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도 틈틈이.

겨우 책 몇 글자 보는 정도.
<포르노랜드> 읽을 수 있겠어? 했는데
서정적인 글보다 오히려 더 잘 읽히는 건 반전이다. ㅋㅋ
재독이라 그럴지도.
대신 글을 쓸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

북플 글도 대충 휘리릭, 제대로 못 읽음.
당분간 이럴 예정.






아마 포르노가 그 이용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에 대항하는 가장 목소리 큰 논리는 "포르노는 판타지다"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판타지는 머릿속에 존재하고 그 안에만 머무르며, 관계, 섹스, 사람, 친밀감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로는 절대 새어 나가지 않는다. 남자는 포르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이미지를 액면가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바보가 아니다. 이들은 포르노를 재미있는 판타지로 즐길 줄 아는 교양 있는 소비자로 선을 넘는 형위나 유치한 플롯, 과장된 신체 묘사는 물론, 매번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오르가슴을 느끼고 남자는 다량의 정액을 분출하는 장면으로 끝나는 터무니없는 성적 장난질을 그저 즐길 뿐이라는 얘기다. 포르노가 끝나면 남자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아무런 변화도 겪지 않은 채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일부 포르노 옹호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를 반박하는 사람은 판타지와 현실을 혼동하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207/433)

아이러니하게도 포르노는 판타지라고 주장하는 측이 놓치고 있는 짐은 실은 포르노가 우리의 상상력과 성적인 창조성을 오히려 제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포르노가 전달하는 이미지가 사고를 마비시킬 정도로 내용이 반복적이고, 정신이 둔해질 만큼 단조롭기 때문이다. (211/433)

"포르노는 강간으로 이어지는가?"라는 질문 대신, 포르노의 메시지가 우리의 현실과 문화를 형성하는 방식에 대해 더 섬세한 질문을 던진다면, 이미지가 곧 강간으로 이어진다는 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질문을 재정립함으로써, 포르노의 서사가 그 일관성과 통일성으로 만들어 낸 세계관이 이용자의 사고체계에 통합되어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해, 인지, 해석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214/433)

남아와 성인 남자는 비디오 게임, 영화, 텔레비전, 광고, 남성잡지에서 그러한 이미지를 접하며, 그 이미지는 그들에게 여성, 남성, 섹슈얼리티에 관한 서사를 제공한다. 포르노의 역할은 이 같은 여성에 대한 문화적 메시지를 가져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는 간결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일부 미디어 이미지는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미디어 연구에서는 이를 ‘다의적polysemic‘이라고 한다) 특히 곤조 포르노의 경우 - 여성을 향한 노골적인 멸시와 여자가 굴욕당하고 폄하당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끝도 없이 보여주는 서사를 통해 남자에게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이들은 성차별적 대중문화 이미지로 가득한 사회에서 자란 덕분에 어느 정도의 포르노적 시선을 이미 체득한 상태다. (215/433)

해방을 위해 싸워 온 집단이라면 누구나, 미디어 이론가들이 수십 년에 걸쳐 깨달은 사실, 즉 미디어 이미지가 억압당하는 집단을 체계적으로 비인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직관적으로 안다. 이 이미지는 결코 개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집단에 가해지는 지속적인 억압을 합리화하는 메시지의 더 광범위한 체계 안에 연루되어 있고, 그것이 가진 권력은 대개 태도나 행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묵인하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정상화하는 데서 나온다. (217/433)

텔레비전에서 예컨대 흑인이나 유대인을 계속해서 인종차별적 혹은 반유대주의적으로 그리는 드라마나 시트콤이 쏟아져 나온다고 가정해 보자. 백인 남자가 이들의 머리를 잡아당기고, 얼굴을 가격하고, 목을 조르며 그들의 입에 이물질을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추측건대 격한 항의에 부딪힐 것이고, 그러한 이미지는 단지 판타지라는 이유로 옹호받지 못할 것이며 보이는 그대로 간주될 것이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가하는 가혹행위다.
포르노는 폭력에 성적인 외피를 덧씌우며 그것을 비가시화하며, 결과적으로그 폭력에 저항하는 이들은 반폭력주의자가 아니라 반섹스주의자로 규정된다. (218/433)

포르노가 강간에 개입하는 방식은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포르노를 이용하는 모든 남자가 강간을 저지르는 건 결코 아니지만, 포르노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상화하고, 합리화하고, 묵인함으로써 페미니스트들이 ‘강간 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형성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미지들은 폭력과 학대로 가득한 섹스를 당사자 모두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는 ‘섹시‘한 것으로 묘사한다. 이러한 포르노의 메시지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비정상적이며 용인될 수 없다고 규정하는 사회의 규범을 갉아먹는데, 사실 이 규범은 남성지배적 사회에서 이미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대량 생산된 이미지 대다수가 여자에게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신체 온전성이나 영역, 경계가 없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들 이미지는 총체적으로 작용해 그러한 경계선을 넘는 행위를 여자가 원하고 즐긴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포르노가 그 이용자에게 전파하는 다양한 강간 신화 중 일부이다. 포르노에는 다른 수많은 신화가 내재해 있는데, 모두 성폭력을 폭력의 행위가 아니라 합의에 기반한 행위로 묘사하는 게 목적이다. (234/433)

포르노의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질문을 뒤집어 보는것이다. 포르노가 이용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묻는 대신, 어떤 조건에서 그러한 이미지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을지 물을 수 있다. 즉, 남자가 포르노의 서사에 대항하려면 어떤 것에 노출되어야 할까? 나를 비롯한 미디어 연구자들은 자본주의와 짝을 이루는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의 지속적 유입으로부터 사람들의 면역력을 길러주는 방법을 논의할 때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대개 그 해답은 그것에 반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하여 소비 이데올로기의 허위적 본질을 드러내고 대안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있다. 포르노의 반이데올로기 또한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그 메시지를 방해하고 파괴해야 하고, 포르노만큼 강력하고 즐거워야 하며, 남자에게 포르노 속 여성의 이미지는 허구이고, 특정한 형태의 섹스만을 팔기 위해 꾸며낸 거라고 설득해야 한다. 또한 이 대안 이데올로기는 이성애 섹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야 하며, 그것은 성 평등과 정의에 입각해야 한다. 그러한 페미니즘 이데올로기에 노출된 남성은 극히 드물다. 남자(그리고 여자) 대다수는 성 불평등이 자연스러우며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현실인 것처럼 느낄 정도로 지배적인 성차별 이데올로기를 매일 주입당하며 살아간다. 포르노는 이 이데올로기를 최대한으로 뽑아먹을 뿐 아니라. 그것을 포장해서 고도로 성애화한 형태로 남자에게 돌려준다. 그것에 대항하는 반이데올로기가 부재한 상태에서 이같이 달콤한 성차별 이데올로기는 지배적 사고방식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포르노는 사회화의 유일한 행위자는 결코 아니지만, 그 강렬한 이미지와 우리신체에 미치는 영향 덕분에 강력한 설득의 도구가 되었으며, 남자가 여자를 동등한 존재로, 자기가 당연히 갖는 인권을 마찬가지로 당연히 가지는 존재로 보는 능력을 잠식하고 있다. (237/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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