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으로 미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의 역사와 그 흐름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고 인종간, 성별간, 계급간의 갈등, 그 복잡한 관계의 역학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아주 유익한 독서였다. 막 재밌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딴나라 역사이기 때문인 듯하다. 관계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항상 이런 책을 읽을 때면 반성의 자세를 갖게 된다. 한국의 역사에 무지, 여성사 무지, 정치사 무지, 대체로 다 무지한 탓이다. 독서가 천편일률적으로 '서양'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일단 사놓은 책부터 몇 권 읽으려고 주섬주섬... 책도 백인지향인 것같아 씁쓸하다. 외국저자의 책 한 권을 살 때마다 한국저자의 책 한 권을 사는 식은 어떨까. 몰라서 못 읽는 책도 많을 것같다. 한국의 좋은 책들, 묻혀있는 책들, 좀 발굴해서 수면으로 띄워주시길. 훌륭한 저자들이 좋은 책 많이많이 내주시길.)
일차적 책 감상은 이게 다다.^^;; 책 뒷부분(11~13장)은 따로 더 쓸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읽다가 딴생각 하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아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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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 여성의 클럽 운동은 단호하게 흑인해방투쟁에 전념했지만 그 중간계급 지도자들은 때로는 안타깝게도 흑인 대중에 대해 엘리트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210)
: '엘리트주의적인 태도' -> 엘리트주의에 빠지지 않는 엘리트의 자세
" 웰스는 이런 무거운 짐을 바로 짊어지기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주의 반대 운동에 들어서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까지 개인적인 고난이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213)
: '개인적인 고난' -> 개인적 고난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
" 그리고 때로는 "부르주아 이웃과 자기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녀' 욕설에 참여하는" 죄를 범한다." (261)
: -> 남의 험담에 동참하거나 뒷담화를 선동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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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이 고민해볼 주제이다. 명확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이 주제들에 대해 내 생각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뭔가 꺼림직하다. 이런 질문들이 떠오르는 것도 결국은 나를 어떤 위치에 올려놓았기 때문은 아닐까? 거기 올라서서 주위를 둘러본답시고 '아래'로 규정지은 곳을 내려다보는 건 아닌가?
그래서 아래와 같은 구절들이 더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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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릭 더글러스는 19세기의 가장 명민한 흑인해방 지지자였음에도 자본가에 대한 공화당의 충성심을, 그리고 이들에겐 흑인 참정권에 대한 초기의 요구만큼이나 인종주의가 쓸모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평등권협회 내 흑인 참정권을 둘러싼 논란의 진정한 비극은 참정권이 흑인들에게 거의 만병통치약 같은 역할을 하리라는 더글러스의 입장이, 어쩌면 여성참정권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인종주의적 완고함을 부추겼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142)
"...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유색인종이 정직함이나 청결함, 믿음직함이라는 면에서 너무 폄하된다고 생각해요. 내 경험상 그 사람들은 모든면에서 흠잡을 데가 없어요. 완벽하게 정직하고요. 정말 그부분은 더 할 말이 없어요.
인종주의는 복잡다단한 방식으로 굴러간다. 백인보다 흑인 하인을 더 좋아한다는 말로 자신이 흑인을 칭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용주들은 실제로는 하인-솔직히는 노예-은 천생 흑인의 숙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52)
"백인 여성들은 더 나은 일을 찾을 수 없다는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절대 가사노동을 직접 하지 않았기 때문에..." (153)
"앤젤리나 그림케가 「남부의 기독교 여성들에게 호소함(Appeal to the Christian Women of the South)」에서 선언했듯 노예제에 맞서지 않은 백인 여성들은 노예제의 비인도성에 대해 무거운 책임이 있었다." (157)
"수전 B. 앤서니는 어떻게 인권과 정치적 평등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기 조직 회원들에게 인종주의 문제에 침묵하라고 조언할 수 있었을까?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그리고 특히 그 인종주의적 요소-가 정말로 테러의 실제 이미지를 모호하고 사소해 보이게 만들고, 고통받는 인간의 끔찍한 비명을 잘 들리지 않는 웅얼거림으로, 그러다가 침묵으로 희석해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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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로 세상을 본다는 건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냥 '나'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나'이면서, 내가 위치한 자리, 즉 나의 상황, 내 곁에 있는 사람, 그(들)의 위치, 나와 그(들)과의 관계, 그 관계에서 파생되는 역학들, 기타등등의 복잡한 맥락 속에 있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그 위치는 움직인다. 개인적 위치에서 사회적 위치로 나를 옮겨놓으면(그것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또다른 내가 있다. 전체 속의 나. 전체를 이루는 부분인 나. 그 또한 간단하지 않다. 개인적 위치의 나일 때처럼 전체의 부분인 나에서 파생되는 관계의 역학이 거기에도 있다. 이것도 이분법적 발상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러저러한 개인적 맥락을 가진 인간이고 아시아의 한 나라 한국의 여성이면서 '백인들'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 동일시의 함정에 빠지는 건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항상 거울을 앞에 두고 내 정체성을 정의하며 사는 것 또한 웃기는 일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인식하게 만들어주긴 하지만 말이다, 이 사회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는데... 나는 내 위치를 착각할 수 있다. 또는 '안정된' 위치로 정해두고 거기 안주하려고 할 수 있다. 그런 태도가 언행에서 나온다. 나는 '나'로 세상을 보고 있나? 그 '나'는 내가 위치지은 그곳에 있는 '나'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면 농담처럼 던지는 말이나 이렇게 끄적거리는 글도 무서워질 때가 있다.
고통에 위계를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분명 내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 고통은 저것보다 크기가 작으니까 별것 아니라고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내 고통'이 가장 큰 법이다. 흑인여성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따라오게 마련인 '고통'이라는 단어가, 그들을 이해하는 데 방해물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떤 생각으로 사람들을 봐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자기 위치를 제대로 알고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는 내 위치를 얼마나 잘 알고 있으며 그것이 언행일치로 이어지는가 하는 질문은 늘 나를 찔리게 한다. 책의 구절들을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