전제하는 존재론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유지하면서 동물을 법적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쉽게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동물을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별 관심이 없지만, 태아가 법적 인간이라는 주장은 진지하게 토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모든 자율적 인간은 태아가 성장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아가 법적 인간이냐는 질문을 깊이 탐구해보면, 동물을 법적 인간으로 인정할 때 발생하는 것과 거의 같은 어려움을 직면하게 된다. 일단 태아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줄 아는 자율적 인간이 아니다. 합리적 판단에 기초해서 자신의 의지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행위의 책임을 지는 권리와 의무의 주체라고 할 수도 없다. 흔히 태아를 "잠재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잠재적이라는 것은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태아의 경우에도 인간으로 인정하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드워킨은 이렇게 질문한다. 태아의 생명권을 부정한 로대 웨이드 판결에도 불구하고, 주 법률은 태아를 생명권의 주체인 법인격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물론 가능할 것이다. 기업에게 법인격을 부여하듯이, 심지어 나무를 법인격으로 보는 법체계를 생각해볼 수도 있다. 단, 법이 나무를 인간으로 규정했다면, 나무를 베는 행위를 살인으로 처벌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법은 일관성과 체계성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15 마찬가지로 태아를 법적 인간으로 인정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인정될 수 없다. 출생의 배경이 무엇이든 살아 있는인간을 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이라고 해서 태아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없다. 또한 태아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해도 임신중단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 인간이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해서 그를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

다. 물론 모체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태아의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 극단적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선택은 사실상의 차원에서는 임신중단과 같을 수 있겠지만, 권리상의 차원에서는 결코 임신중단이라는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가진 두 명의 인간이 신체적으로 결합해 있고, 둘 중 하나를 살리기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체를 살리기 위해태아를 희생하는 경우, 그리고 태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체를 희생하는 경우는 동등한 두 가지 선택지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런 의학적 선택을 정당화하는 법률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법 조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이다.
태아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법체계를 구축하려면, 임신중단 말고도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태아가 자연유산되었을 경우, 인간이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한 것과 동일한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다. 난임 여성이 체외 수정을 시도할 때 다태아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선택적 유산을 시행하는데, 이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이미 착상된 태아를 유산시키는 것은 살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6 한국의 민법과 형법은 각각 출생 시점과 진통이 시작된 시점을 기준으로 태아와 인간을 구별하는데, 이런 기준도 다 바꿔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하나씩 검토하다보면, 태아 생명의 가치를 강조하는 사람은 많아도, 태아를 인간으로 분류하는 법체계를 구축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왜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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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윤리와 파올로 코엘료, 크리스티앙 보뱅

"다른 예가 있다. 프랑스에서 1990년대 말에 가장 놀라운 성공을 거둔 문학작품은 무엇일까? 그 저자는 제3세계 출신의 무명작가였는데, 비교(秘敎)적인 제목을 단 그 책은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이 한 페이지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은 모든 장르를 통합하여 베스트셀러의 정상 자리를 1년 이상 차지했다. 그런데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은 사람은 그 작품의 내용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안다. 그것은 영적추구에 관한 이야기일 따름이다. 이 작품이 10년 전에 출판되었다면 누구의 눈에 띄지 않은 채 그냥 사라졌을 것이다. 아마 이 책은 20년 후에는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적절한 시기에 나왔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상당한 성공, 심지어 우리가 작품의 질을 생각할 때 상당히 불균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이 단순히 평범한 작품(즉, 몇몇 사람들이 생각한 것처럼 걸작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의 성공을 항상 참지 못하는 파리의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비판한 것처럼, 전혀 무가치한 작품도 아니다)이라는 사실은 그 작품과 관련한 현상이 문학적 현상이라기보다 사회적 현상이라는 걸 가리킨다. 따라서 최소한 이런 관점을 따를 때, 우리가 『연금술사』와 관련한 현상을 간과하는 것은 잘못을 저지르는 일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문학계에서 차용하는 또 다른 예가 있다. 진정한 걸작인 크리스티앙 보벵Christian Bobin의 『아주 낮은 곳Le trés bas』은 출판 시에 미미한 호응을 얻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0년대 혹은 1970년대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 코saint François d‘Assise를 다룬 책이 프랑스에서-언론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텔레비전에서는 전혀 소개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20만 부가 팔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끝으로 마지막 예 혹은 마지막 일화를 든다면, 교육자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언급한 미셀 셰르(↓17)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30년 전에 학생들에게 흥미를 끌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정치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웃겨주고 싶을 때는 종교에 관해 이야기했다. 오늘날에는 그 반대다. 내가 학생들에게 흥미를 끌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는 종교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가 그들을 웃겨주고 싶을 때는 정치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말은 단순히 재미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말을 내게 전해준 친구는 -나처럼 그리고 나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들은 모든 동료들처럼-이 말이 많은 진실을 내포한다고 생각했다.

17 Michel Serres(1930~ ). 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교수, 『헤르메스Hermès』(1969~1980), 『카르파치오 미학Esthétiques sur Carpaccio』(1975), 『자연계약Contrat nature』(1990) 등의 저서가 있고, 소르본과 스탠퍼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옮긴이) * 덧붙임 : 미셸 세르 (1930~2019)"

전자책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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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2-07-19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제목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로 번역되어 있다.
 

9장 어머니와 딸

밑줄.

나를 울리고 또 위로하는 구절들…

어머니가 어떤 다른 생각을 하셨든간에(그리고 나는 어머니가 부분적으로는 암묵적으로 내 편임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또한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 당시에 경험하셨다고 후에 내게 말씀하셨던 ‘무감각한 상태‘ 밑에 깔려 있는, 모든 어머니들이 느끼는 죄의식을 상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을 알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해 쓰기가 어렵다. 어머니의 딸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묘사하려고 노력하지만, 내 자신이 분열되고, 어머니의 피부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처럼 느낀다. 나의 일부는 어머니와 너무나 닮았다. 아직도 어머니에 대해서 깊이 쌓인 분노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들이 흔히 저지를 만한 잘못 때문에 벽장에 갇힌 4살짜리 아이의 분노(아버지가 명령한 것이지만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어머니였다), 안면의 틱 증세가 생길 때까지 너무 오래 피아노 연습을 해야 했던 6살짜리 아이의 분노(마찬가지로 아버지가 우겨서 했지만, 레슨을 시킨 사람은 어머니였다). 내 자신이 어머니로서, 나는 아이의 얼굴에 나타나는 틱 증세가무엇인지 알고 있다 - 그것은 자신의 몸을 뚫고 지나가는 예리한 죄의식과 고통의 칼날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임신하고 어머니를 절실하게 원하고, 어머니가 적에게 가버렸다고 느끼는 딸의 분노를 느낀다.
또한 나는 어머니 안에도 분노가 깊게 쌓여 있음을 안다. 모든 어머니들은 자녀에 대해 걷잡을 수 없고 용납될 수 없는 분노를 갖고 있다. 나의 어머니가 어머니가 되었을 당시의 조건, 불가능한 기대, 임신한 여성에 대한 아버지의 혐오, 아버지가 통제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아버지의 혐오감을 생각해 보면, 어머니에 대한 나의 분노는 비애로 바뀌고 그녀를 위한 분노로 바뀌며, 다시 어머니에 대한 분노, 오래되고 정화되지 않은아이의 분노로 바뀐다.
현재 나의 어머니는 항상 어머니가 원하던 대로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고 계신다. 어머니는 사랑받고 존경받는 할머니이며, 새로운 영역을 탐구 - P252

하며 산다. 어머니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살고 있다. 나는 끊임없는 치유를 위해 어머니와 대화를 갖는다는 환상, 치유 받지 못한 아이의 환상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 우리가 모든 상처를 내보이고 어머니와 딸로서 함께 겪어 온 고통을 넘어서 마침내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면서, 최소한 나는 어머니의 존재가 현재 얼마나 중요한지, 그동안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20세기의 새로운 여성운동의 초기에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들이 당한 억압을 분석하고, 왜 우리의 어머니들이 우리가 아마존이 되도록 교육시키지 않았는지, 왜 우리의 발을 묶어 놓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지를 ‘합리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석은 정확했고 철저했다. 그렇지만 좁은 의미의 모든 정치학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분석은, 의식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의 내부에는 여성의 보살핌과 부드러움, 그리고 승인,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 행사되는 여성의 힘, 여성의 향기, 감촉, 목소리, 우리가 두려움과 고통을 느낄 때, 우리를 감싸는 강인한 팔을 여전히 갈망하고 있는 어린 소녀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들 누구라도 크리스타벨 팬크허스트의 말대로, "여성 참정권 운동의 대가를 미리 지불하기로 마음먹은 어머니, 여성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할 자세가 되어 있는 어머니"를 갈망했을 것이다. 우리의 어머니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여성으로서 우리 자신의 힘을 느끼려 노력할 때,
우리는 어머니를 필요로 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린 소녀의 외침을 수치스러워 할 필요도 없고 퇴보라고 느낄 필요도 없다. 그 욕구야말로 강한 어머니와 강한 딸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는 우리욕구의 시작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적인 시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자신들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어머니에 의해 키워졌다. 우리는 단지, 어머니가 계산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편에 있었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 P253

만일 어머니가 죽었기 때문에, 혹은 우리를 입양시키기로 작정함으로써, 아니면 생활고 때문에 알코올과 마약에 중독되거나, 우울증에 빠지거나 미쳐서 우리를 버렸다면, 제도화된 모성하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위한 여건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생계 때문에 어쩔 수없이 무관심하고 애정이 없는 낯선 사람에게 우리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면, 제도가 요구하는 대로 ‘훌륭한 어머니‘가 되도록 노력하고, 그 때문에 우리의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청교도적인 어머니가 되었다면, 혹은 아이 없이 살 필요가 있어서 그냥 우리를 떠났다면, 우리가 이성적으로 아무리 용서하고 어머니 개인의 사랑과 힘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 안에있는 아니, 남성이 통제하는 세상에서 자란 여자아이는 여전히 순간순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이러한 역설과 모순에 맞서 이를 해결할 수 있다면, 잃어버린 어린 소녀의 탐구열을 우리 내부에서 끝까지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느낌을 바꾸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운동을 해나가는 여성들 가운데서 반복적으로 분출되는 맹목적인 분노와 고통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성 간의 자매 관계 이전에, 어머니와 딸이라는-과도적이고 단편적이지만 아마도 근본적이고 중요한-지식이 있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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