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를 만든 여자들
잉에 슈테판 지음, 이영희 옮김 / 새로운사람들 / 1996년 4월
평점 :
절판


마르타 베르나이스, 베르타 파펜하임, 이르마, 엠마 엑크슈타인, 도라, 자비나 슈필라인, 헤르미네 후크 헬무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마리 보나파르트, 힐다 두리틀, 헬레네 도이취, 카렌 호르나이, 멜라니 클라인, 안나 프로이트.

아는 이름이 있는가? 몇 명이나 되는가? (프로이트도 정신분석학도 뭐하나 아는 게 없기는 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 많아서 충격이었다.)


책을 읽을 때 기본으로 갖게 되는 감정은 분노이다. 책 전체에서 간간이 나오는 프로이트의 '발언'들은 무엇보다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다. 세상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사람들은 자기를 숭배해야만 한다는,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생각하고 그 위대함에 흠집을 내는 어떤 요인도 용납하지 못하는,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두려움은 감추고 허세는 부풀리는,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지금도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런 남자의 전형. 그가 자신의 연구에서 '정상'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었던 것은 책의 제목처럼 '프로이트를 만든 여자들' 덕분이었다. 이 여자들은 각각의 입장과 사고를 가진 인물들이었으므로 한꺼번에 뭉퉁그려 우러르거나 반대로 깎아내릴 수는 없다. 그들은, 프로이트를 열렬히 사랑하고 숭배했고, 평생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프로이트로부터 시작해 저항의 길을 걸었다.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이 독이 되기도 약이 되기도 했다. 프로이트의 시대에 여성 정신분석학자가 많았다는 사실도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된다. 그들이 궁금해진다. 카렌 호르나이나 멜라니 클라인 같은 사람의 저서를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게 된다. 똑똑하고 재능 있었던 여자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가장 덜 알려진 존재이면서 가장 많이 힘들었을 사람은 마르타 베르나이스가 아닐까.(개개인의 삶의 고통을 절대적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남아있는 자료가 거의 없어서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생각으로 53년의 결혼 생활을 했는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다. 평생을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의 연구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일기도 편지도 무엇도 없다.('프로이트문서보관실'에 편지가 보관되어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남자의 전형인 사람 곁을 오랜 시간 지킨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지치는 일이다. 우리는 그저 그렇게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책의 한 부분에 마르타는 아이들을 아버지 프로이트가 '분석'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잘 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유명한'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으며 자랐겠지만 정신분석의 대상까지 되었다면 그들은 더 힘든 삶을 살았으리라고 혼자 추측해본다. 그래서인지 아버지 프로이트를 이어갔다고 평가받는 안나 프로이트의 삶도 안타깝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프로이트를 만나서 대상으로 분석되었을까. 프로이트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활동하던 남성학자들, 정신분석학에 종사하던 그들이 만난 여자들까지 생각한다면, 우리가 모르는 것들은 얼마나 더 많을까. 세상 훌륭하고 위대해서 존경받는 역사 위의 남성들을 떠받치고 있는 건 그 주변의 여성들이라는 사실, 이젠 새삼스럽지도 않은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로만 깔려있는 그 여성들은 지금도 세계 어디에나 있다. 아직도, 여전히. 남자를 떠받치고 있는 여자, 이 그림을 각자의 집안으로 가져가도 별 무리없이 들어맞지 않나? 이런 구조는 깨어져야 한다. 변하지 않을 사람들보다는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자각으로부터. 내가 왜 엎드려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에서부터. 네가 엎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비판하고 책임을 묻는 것에서부터. 그렇게 생긴 균열은 반드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할 것이다.


(제목 '역사가 망각한 여성의 업적'은 역자 후기에 나오는 구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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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3-31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서재 더 자주 들리지 못해 민망스럽다 하려던 차에, 첫 문장 나열된 이름 중 딱 하나 알아보는 저.

이 방향에서는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역사가 망각한 여성의 업적] 명확한 제목만큼이나 메시지도 명확하겠네요
이름을 기억 못한다는 자체가 소극적 가해일까? 자기반성해봅니다. 저역시 이름 기억은 커녕 남지조차 않을 존재이면서....

난티나무 2022-04-01 00:52   좋아요 2 | URL
저도 대부분 모르는 이름들이었어요.^^;; 책을 통해 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프로이트 🐕 나쁜 놈인 거도 알아서 다행이고요.^^;;;;
재미있으면서 슬프고 분노가 불타오르는 책이었습니다. 절판되어 아쉬워요…
말씀하신 소극적 가해… 저도 생각해 봐야 겠습니다.

mini74 2022-04-0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몀 유명남성들의 그늘에 가려진 이들이 많은거 같아요. 수학잘했던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부인, 볼테르의 조력자였던 에밀리 뒤 샤틀레. 그리고 난티나무님이 알려주신 프로이트를 만든 여자들 ㅠㅠㅠ이런 글들 읽으며 많이 배우는 거 같습니다 ~

난티나무 2023-03-31 15:09   좋아요 0 | URL
아니 답글이 없네요!!!! 이런 @@
mini74님 잘 지내시죠? 소식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