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난파선 상황이 아니더라도 남자들은 가부장적 서열에서 권력을 쥔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종종 가혹한 처지에 놓인다. 전쟁에서 떼 지어 죽는 것도, 업무 관련 사고에서 부상을 당하는 것도, 때로는 마음 속으로 예술 분야처럼 수입이 불확실한 직종을 갈망하면서 할 수 없이 가계 부양자의 책임을 맡는 것도 대부분 남자다. 이 모든 것이 지배 집단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집단에 속하는 것은 권력의 소유와 행사뿐 아니라, 권력을 갖지 않은 사람들을 도우며, 지배적 위치가 주는 스트레스를 감내함을 의미한다. 여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젠더 이분법이 남자아이에게 주는 폐해는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그 중 가장 우려되는 결과는 감정 영역에 있다." (16장) 


난파선 이야기는 영화 타이타닉이다. 옛날옛적에 영화를 볼 때 식구들과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여자가 조금만 더 날씬했더라면 둘이 같이 나무판자에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라고 여자의 몸을 탓했고, 웃었다. 정말 여자가 날씬했다 하더라도 둘이 올라갈 수는 없었을 테니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여전히 여자를 탓했구나, 나조차도. 책에 나오는 것처럼 당연히 여자를 살려야 한다는 '기사도' 정신은 가부장제의 결과물인 것을. 또 구명보트에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태우는 장면에서 발휘되는 '기사도' 정신은 남자식구들의 입에서 억울함을 내장한 발언이 되었다. 할 만큼 하지 않았어? 내 목숨보다 여자와 아이들을 먼저 살리려고 하잖아. 그런데 왜 여자들은 불평불만이지? 이런 식의 생각들. 그러니까. 그게 여자들 탓이 아니라 가부장제 탓이라니까? 이렇게 받아칠 줄 몰랐던 나는 좀 어이없었지만 뭐라 대꾸를 하지 못했었다. 하긴 그렇게 대꾸했어도 뭐라니~ 하는 반응들이었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 영화도 내 몸 바쳐 여자를 구했으니 고마워해라, 어쨌든 남자는 영웅일 수밖에 없다, 뭐 이런 말 하는 거 같아 매우 찜찜하네.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한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이 모든 것이 지배 집단에 속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이 사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서 폐해들을 내세우며 남자도 피해자다, 여자만 억울한 게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한다. 남자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이 사회이며 가부장제이며 가족과 결혼제도라는 것을 모른다.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남자도 피해를 본다구! 하는 말에 좀 대꾸를 할 수 있으려나. 


마침 읽고 있는 다른 책에 기사도 정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사랑이 여자아이 전유물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며 우리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성차별적인 고정 관념에 갇혀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세월이 지나면 꽉 막힌 이 시야는 성차별적인 폭력, 특히 커플 간 폭력의 기반이 된다. 남자아이들이 사랑하며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남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기준에 맞추어 행동하게 한다. (중략) 

기사도보다는 예의를 갖추라고 가르치자. 페미니스트 블로거인 크레프 조제트가 콕 집어 말했듯 겉으로는 몹시 친절한 기사도 정신 역시 성차별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그녀는 프랑스 대표 사전 라루스가 기사도를 가리켜 '여성 주변에 집중되는 예절과 친절'이라 설명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중세 시대 궁정에서의 사랑에서 전해 내려온 기사도 정신은 원래 여성들이 편히 이동하고 머물 수 있게 해주려는 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유혹의 방편이기도 했다.(숙식을 제공해 주니 말이다.)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문제가 있다. 일단 기사도라는 것은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그 사실만으로도 전적으로 성차별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둘째, 여성은 작고 약한 존재라 혼자서는 자기 옷도 하나 걸지 못하고 가방도 들지 못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셋째, 기사도는 종종 '대가'를 기대한다. 예를 들면 내가 밥값을 냈으니 이 여자도 내게 뭔가(대개는 섹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방식이다. 이쯤 되면 기사도 시대는 그만 끝을 내고 예의범절에 집중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다른 이를 위해 문을 잡아준다든가 무거운 장바구니를 함께 들어준다든가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등의 행동은 예절에 속하며 남녀 구분 없이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여성을 떠받들게' 두는 것은 몹시 겁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 아이들에게, 성별을 떠나 모든 사람에게 호의적이고 친절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자.(여자는 공주가 아니다. 게다가 남자가 여자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해서 그 여자가 그에게 신세를 진 것도 아니다.) "

- <나의 아들은 페미니스트로 자랄 것이다> 중에서 


이 부분을 읽으니 기사도 정신의 유래에 대해 찾아보고 싶네. 엄청 많은 이야기들이 또 숨어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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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5 22: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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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6 05: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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