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페미니즘 사상>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앨리스 워커는 어머니로부터 스스로를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고 술회한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도서관 열람카드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앨리스 워커는 정말 엄마에게 스스로를 신뢰하는 법을 배웠을까? 의심을 품는 건 때로 좋지 않는 습관이다. 그러나 기억은 거짓말을 하는 법. 그건 일종의... 합리화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앨리스 워커만큼 마음이 크지 않은 나는 자주 합리화에 빠지곤 해서. 참 삐딱하지.

나는 엄마로부터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나도 모르게 선택적 조작을 당한 내 기억들 '덕분'에 많은 것들이 지워져서 흐릿하지만, 말하기 껄끄러운, 아주 사소하고 그럼에도 내게는 중요했던 무언가를 말했을 때 엄마가 보인 반응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떠오르니 아마 그것이 내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이 또한 조작일 가능성이 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에 나와 엄마를 꼬깃꼬깃 구겨넣고 프레임을 짜고 그 속에서 내가 이기는 결과를 만들어낸 것일 수도. 엄마에 대한 미움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엄마를 이해해,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제는 알겠어,라고 말하는 머릿속의 말들 옆에 그래도 나는 엄마가 밉다? 엄마가 싫다? 이런 말들이 크게 흘러넘친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용감했던 엄마에게 감탄하는 마음 옆에 찰싹 달라붙어 절대로 떠나지 않을 것만 같은 미움, 사라지는 날이 올까? 정체된 듯한 감정들은 여전히 이리저리 흐르는 중일 테다. 엄마를 말하기는, 아직, 여전히, 어렵다.

"다른 한편 내가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가부장적 문화권에서 딸이 자기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결코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뤼스 이리가레 <하나이지 않은 성> - 질문들 188)

"우리 세대의 많은 여성들은 어머니를 사랑하면서도 어머니처럼 되고자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들의 좌절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어머니들의 삶을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분노를 느꼈을 뿐일까? ... 이상스럽게도 딸을 사랑하는 여러 어머니들은, 내 어머니도 그런 분이었지만, 딸들이 자기처럼 자라기를 원하지 않았다. 딸들은 무언가 다른 것을 필요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어머니들이 우리를 격려하고 고무할 때나 당시에는 여성들에게 열려있지 않던 직업에 대한 동경을 털어놓을 때조차, 어머니들은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쳐줄 수 있는 여성상을 제시하지 못했다. ... 어느 어머니든 자기 딸에게 "나 같은 가정주부는 되지 마라"고 똑똑하게 말해줄 수는 있었지만, 이 말을 듣고 어머니가 남편과 아이들의 사랑을 기분좋게 즐기기에는 너무 깊은 좌절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딸은 기껏해야 "난 어머니가 실패한 것을 꼭 멋지게 해내고 말 테야. 나는 나 자신을 여성으로서 충실히 실현시켜야지" 하고 결심할 뿐, 어머니의 인생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간파하지 못한다." (베티 프리단 <여성성의 신화> - 위기에 처한 여성들의 정체성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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