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지난주 읽은 앞부분 밑줄.

나는 몇 년 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한 스님과 토론한 적이 있다. 스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먼저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양식을 담은 것 같은 이 말이 내게는 정신적으로 유해한 말처럼 들렸다. 만일 개개인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기 위해 스스로가 정의로운 존재가 될 때까지를 기다린다면, 결코 정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평화를 위해 싸우려고 스스로가 평화로운 존재가 될 때까지를 기다린다면, 결코 평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려고 스스로가 (내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될 때까지를 기다린다면, 결코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현세의 악과 싸우기 위해 천국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의미다. 오히려 모든 역사는 사회의 변혁이 영성이나 자아의 작업과는 크게 분리된 작업이었다는 걸 보여준다. (6%)

나는 미셀 셰르의 이 마지막 지적에 근거해 기꺼이 다음과 같이 말하려 한다. 내가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를 가장 위협하는 건 내가 ‘보편화된 무관심‘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 즉, 무엇에 대해서건 연대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우리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작은 사적 영역만을 무한정 개발할 수밖에 없을 만큼, 사회적 연결이 순전하고 명백하게 해체된 현상-사회학자들이 개인주의의 승리라고 부르는 현상, 혹은 우리 프랑스의 사회학자들이 익숙해진 영어식 프랑스어로 표현한다면, 커쿠닝cocooning이다.
이 개인주의의 승리는 우리 사회의 경제체제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개인주의는 명백히 자본주의와 호응한다. 심지어 개인주의는 아마 자본주의의 한 결과일 것이다. 개인주의 혹은 커쿠닝은 소비자들을 아주 많이 만들어낸다. 그리고 개인주의가 소비자들을 아주 많이 만들어내는 동시에 개인들은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개인주의는 또한 그 소비자들에 걸맞은 생산자들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경제체제는 개인주의에 의해서는 위협받지 않는다. 우리의 사회는 아주 오랫동안, 혹은 적어도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존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연결을 맺는 데, 공동체를 만드는 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의미‘나 ‘방향‘이라는 걸 만드는 데 실패할 것이다. 우리의 사회는 존속할 테지만, 우리의 문명과는 결별할 것이다. 그런데 문명 없는 사회가 결코 존재한 적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그리고 자신의 문명이 다한 이후에 아주 오랫동안 존속했던 사회도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내게 불안한 점은, 우리나라에서 이 신의 사회적 죽음이 동시에 정신의 죽음에로 귀결된다는 것ㅡ적어도 서구사회에서, 우리가 과거부터 정신이라는 말과 연관하여 생각했던 그 정신적 삶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는 텅 비는 대신, 많은사람들이 슈퍼마켓에 가는 일 이외에는 다른 일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정신적 죽음의 상황을 즐긴다면 잘못된 일이다. 무신론자인 내가 여러분에게 슈퍼마켓이 교회를 대신하지 못한다고 감히 말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제공해줄 것이 슈퍼마켓밖에 없는 사회는 진실로 미래가 없는 사회라고 말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더구나 젊은이들도 그러한 정신적 죽음의 상황을 잘 느낀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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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4 15: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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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4 16: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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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4 18: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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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4 1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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