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케이션은 자원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 여자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이상 실현? 가치 창조? 여자는 이데올로기나 이념으로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나 이념에 약한 지식인을 제외하면, 여자나 대중은 대부분 자신과 자신의 생활 외에는 흥미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 내 삶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를 표현하고 싶다, 이런 것들이 당사자에게는 가장 절실한 욕구다.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타자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재미있는 것이다. 인간관계란 모든 자원을 소진한 뒤에 남는 최후의 자원이다. 자원은 쓰면 없어지지만 이 자원은 고갈되지 않는다. 다른 자원이 대 손에서 빠져나가도 이 자원만은 남는다. 관계를 맺고 있는 한, 가장 재
미있는 자원이다. 이 ‘관계‘라는 자원을 만들어가는 운동이 여자의 운동이 아니었을까. 다만 ‘관계‘를 만드는 능력은 개인차가 두드러진다. 이 차이는 나이를 먹을수록 벌어진다. 돈도 시간도 체력도 의지가 되지 않는 인생의 가을에, 마지막까지 힘이 되는 것은 ‘관계‘라는 자원이다. ‘관계‘는 노후의 여유 자산이다. 그것을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로 당신의 삶의 방식이 부정될지도 모른다고 하면 지나칠까. 단 ‘관계‘를 만드는 능력은 학습이 가능하다. 배움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 여자들은 고립된 곳에서 어렵게 벗어나 이 ‘관계‘라는 자원만들기를 운동 안에서 서로 배웠다. 여자의 운동이 지닌 성장하는 힘, 그것이야말로 가장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닐까.
소노 씨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엘리트주의일 것이다. ‘정말로 실력 있는 여성들은 묵묵히 일해왔다‘ 라는 말에서, 자신은 실력이 있어서 발휘해왔다,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당신은 결국 쓸모없는 인간이다, 라는 본심이 드러난다. 이것은 여타 엘리트 여성에게서도 많이 보이는 사고방식이다. 엘리트 여성은 프라이드가 매우 높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를 공통의 문제와 결부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결과 그녀들은 강자의 논리를 몸에 익히고, 약자에 대한 상상력을 잃고 만다. 엘리트 여성의 엘리트주의는 골치아프다, 라고 자숙의 마음을 담아 말해둔다. 페미니즘은 사회적 약자의 운동이다. 여성에게 이미 ‘실력‘이 있다면 이런 운동은 필요 없다. 나는 객관적으로는 엘리트 여성이지만(어쨌거나 대학 조교수이니까), 자신이 혜택 받은 특권적 소수파 안에 있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다. 내가 했으니까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다름 아닌 슈퍼우먼 신드롬이다. 엘리트 여성과 엘리트주의자는 다르다. 자신의 처지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상상력을 잃었을 때, 엘리트 여성은 엘리트주의자가 된다.
역사의 변화는 남자와 여자, 아이와 어른에게 불균등하게 찾아온다. 변화의 예고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은 여자와 아이다. 이유는그들이 사회의 주변부에 있기 때문이다. ‘남자의 성(城)‘ 안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는 남자들은 발밑까지 밀어닥친 변화의 물결을 알아채지 못한다. 여자가 바뀐 것은 필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바뀐 것이다. 이제 이런 것은 할 수 없다고 여자들은 저마다 말하기 시작했다. 남자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에게는 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자가 가만히 있었던 지금까지는, 하지만 남자들도 이제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여자가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은 남자의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느낌일 것이다. 부부의 상황을 떠올려보라. 신혼 때는 "당신만을 따르겠습니다" 했던
아내가, 20년이 지나자 자립을 원하고, 30년이 된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이혼을 요구한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나는 변한 것이 없는데. 변해버린 건 당신이잖아?" 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 당신이 변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이혼 서류를 받은 그날 아침까지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당신의 그 둔감함이 문제인 것이다.
페미니즘이 ‘발명한 여러 표현 가운데 최대 히트작은 ‘무임금 노동‘이다. 가사도 노동이다, 심지어 돈도 못 받고 하는 부당한 노동이다, 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부부 싸움에서 아내를 침묵하게 만드는 남편의 필살기, "누구 덕에 먹고 사는데?" 라는 공격에도 반박할 말이생긴다. "당신이야말로 누구 덕분에 매일 편하게 출근하는데? 나도 온종일 쉬지도 못하고 일한다고." 남편은 더 격분해서 말할 것이다. "당신이 하는 일은 돈이 안 되잖아. 그런 건 일이라고 할 수 없지." 그럴 때는 이렇게 되받아쳐주자. "당신이 하는 일이 돈이 되는 건, 남자라는 허울 때문이야. 결코 당신이 잘나서가 아니라고." 페미니즘은 여성을 이론으로 무장시켰기 때문에 이런 아내를 둔 남편은 쉽지 않을 것이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부부 사이는 확실히 나빠진다(하하). 아내의 수인한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까지는 ‘나 하나만 참으면 하는 아내의 포기와 인내로 부부 사이가 평탄하게 유지돼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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