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현타 올 때가 있다. 흔히 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때로 여기가 어디며 나는 누구인지 대충 아는 상태로 현타를 맞을 때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타격감이 제법 크다. (자, 이럴 때 '현타' 즉 '현실 자각 타임'이라는 말이 적절한가, 는 지금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긴 하지만 잠시 해보자. 현실이란 무엇인가. 내 현실은 어떤 것인가. 내 현실이 어떻기에 자각하는 타임이 오는가. 그 또한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상상에서 벗어나 여기 이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 아닌가.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도, 그렇다고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없는 내 현실.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게 현실이야, 이게 현실이야, 라는 말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 혹은 포기의 다른 모습 아닌가. 더하여 지금 내 현실이 뭐가 어때서? 라는 말. 부질없지, 소용없지,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런 생각을 주워섬기게 만드는 말들. 생각들. 합리화라고 할 수도 있는.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겠는데 합리화와 죄의식은 아직 나를 떠날 줄을 모른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
" "아이들이 없다면 책을 써서 번 돈으로 지금쯤 세계 일주를 하고 있을 텐데. 대신 집에서 식사를 준비한다. 주중에는 매일같이 아침 7시에 일어나 어리석은 훈계를 읊어대고 세탁기를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를 하녀로 여기는 아이들을 위해 이 모든 일을 한다. 어떨 땐 후회를 한다. 그렇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후회한다."
더 나아가 "아이들이 없고, 장보기와 식사 준비, 아이 돌보기에 덜 매였다면 내가 무엇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고백컨대 나(코린 마이에르)는 오로지 한 가지만 기다린다. 아이들이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드디어 내가 더 많은 시간을 창작 활동에 집중하는 것. 그 쯤이면 내 나이 쉰 살이겠지. 나중에 더 나이가 들면 그때의 인생이 내겐 이제 막 시작한 것이겠지." " (204)
눈물이 맺혔다.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오나 도나스의 <엄마됨을 후회함>을 읽을 때에도 이런 순간은 없었는데, '그쯤이면 내 나이 쉰 살이겠지'에서 해보지 않은 생각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무엇이 되었을까?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이미 쉰 살을 넘겼는데 내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아니아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는 알고나 있는 거야? 뭘 시작하려는지 알기나 해? 작은넘이 바칼로레아 시험을 칠 때까지 일 년여가 남았다. 그럼 나는 더 '자유'로와지는 건가? 아이를 낳으면서 사라진 내(나'만'의) 25년은 그 '자유'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여행을 많이 하는, 아이가 셋인 한 남성 작가와 대화를 나누며 그녀(나타샤 아파나)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물었다. 그는 자신은 "매우 운이 좋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이 말을 "'매우 운이 좋다'라는 말은 '나는 엄청난 아내가 있어요'라는 말의 현대적 표현인 듯하다"라고 해석했다. 그 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플래너리 오코너, 버지니아 울프, 캐서린 맨스필드, 시몬 드 보부아르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토니 모리슨은 자녀가 둘, 첫 소설을 서른아홉에 출간했다. 페넬로페 피츠제럴드는 자녀가 셋, 첫 소설을 예순에 출간했다. 솔 벨로, 여러 명의 자녀, 여러 권의 소설 출간. 존 업다이크, 여러 명의 자녀, 여러 권의 소설 출간." (139)
나에 대한 생각과 다른 여성들에 대한 생각이 겹쳐져 가슴이 아파왔다. 현타는 종종 이런 것이다. 뒤늦게 무언가를 뼈아프게 깨닫는 것, 돌이킬 수 없음에 가슴 아파 하는 것, 앞으로도 그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가슴아파 하게 될 거라는 예감.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것들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아무것도 모른 채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회고록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한국어판은 민음사, 2017)를 쓴 미국 작가(1969~)]는 여성은 세 범주로 나뉜다고 말한다. 즉 "어머니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성들, 이모가 되기 위해 태어난 여성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최소 3미터 이내로 아이들에게 가까이 가는 걸 허용해서는 안 되는 여성들. 자신이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자신이 속한 범주를 혼동하는 바람에 그 모든 슬픔과 비극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녀 자신은 '이모 부대'에 속한다. " (185)
혼동까지 가지도 못한다. 그런 범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모르니까. 모두가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하니까. 길버트의 저 세 범주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특히 어머니가 되기 위해 태어난, 이 부분) 여러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여성은 알아야만 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미 알고 선택한 여성들에게 박수를, 아직 몰라 휩쓸려다니는 여성들에게 각성을.)
나는 열렬히 '이모 부대'이기를 바란다. 이미 세상에 내어놓은 내 아이들에게도 물론 그러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바람일 뿐, 어쩌면 나는 아이들과 친할 수 없는 여성들의 범주에 속하는 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일반적인 대인관계에서 떨어뜨려 생각하는 사회적 경향 때문에 더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같은 일인데. 그렇게 보면 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그냥 대인 관계를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되나. 가끔 조카와 어린 아이들에게 멋지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 부러움은 원인을 찾게 만든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감당할 수 없는 몫을 아무 생각 없이(글자 그대로 정말 아무 생각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짊어지게 되었을까? 얼마 전만 해도 모르고(외면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아이들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내 아이들로 있을 거라는, 나는 언제까지고 아이들의 '엄마'일 거라는, 그 '당연한' 사실을 퍼뜩 깨닫고는 모골이 송연해졌었다. 쉰이 넘은 내게도 엄마가 엄마로, 아빠가 아빠로 있다. 내가 그걸 원하든 아니든 상관 없이. 인간을 세상에 내어놓는 일은 무섭다. 무서운 일이다.
" 미국에서 출판된 그녀의 저서는 최근에 작고한 할머니에 대한 오마주로 시작된다. 자신이 어머니라는 사실이 기뻤던 할머니 노가 도나스와 손녀 오나 도나스는 서로에게 관심과 호의를 보이며 상대방 말을 경청했고, 서로의 행복을 기원하고 그 성취를 자기 것인 양 기뻐하며 긴 담화를 이어갔다.
에이드리언 리치 또한 이렇게 말했다.
"'자녀가 없는 여성'과 '어머니'를 대조하는 것은 잘못된 설정이다. 이 둘을 견주는 식의 대조가 출산 제도와 이성애 제도에 기여했다. 보통 이 둘을 단순한 범주로 간주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211)
할머니, 어머니, 더 나아가 적대적인 관계가 되기 쉬운 기혼여성의 시가쪽 여성들. 그들에게 한없는 인류애가 솟아올라 가슴이 아리다가도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경험을 반복한다. 관계가 과연 내 언행에 달려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 주고받지 않음에 대한 열망. 거부하고 싶은 마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얽매인 듯한 느낌이 들 때 홀로 다짐하는 것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내게는 아이가 있지만, 아이 없는 여성처럼 살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그럴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믿음은, 내가 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 아이가 있다면 "20년을 예상해야"(205) 한다. 물론 나도 아이들을 낳아 키우면서 자기 일에 몰두하(려)는 여성들을 안다.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독박 육아'를 해야 하는 시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혹독하게 자기 몸을 던져 돌보고 일하고 나가떨어진다. 조력자가 없다. 독하다는 말이 돌아올 뿐이다.("당신은 나쁜 엄마, 복수의 여신 메가이라 취급을 받을 것이다."(131)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되면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당연한 세상은,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 제도가 뒷받침하는 사회여야 한다. 그 제도에는, 마치 도돌이표처럼 돌아오는 여성의 부모(이하 일가친척 및 동반자 포함)에 대한 돌봄'의무'를 없애는 방편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것은 망상이 아니다. 이것은 헛된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후회한다/후회하지 않는다,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다. 점점 밝아지기는커녕 암울해 보이는 미래를 눈앞에 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