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라는 제도의 유해성과는 별도로,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선생님들이 모두 아이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꿈을 응원하고 책을 읽는 법을 알려주고 끌어주고 다독이는, 그런 멋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새삼 가져본다. 어린 시절에 그런 선생님을 단 한 명만 만났다면, 독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주는 선생님이 단 한 명만 있었더라면,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는 건 여전히 쓸모없는 말일 뿐이지만, 그랬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했을 것인가 생각한다. 그랬다면. 괜찮다. 학교에서 만나는 선생님만 선생님인 것은 아니니까.

열등생이었던 페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십 대 후반에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설령 그것이 암기 위주 지식에 불과하더라도, 책상에 앉은, 수많은 다양성을 가진 그 아이들을 대하는 것은 나에겐 너무 벅찬 -가슴 뿌듯한 벅참 말고 힘겨운 벅참- 일이었다.

잊혀지지 않는 장면 중 하나. 국어를 가르치면 한문도 자동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일종의 세트세트 교과분류에 따라 한문 수업도 잠깐 한 적이 있다. 공부를 싫어하는 한 중학생 아이는 대체로 10점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내 나름 성의를 다해 공부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변화시켜보려고 수업시간 애를 썼고 아이들의 시험성적이 오르기를 바랬으며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바랬고 무엇보다도 공부를 계속 싫어하지 않기를 - 왜냐하면 몇 년간 어쩌면 대학에 간다 하더라도 공부에 대한 압박감은 주구장창 느껴야 할 테니 - 바랬다. 또 한 명의 어른이 하는 시덥잖은 잔소리로 들릴 게 뻔하더라도 말이다. 다음번 시험을 치고 온 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예의 그 아이가 눈을 빛내며 선생님 선생님! 나를 불렀다. 자랑스러운 기운이 눈에 가득했다. 저 한문 잘 쳤어요! 반가운 마음에 몇 점 받았냐고 물었다. 미숙한 나. 아이는 당당하게, 자랑스럽게, 뿌듯하게, 외쳤다. 20점이요!!!

미숙한 나는 얼굴에 미소를 띈 채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 같다. 입을 열면 조롱의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미 내 눈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장면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잘했다고, 말했어야 했다는 자책. 아이의 자랑스러움에 공감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그 순간의 격려가 아이를 도울 수도 있었으리라는 후회. 인간은 합리화의 동물인지라 이 생각은 나중에 이렇게 바뀌기도 했다. 내 입에서 조롱의 말이 나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랬다면 나는 더더욱 그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 순간엔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소용없다. 너는 그저그런 선생 나는 그저그런 학생, 이었던 멀찍한 관계가 너는 쫌 괜찮은 선생 나도 쫌 괜찮은 학생, 그래서 우리는 다정한 사이,인 관계로 바뀔 기회는 그 순간 이후 사라졌다. 친밀함을 쌓을 수 있었던 기회는 날아갔다. 나는 아직도 그 아이의 까까머리와 동글세모한 얼굴과 장난기 많은 그 웃음과 눈을, 기억한다. 여전히 그 눈에 미안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 아이들에게도 쫌 괜찮은 사람인 엄마,가 되지 못한다는 현재진행형 사실은 이십대의 나와 오십이 코앞인 지금의 내가 별로 달라진 것 없는 그저그런 사람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매일 조금씩 페낙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런 기억들이 무한반복으로 튀어나오리라는 걸 알았다. 학생으로, 선생으로, 그리고 이제는 학부모로, 내 경험들이 순간순간 치솟아오를 것을, 잊지 못하고 잊을 수 없는 기억들과 수많은 두려움과 죄책감과 미련과 후회와 그에 비해 양으로 따지자면 엄청나게 적은 만족감과 희열, 행복과 자긍심 같은 감정들이 함께 툭툭 비집고 나올 것을. 그러기를 바란다.


En tout cas, oui, la peur fut bel et bien la grande affaire de ma scolarité ; son verrou. Et l‘urgence du professeur que je devins fut de soigner la peur de mes plus mauvais élèves pour faire sauter ce verrou, que le savoir ait une chance de passer.

어쨌든 그랬다. 두려움은 분명 학창 시절 내내 나의 가장 큰 문제였고 장애물이었다. 그래서 교사가 된 뒤, 나의 급선무는 공부 못하는 학생들의 두려움을 치료하고 방해물을 치워버려 앎이 스며들 기회를 갖게 해주는 일이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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