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신자유주의 경제와 여성의 일터 

이런 점에서 보여주고 말하고 퍼포먼스하면서 상호작용하는 데 있어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그런 식의 퍼포먼스를 해야 할까요? 남자들의 퍼포먼스는 상당히 다르지요. 왜냐하면 남성은 감정적 피드백이나 지지, 후원을 받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위 맞추는 존재‘처럼 노출하는 행위를 남성성의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신의 말솜씨, 허세, 과시, 카리스마, 능력 등으로 관객과 관중을 조종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방송을 합니다. 누구의 기분을 맞추고, 요구에 응하는 일은 잘 하지 않아요. 여자들은 유튜브에 자신의 요가 장면만 올려놔도 연락하고 추근대고 협박해오는 낯선 남자를 경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죠. 여전히 ‘보여주는 행위는 권력 작용입니다. 남성은 뭔가를 보여줌으로써 인기와 돈을 얻지만 성적 위협이나 폭력은 당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짚어볼 것은 최근 여성들이 많이 일하고 있는 심미노동(aestheticlabor) 분야입니다. 심미노동은 기업이 이윤 확대를 위해 노동자의 신체를 개발하고 동원하며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노동자가 자신의 신체와 인성을 변화시켜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걸맞은 미학적 이미지를 구성해가는 노동을 의미합니다. 패션 리테일 숍, 호텔, 바, 고급 사교클럽 등에서 고객 응대를 하는 사람의 경우, 옷, 외모, 표정, 목소리, 억양, 제스처 등을 스타일 있게 표현해서 보기 좋고 듣기 좋게 매너 있는 신체를 갖춤으로써 고객의 미학적 감각을 자극 하여 이들의 소비를 끌어 내는 일을 합니다.

이처럼 낯선 환경에서 빠르게 동료들 안으로 들어가야 일을 할 수 있는 이 여성들은 가짜 친밀성(fake intimacy)을 매우 자주 연기합니다. 실제 마음과 달리 이런 대사를 하면서요. "어머, 오늘 우리 팀장님, 너무 멋있으세요. "오늘 날씨 화창한데, 우리 그럼 또 옥상에서 티파티?"(웃음) 그런데 여성들의 이런 퍼포먼스가 매우 잘못된 메시지로 읽힙니다. 여성이 처한 이 구조적인 조건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성들이 왜 그런 방식의 친절과 세련됨을 수행하고, 빠른 시간 내에 친밀함을 보여주고, 옷을 예쁘게 입고, 초창기에 명랑하고 빠릿빠릿한 척 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이 여성들은 노동 시장의 구조와 열악한 노동 조건 때문에 가짜 친밀성, 연출된 친밀성으로 빨리 회사에 진입해서 일하기를 택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수치적 평등에 도달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만큼 일터가 여성에게 ‘정의롭지 못한 위치를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의 남성성은 집과 같은 사적 영역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성의 발휘는 공적 영역에서 남성들과 함께 있을 때, 남성 동성사회의 권력 전시장 안에서 일어나는 행위입니다. 다른 남성과의 관계에서 나의 힘을 과시하고, 남성 동성사회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갖고, 남성들에게 인정받아 지위를 획득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남성들의 파워 게임이나 사나이 게임에서는 남이 보는 앞에서 대범하게 여성을 희롱하고 추행하는 전시적 성폭력이 매우 흔하게 벌어집니다. 자신이 남성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여성의 신체에 대한 접근도로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하는 여성들이 대다수이고 일을 쉽게 그만두지 않을 것이며 능력도 있다면, 우리는 이제 게임의 룰을 바꾸는 데 힘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요? 구조화된 여성 불평등은 이미 여러분이 다 아는 사실일 것입니다. 여성으로서 우리 삶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한순간을 만들어보는 것. 즉 삶의 미학화, 일상의 미학화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조금만 더 흔들려보고 조금만 더 다른 방식으로 이동해보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일과 노동, 우정과 연대, 취향과 살림살이와 경제력을 어떻게 새로운 방식으로 잘 결합해서 자존감 있는 노동자가 되고, 활력 있는 일상을 꾸려갈 것인가를 논의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 여성들의 일 경험이 이미 바닥을 쳤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바로 거기서 뛰어오를 수 있어요. 바닥에서 뛰어오르는 활력과 힘을 믿어보면서 일터와 삶터를 재배열하고 변화시켜보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해도 계속 자기 정의를 내려가며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소수자가 스스로를 대변하는 소수자 정체성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행위가 무슨 의미냐는 질문은 이 표출 자체를 막아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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