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버틀러의 책은 안 읽고 다른 책 구절 가져오기. 




"앞서 서술한 "생물학적 여성이란 논쟁적인 용어"라는 언설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제3물결 페미니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기존 페미니즘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졌던 섹스(생물학적 성)와 젠더(사회적 성)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는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가 등장하면서 여성학계에는 커다란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젠더 트러블』에서 섹스 역시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이고 정치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주장은 섹스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곧 생물학적 자연에 대한 소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순수한 생물학적 실체가 맞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보자. 보부아르가 위와 같은 주장을 했던 1949년 당시, 지배적인 성 담론은 사회생물학이었다. 사회생물학은 남성의 성은 충동적이고 능동적인 반면, 여성의 성은 수동적이고 반응적이라고 여기며,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동의 기초를 생물학적 근거에서 찾으려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보부아르는 역으로 사회규범이 여성성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자연적인 실체인 것처럼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버틀러는 한 발 더 나아가서, 겉보기에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성적 사실들이 정치적이고 사회문화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면서 과학 담론인 양 이해되고 있었다면, 섹스가 불변의 특성을 지녔다는 것 역시 의심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스스로 몸의 경험을 인식하는 것마저 사회적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섹스가 아닌 젠더가 아닌가. 자궁을 적출하거나, 완경한 여성을 훼손된 여성이라 간주하던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와 "자궁이 없는 자, 말하지 말라"라는 넷 페미니스트들의 언설은 얼마나 상통하는가. 버틀러는 "생물학은 운명"이라는 공식을 논박할 의도로 제시된 섹스와 젠더의 구분이 오히려 그 주장에 공헌하게 되었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처럼 버틀러는 2세대 페미니즘이 그동안 다뤄오지 않았던 가부장적 이성애주의를 퀴어의 정치학으로 비판하면서 역대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도발적으로 해석한다. 또한 버틀러는 운동 주체로서 보편 여성이라는 일관되고 매끄러운 재현주체가 필요하다는 기존 페미니즘의 정체성 논의에도 반기를 든다. 버틀러에 의하면 주체가 정치학에 앞서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지점이 가장 정치적인 지점이다. 왜냐하면 정치학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주체가 있다는 생각은, 배타적인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주체가 구성되고 생산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 떄문이다. "여성"이라는 용어는 늘 가변적이고 모순적으로 성립되며, 누군가를 규정하는 완전한 의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여성이라는 대상을 재현하고자 할 때, "어떤 여성을 재현할 것인가?"라는 불안한 경합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따르는 배타적인 실천은 결국 '동일성의 폭력'이라는 또 다른 폭력에 가담하면서 더 심한 파편화를 불러일으킨다." 


(이아름 「모두의 페미니즘을 위한 정치윤리학 : 당사자주의를 넘어서 우리'에 대하여」,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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