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박실재론 : 우리 몸 밖의 세계는 우리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는 관점.
* 확증편향 : 자신의 선입견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것.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읽는 중 나오는 두 개의 단어. 이렇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글 [편협한 이야기의 위험 The danger of a single story]에도 마찬가지 맥락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이지리아 사람인 작가가 '아프리카인'이라는 말을 미국에서 들으며 '새로운 정체성'이라 명명한 것처럼 나에게도 새로운 정체성이 생겼다. '아시아인'이다.
프랑스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빠리나 리옹 같은 대도시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 대도시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시골에서의 경험. 일단 어 아시아사람이다, 관심을 던진다. 신기하니까. 다르게 생겼어. (웃기게 생겼어,가 더 맞을 지도.) 어디서 왔어요? 그리고는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일본?(나 일본 알아.) 중국?(중국도 알지.) 베트남? 태국?(어쩌면 프랑스에 있는 외국식당을 아는 순서대로 대는 것 같기도 하네.) 아무튼 아는 아시아 나라들 대여섯 개를 줄줄이 대보면서 맞추려고 든다. 아는 나라를 다 말해도 끝까지 한국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내가 답을 말해 주면 아아 그런 나라가 있었지 하는 표정으로 얼른, 아 축구!(한참 축구로 한국이 이름을 날렸던 때) 요즘이라면 아 BTS!(라고 할 지도 모르겠지만 웬만한 나이대의 사람들은 모르기 일쑤다.) 혹은 기생충!(나 그거 봤어.) 또는 남쪽이냐 북쪽이냐를 묻는다.(나 좀 알지, 거기. 김정은도 알아. 그러면서 한국 대통령 이름은 모름.) 그러니까 그들에게 한국은 둘로 나뉘어진 나라이면서 아시아 어딘가에 있는 작은 나라임에도 축구를 아주 잘하는 나라인 것이다. 영화로 알려진 작은 나라인 것이다.(아마도 영화 속 이야기가 한국의 흔한 이야기라고 착각하겠지.) 면전에 대고 말은 잘 안 하지만 아마 속으로는 너네 개고기 먹는다며?도 추가될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아디치에가 말하는 싱글 스토리, 편협한 이야기다. 미국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대해 편견을 갖듯이 말이다. 한 단면만 보고 판단하는 오류.
나는 그렇게 프랑스에 와서 '아시아인'이 되었다. 대체로 외모만으로 중국인이라 짐작 당하면서.(엄마, 중국사람이야. 손가락질을 하며 아이가 엄마에게 말한다.) 빤히 쳐다보는 눈빛.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 우월감에 차서 상대를 내려다보거나 비난하는 눈빛. 너 되게 싫다를 의미하는 눈빛. 꺼지지 않고 왜 계속 거기 있니 하는 눈빛. 상대가 눈치채고 쳐다볼 때까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나 너 까고 있어 알리는 눈빛. 무표정을 가장한. 이 눈빛은 도시와 시골을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있었다. (자, 이 눈빛은 인종차별인가 아닌가.)
아디치에의 '아프리카인'은 나의 '아시아인'이다. 아마도 '아프리카인'에 대한 편견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아시아인'도 만만치 않다. 세계 공통 편견이자 일반적인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인종의) 인식대로, 혹은 현실에서 취급당하는 순서대로 인종을 줄세우면 맨 꼴찌로 바닥에 있는 게 아시아 여성이라고 한다. 여기 사람들의 눈에 내가 그냥 '아시아 여자'로 보인다면, 내가 누구든, 어떤 사람이든, 어느 나라 사람이든, 그저 똑같은 취급을 당할 밖에.
흔히 사람들은 어느어느 나라에선 인종차별 안 해요, 그런 일 적어요, 당해본 적 없어요, 라고 말한다. 그 나라에선 그래도 인종차별 안 하지 않나? 하는 편견을 갖고 있다. 외국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인지가 외국에서의 경험을 좌우하고 가치관을 형성한다. 편견도 만든다. 여행 중에 만난 그 나라 사람들이 모두 친절하고 개방적이고 편견 없는 사람들이었다면 당신은 아주 운이 좋은 것이다. 실제로는 자신이 인종차별을 당하는 것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흔하다.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상대의 면전에 대고 혐오감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슈퍼의 계산대에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생글생글 웃던 직원이 내 차례가 되면 굳은 표정으로 바뀌는 일이, 말투가 미묘하게 달라지는 일이, 내 얼굴만 보고 프랑스말을 하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고 잘 되지도 않는 영어를 꺼내 쓰는 일이, 다반사인 것이다. 그것이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인지,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인지는 좀처럼 알 수가 없지만.
'아프리카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가진 편견도 생각해 본다. 아프리카에 대해, 거기 있는 수많은 나라들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대체로 마찬가지일 것이다. 떠오르는 것은 단편적인 단어이거나 이미지일 뿐이다. 그러니 나도 아프리카에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뿐이랴. 아프리카까지 갈 것도 없다. 일상에서도 수두룩하다. 나의 편견들은 내가 깨닫고 깨어버리려고 노력하면 된다지만(실제로 깨지고 말고는 차치하더라도), 눈에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편견은 어찌할 것인가. 가서 콕 집어 편견이라고 말해줄 것인가. 말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어디까지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보다 힘이 세고 권력도 더 가진 사람이라면, 직장 상사라면, 그럴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스스로 깨우칠 일은 없어보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말해도 소용없음을 아는 것은 득인가 실인가. 나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 나보다 약하다는 것은 누가 판단할 일인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아는 게 맞을까. 내 생각 또한 편견이 아닐까. 여러 가지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질문 또한 계속된다. 답을 찾기가 어렵다면 같은 질문을 계속 해야 하는구나 싶기도 하다. 나부터 잘하자에 나만 잘하면 안 되지가 더해진다. 얼마전 읽은 <비건 세상 만들기>에서도 그랬듯이,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은 어렵고 지난한 길이다. 상대에 따라 묘수를 부려야 하는 일이다. 옳음을 주장한다고 해서 편견이 부서지지는 않는다. 작든 크든 하나의 편견을 깨부수는 일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렵다. 얽힌 문제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이었나 싶다. 그랬던 거다. 몰랐을 뿐이다.
([The danger of a single story]는 한글책이 없는 듯 보인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프랑스어판에 실린 글이다.
테드 강연이라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ted.com/talks/chimamanda_ngozi_adichie_the_danger_of_a_single_story?utm_source=tedcomshare&utm_medium=social&utm_campaign=tedspre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