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분통이 터진다. 왜? 도대체 왜? 이유는 책에 있지만 계속 묻는다. 왜? 도대체 왜? 과격한 표현을 좋아하지 않지만 과격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활발히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이런 분통 터지는 사실들을 모조리 알고 나서 얼마나 절망했을까, 얼마나 암울했을까, 그러면서도 그걸 딛고 활동을 하려면 또 얼마나, 매일매일, 순간순간 힘이 들까.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뀌어야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왜 바뀌어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살기 때문이다.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동안 분통을 터트리고 잠시 동안 그 여파가 지속되지만, 책을 덮고 일어서서는 설거지를 하러 가거나 세탁기나 청소기를 돌리러 간다. 나처럼. 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는 아니니까, 내가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조차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책을 읽고 열을 내다가 밥을 하러 간다. 헐벗고 나오는 걸그룹 아이를 보며 열불을 내다 화장실 청소를 한다. 모든 여자 캐릭터를 벗기고 벗기고 벗기는 유치찬란뽕짝을 지나쳐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아이와 한바탕 언성을 높여 싸우다가도 다 돌아간 세탁기의 내용물을 꺼내러 간다. 건조기의 필터 먼지는 나만 치울 수 있는 것 같다.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테트리스 하는 일은 누구도 나를 따르지 못하는 것 같다. 원래 잘 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래 해와서 손에 익었을 뿐이라는 걸, 아무도 모른다. 나도 몰랐다. 도표를 보고 그래프를 분석하는 일보다 매일 삼시세끼 무엇을 만들 것이며 그러려면 무엇을 언제 사서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글자로 쓰지 않고도 머릿속에 착착 개어놓는 일이 처음부터 나에게 맞는 것은 아니었음을, 반복 학습된 것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으나 깨닫는 것 말고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전히 어렵다.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면서도 머리는 생각을 돌린다. 어제 저녁에 한 밥이 조금 남아 있을 테지. 점심은 뭘 먹지? 어제 점심에 라면으로 때웠으니 오늘은 라면 먹이지 말아야 하는데. 하루의 1/3 이상을 이런 생각으로 보낸다. 시간을 재어보진 않았지만 아마 그 정도, 혹은 그 이상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다. 한 문장 한 문장 읽어내려가다가 ‘해야 할 일’이 생각난다. 건조기 안의 빨래를 꺼내지 않으면 습기가 차서 냄새 날 텐데 어제 안 빼고 자버렸네. 가서 꺼내야 겠다. 어제 또 현미를 안 씻어놓고 그냥 잤네. 빨리 씻어서 담가 놓아야 저녁에 밥을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 젠장. 책이 제대로 읽힐 리가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집중해서 읽어야지 아무리 다잡아도 소용 없다. 내 머리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돈다. 샬럿 퍼킨스 길먼은 대단하다. 깨달았으며 그리고 거기에 머무르지 않았다. 행동을 했다. 소설집 하나 읽고 아 좋다 생각했던 것이 존경심으로 바뀐다. 어떻게, 얼마나? 하는 질문이 뒤따른다. 지금 현재도 아닌데, 그 시대에, 실천했다는 그 사실이, 한없이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더 깨달아야 할 것 같다. 아마도 더 오래 책을 읽을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용기 없음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책에서 그랬다.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오늘도 책 소개 어딘가에서 비슷한 구절을 보았다. 맞는 말이다. 분노는 그저 분노일 뿐이다. 




























「그렇지만 가정과학 옹호자들은 가정관리의 합리화된 논리를 따라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만일 가정관리 활동이 정말로 “전문직”의 내용이라면 글자 그대로 가정을 탈사유화하는 것은 왜 안되는가? 가정의 기능을 훈련된 전문가들에게 넘겨주는 것은 왜 안 되는가? 엘렌 리처즈와 그녀의 동료들은 비누 제작, 실잣기 등등이 모두 산업에 흡수됨으로써 개선되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요리, 청소, 육아는 왜 안 되는가? 사실 “가정”은 도대체 왜 있어야 하는가? 관습적이고 비과학적인 가정에 대해 비판한 모든 미국 비평가들 가운데 오직 샬롯 퍼킨스 길먼만이 이 단계에 도달했다. 


“우리는 가정과학의 초석을 세운 사람들이며, 가정경제학에 관한 책을 쓰고 있다. 또 우리는 가정 산업의 표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모든 문제에 필요한 것이 바로 가정 산업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한 사람이 서너 명의 타인을 위해 요리하거나 청소한다는 사회적 구조는 본질적으로 불합리한 것이라고 길먼은 주장했다. 아무리 많은 “과학”이 가정에 세세하게 적용되었어도 가정의 규모 그 자체가 집안일의 합리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사람 만들기” 차원에서 보자면 여성이 남성을 시중드는 모든 가정은 과학적이든 아니든 간에 필연적으로 “끝없는 이기심을 [남성에게] 길러 주는” “자아도취의 온상”이었다. 길먼은 “효율성” 주장을 그 논리적 결론에까지 밀어붙였다. 과거와 같은 가정을 해체하고, 중앙집중식으로 음식 준비, 청소, 양육, 세탁을 담당하는 전문 직원을 갖춘 아파트 공동체에 사람들을 살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성들 대부분이 남자와 동등한 기반으로, 세상에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p.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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