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빈 곳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앞에 가는 차가 열심히 달리면서 비켜주어 내가 앞으로 달려갈 수 있듯이 말이다. (속도가 그 빈 곳을 채우는 데 열심이긴 하지만.) 만약 너와 나 사이에 빈 곳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서로에게 질식해 이미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말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누군가 샴 쌍둥이처럼 붙어 있던 우리의 몸을 칼로 베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너와 나 사이의 빈 곳이 우리를 각자로 존재하게 하고, 그 빈 곳이 우리를 다 파먹어, 장차 우리를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줄 것이다. 빈 곳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빈 곳 때문에 우리는 미워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자, 역설적으로 너와 나 사이의 이 '빈 곳'이 말할 수 없이 무겁다." (41~42,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의 빈 곳은 우리를 얼마나 파먹었을까. 자연스레 '너와 나'의 자리에 남편과 나를 대입한다. 사회가 엉망이어도 나라가 위기에 처해도 근심걱정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가 제대로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 버티고 서있기 위해 매일 부딪혀 싸우는 사람은 그와 나, 둘이라서. 김혜순의 글을 몇 번씩 되풀이해 읽어도 이 '빈 곳'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표현하기 어렵다.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 각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 사랑도 미움도 하게 하는 것. 그렇다면 빈 곳은 그만이 갖고 있는 본질, 그러니까 참자아 같은 건가. 서로의 존재를 뼈아프게 느끼면서 빈 곳이 무거워지는 건가.
그런 말이라면 조금 수긍이 간다. 각자로 존재하지 못해 서로의 기댄 팔을 말없이 갉아먹던 시간이 길었다. 같은 높이로 기댔다고도 할 수 없다. 기대고 싶어 기댔다고도 할 수 없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뻗대어본다. 세상은 모든 것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고도 일러주지 않았다. 삶의 지혜를 배울 롤모델 따위는 없고 그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하는 나쁜 모델만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지 못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분노했으나 그나마도 표출하지 않았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게 사랑이겠거니 했던 관계에 진정한 사랑이 새로이 존재할 수 있는지, 마음의 소리를 찬찬히 듣고 들여다보면서 '빈 곳'을 깨우칠 수 있는지, 최근에야 함께 생각하고 표현하고 시도하고 있다. 이 일은 짐작보다 휠씬 힘들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옳다고 믿었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삶의 기준들을 송두리째 바닥에 팽개치고 다시 하나씩 집어 새로운 자리에 꽂아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입당한 사회와 문화의 시선을 버리고 달라진 눈으로, 상대방이 어떤 느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마음을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두 글자로 남편과 묶인 지 24년째다. 묶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서로를 제대로 모르는 채 묶여 살았다. '빈 곳'은 있을 수 없다는 마음이 그렇게 했고 그 마음을 거부하는 마음이 그렇게 했다. 지금에서야 서로의 빈 곳을 찾아 돌아보고 인정한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갈 길이 멀고 우리는 겨우 50이다. 서로의 존재를 뼈아프게 느껴서 빈 곳이 말할 수 없이 무거워질 그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자유로운 춤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